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둥근 것은 굴러야 한다 / 최장순

둥근 것은 굴러야 한다 / 최장순 바람 빠진 바퀴만큼이나 바람 빠진 오후다. 생기 돌던 시간은 어느새 네 시를 향해 절뚝거린다. 마구 달려가고 싶은데 소진된 기운은 좀체 굴러가려 하지 않는다. 봄날의 나른함이다. 바람 가르던 눈부심이 저만큼 사라졌다. 먼지 앉은 자전거들이 적막하다. 값나가는 자전거들은 아파트 현관 안에 모셔두지만 아파트 출입구 보관대에서 묵묵히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자전거들. 내달리지 못할 때 자전거는 자전거가 아니다. 길은 영영 사라진 듯 보인다. 보다 못한 관리실이 처분하겠다는 안내장을 걸어도 요지부동이더니 어느 날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스스로 굴러간 것이 아니라 폐기처분된 것이다. 자전거 페달에 겨우 발끝이 닿은 내가 균형을 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모든 ‘첫’은 긴장과 위험이..

좋은 수필 2021.08.17

공감하다 / 고경서(경숙)

공감하다 / 고경서(경숙) 밤바다와 마주선다. 어둠 속이라 바다는 보이지 않고, 광포한 파도소리만 고막을 때린다. 여전히 강풍에 장대비가 쏟아진다. 거대한 몸집을 가진 설문대할망이 빠져죽은 가마솥처럼 들끓는다. 제 어미를 먹어치운 자식들의 비통한 울음인지 모를 파도소리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갯바위를 치대며 밀회를 즐기던 하르방도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신들의 암투가 아니고서야 이런 야밤에 길길이 날뛰며 돌진해온 바다가 나를, 내 잠을 사정없이 집어삼킬 이유가 없다. 그리움의 바다가 악천후 속에서 제대로 울고 있다. 먹먹한 가슴으로 뛰어든 아우성이 낯설면서도 경이롭다. 이곳은 큰엉 해안이다. 밤늦어서야 찾아든 숙소다. 새벽녘에 갑자기 폭풍경보가 발효되었다. 조천해안도로를 타고 김녕 서포구, 산양 검은 모래..

좋은 수필 2021.08.14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은 한 번도 무엇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다. 태곳적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모든 존재의 무게를 떠받들고 산다. 퇴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나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고, 우격다짐으로 삼킨 눈물은 귓바퀴를 두드리다 돌아나간다. 날선 울음으로 온몸을 곧추세우고, 묵상에 잠긴 밤하늘의 독백을 듣는다. 농밀한 어둠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뿐 함부로 건드렸다간 절벽 아래로 처박히는 수가 있다. 조심하라. 붉은 심장의 박동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한 마리가 땅속 집을 빠져나와 용케 차도로 기어오른다. 화물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헐떡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나절 땡볕에 달궈진 지열이 화끈거리는지 길을 움츠렸다 폈다, 배밀이하듯 끌고 간다..

좋은 수필 2021.08.14

길 /최민자

길 /최민자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 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 보라. 한 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운이 좋으면 지금도 동해나 서해 어디쯤에서 길들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물과 흙, 소금으로 반죽된 거무죽죽한 개펄 어..

좋은 수필 2021.08.14

달팽이 뒷간/노혜숙

달팽이 뒷간/노혜숙 ‘달팽이 뒷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붕 대신 한 평 하늘을 들였고, 문 대신 서원 뜰 한 자락을 들였다. 이끼 낀 진흙돌담은 달팽이처럼 안으로 휘었고, 풍화의 흔적이 스민 잿빛 이엉은 서원 지붕과 어우러져 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 옛날 머슴들의 배설과 애환이 질펀하게 부려지던 ‘통시’의 공간. 뒷간 옆엔 배롱나무 꽃이 천연스럽게 붉었다. 10리 길을 걸어 들어가야 진면목을 알게 된다던가. 팔월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몽환적이었다. 염천의 농익은 볕처럼 붉은 꽃들이 서원 안팎에 흐드러져 피었다. 풍경 속에 건물이 있고 건물 속에 풍경이 들어와 한통속이 된 듯 조화로운 전경이었다. 입교당(立敎堂)에 올라 바라보는 만대루 풍광은 서원의 백미였다. 시선을 들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뚝 선..

좋은 수필 2021.08.12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 안도현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 안도현 1 소싯적에 나는 외갓집 툇마루 끝에 앉아 혼자서 시간 보내는 걸 아주 좋아했다. 그 마루 끝에 오래도록 앉아 있으면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들이 다 떠오르곤 하였다. 굼벵이는 왜 썩은 초가지붕 속에 웅크리고 사는지, 매미는 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울어대는지, 장마철 산에 나는 버섯은 왜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것일수록 화려한 빛깔을 띠는지, 단풍은 왜 산꼭대기부터 붉은 물을 들이면서 산 아래로 내려오는지, 속이 벌어진 석류를 볼 때마다 왜 옆집 누나가 화들짝 웃을 때의 잇몸이 겹쳐지는지,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재미난 생각들이 꼬리에 고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동무들하고 어울려 노는 대신에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는 것도 싫지 않았다...

좋은 수필 2021.08.09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 김응숙

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 김응숙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제 곧 김천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순간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부산행 KTX를 타고 가다 대전역에서 충동적으로 내렸을 때 이미 여정은 꼬인 셈이었다. 대전에서 환승을 해 김천에 오기까지 한 시간 반이 더 걸렸다. 차창 밖으로 ‘김천’이라 써진 표지판이 지나갔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이며 기차가 멈추고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애초 예정에는 없던 김천행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있었다. 역 앞 광장에서 군밤을 구워 파는 아주머니 옆으로 택시 몇 대가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 앞으로 큰길이 있고 그 건너편은 시장이었다. 골목 앞 여인숙 간판 너머로 큰 모텔 건물들도 보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

좋은 수필 2021.08.09

나와 구두의 관계/ 안도현

나와 구두의 관계/ 안도현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면 적어도 4, 5년은 신고 다닌다. 나한테 한 번 걸린 구두는 참으로 고생이 많다. 구두로서의 생을 마칠 때까지 처절하게 끌려다녀야 한다. 굽이 닳으면 수선가게에 가서 갈아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남들처럼 자주 구두약을 발라 윤이 나게 닦아주는 것도 아니다.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라면 죽자사자 신발로서 그저 묵묵히 고된 노역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구두한테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것은 나의 검소한 생활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는 구두를 애지중지 아껴가면서 신어본 적이 별로 없다. 내 구두는 늘 꾀죄죄하고 우중충하고 우글쭈글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는 구두는 미리 몸을 망칠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쉽게 ..

좋은 수필 2021.08.07

기대고 싶은 날/장미숙

기대고 싶은 날/장미숙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보는 사물이 어느 날 달라 보일 때가 있다. 그걸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책을 읽는 것에 다독, 정독, 속독이 있듯이 본다는 것에도 다시, 정시, 속시가 있는 것 같다. 빠르게 보고 지나쳐버리는 것도 있고, 많이 보지만 별로 잡히지 않는 게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장면이나 풍경도 있다. 시선이 꽂히면 주위 사물들은 흐릿해진다. 오직 보고자 하는 장면이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작정한 게 아닌 만큼, 마음이 흔들리거나 존재의 의미에 한껏 고양되기도 하나 보다. 오늘 식탁에서 밥을 먹다가 무심코 거실 벽 쪽에 놓아둔 화초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순간, 화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양이 이상했다. 화초의 중심..

좋은 수필 2021.08.05

줄탁동시 외 4편/최해숙

줄탁동시 외 4편 최 해 숙 아이 방 창문을 닫는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시원하다. 여름날 차디찬 우물물을 마신 것처럼 달다. 사람살이도 막힐 일 없이 이리 시원하고 달작지근하면 얼마나 좋을까. 방문을 닫고 나오려는데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입을 움직거리며 미간을 찡그린다. 꿈이라도 꾸는가. 꿈속에서 저를 힘들게 하는 존재는 이 어미가 아니어야 할 텐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초등학교 앞을 지나던 남편이 병아리를 사 왔다.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한 마음을 움직여야 할 병아리가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우리는 황토에 모래를 섞어 벽을 바른 집에서 살았는데, 손길이 자주 닿는 부분의 벽지가 찢어졌다. 방 안이 제 놀이터였던 병아리는 날마다 벽지가 찢어진 부분에 부리를 대..

좋은 수필 2021.08.03

무릇, 똥 / 문경희

무릇, 똥 / 문경희 길이 아니라 아예 똥밭이다. 대충만 쓸어 담아도 한 자루는 족히 되겠다. 이렇게 많은 똥을, 하필이면 길목을 따라 싸질러 놓다니. 매너 한 번 똥 같다. 춥다는 핑계로 한동안을 칩거하다 뒷산을 오르는 중이다. 걸음걸음 똥이 밟힌다. 서리태처럼 까맣고 단단한 똥. 똥. 똥. 간만의 산보에 황감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똥세례에 발밑이 조심스럽다. 임자 없는 똥은 없을지니, 겨울의 적막강산을 헤집고 어느 목숨 하나가 이 길 위에서 부단히 근심을 풀어解憂내었던가 보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족적으로 보건데, 밤만 되면 집 근처로 내려와 그악스럽게 어둠을 찢어발기던 고라니의 소행이 분명하다. 인도의 정치가 간디는 '독립보다 화장실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는데, 고라니들에게도 화장실 한 칸 마련해 ..

좋은 수필 2021.08.03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스님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 법정스님 이 가을 들어, 처음 절에 들어와 배우고 익힌 글들을 다시 들추고 있다. 그때는 깊은 뜻도 모르고 건성으로 외우면서 관념적인 이해에 그쳤었는데, 외떨어져 살면서 옛글을 다시 챙겨보니 크게 공감하게 된다. 글이나 사상은 그 저자의 정신연령에 이르러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생활환경이 비슷해야 더욱 공감할 수 있다. ​ 야운野雲스님의 '스스로 경책하는 글​ [自警文]'에 이런 시가 있다. 나물 뿌리와 나무 열매로 주린 배를 달래고 송락과 풀옷으로 이 몸을 가리며 들에 사는 학과 뜬 구름으로 벗을 삼아 깊은 산 골짜기에서 남은 세월 보내리. ​ 몸과 마음 선정에 들어 흔들리지 않고 오두막에 묵묵히 앉아 왕래를 끊는다. 적적하고 고요해서 아무 일 없으니 이..

좋은 수필 2021.08.02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 문태준

모든 것은 근경이 슬프다 / 문태준 얼굴이 푸석푸석하던, 누룩 띄운 독 같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 빛깔을 받는다. 매화와 산수유나무가 우선 그렇다. 불꽃을 받는다. 나는 지난 겨울 보고 들었다, 빈집의 마음을, 바람의 노래를, 얼음의 언어들을, 침묵의 세계를. 요즘 해금 같은 가늘은 소리가, 숨결이 나무에게서는 난다. 새순 한 촉을 땅 바깥으로 밀어내기 위해 나무는 얼마나 전전긍긍했을까? 참혹했을까? 새순 돋는 나무에게는 회오리가 있다. 새순 돋는 나무들을 보면 나에게 중대사는 무엇인가 묻게 된다. 등짝을 뚫고 나오는 시, 아래로 아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처음 만난 한 줄기 샘물 같은 그런 시를 받아낸 적이 있는지 묻게 된다. 봄이 오는 산길 들길을 걸으면 그래서 내 마음은 더더욱 오갈 데 없는, 춘설 분..

좋은 수필 2021.07.26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구멍 늧을 읽다 / 김원순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다람쥐, 청설모도 ..

좋은 수필 2021.07.23

참깨송(頌) / 이옥자

참깨송(頌) / 이옥자 한 알의 무게는 작은 새의 깃털과 같고, 크기는 모래알 다음 가나, 향미(香味)로는 따를 것이 없어 이 세상 으뜸이다. 부부의 정이 도탑거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면 '깨가 쏟아진다'하고, 배알이 뒤틀릴 때 상대방이 코 깨질 일이라도 생기면 '깨소금 맛'이라 함은 그 까닭이다. 고기 맛만 최고인가, 산 녘과 들녘에 지천인 나물을 뜯어 삶아 참기름 한 방울 치면 밥 한 그릇도 뚝딱, 그도 저도 마땅찮을 때는 맨 간장에라도 한 방울 둘러치면 그 맛도 괜찮다. 상찬에도 깨맛과 참기름 향이 빠지면 맨송맨송 하찬으로 등락하고, 하찬도 참기름 진향(珍香)이 돌면 상찬이 된다. 곡물이나, 기묘한 향미로 그 값은 천정이다. 금값이나 사향 값보다야 못하지만, 곡물로는 최상으로 매겨지니 물물교환에 고..

좋은 수필 2021.07.22

누나의 붓꽃/손광성

누나의 붓꽃 손광성 시집가기 싫다고 누나가 말했다. 시집은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싫다고 조그만 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먹기 싫은 밥은 먹어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는 못 사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의 어머니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래서 그날은 어머니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무슨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 위세에 눌려 어머니는 다시 평소처럼 조그만 헝겊인형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열 일곱 살 누나는 가망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열 살짜리 나는 너무나 작..

좋은 수필 2021.07.15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나의 멸치 존경법 / 손광성 가끔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멸치를 깐다. 멸치볶음을 좋아하다 보니 그리 된 것이다. 목마른 짐승 샘물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멸치를 까는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한 마리당 세 단계로 작업은 종료된다. 먼저 대가리를 딴 다음 엄지손톱으로 등을 가른다. 그 다음에 내장을 들어낸다. 그래야만 깔끔하게 끝난다. 내장이 뱃속에 들어 있다고 해서 그 부분을 뒤적거리다가는 낭패를 본다. 잘 갈라지지도 않지만 제일 맛있는 부분이 부스러지기 때문이다. 멸치를 까다 보면 잠시 마음이 짠할 때가 있다. 어느 한 놈도 내장이 까마헥 타지 않은 것이 없어서이다. 얼마나 속을 끓였으면 저지경이 되었을까 싶다. 짠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편안히 죽은 놈은 한 마리도 없다. 모두 뒤틀려 있다. 끓는 ..

좋은 수필 2021.07.15

냄새의 향수 / 손광성

냄새의 향수 / 손광성 냄새만큼 생생한 기억도 드물다. 약을 달이는 냄새는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고 쑥과 망초의 후텁지근한 냄새 속에는 타 들어가는 고향의 들판이 있다. 여치와 산딸기를 찾아 가시덤불을 헤치고, 게와 동자개와 그리고 모래무지 같은 것을 쫓아 질펀히 흐르는 강을 헤매었다. 물고기의 비린내와 온몸에 감겨 오던 저 미끈거리는 녹색말의 냄새. 놓쳐 버린 어린 날의 나의 강은​ 언제나 그런 냄새와 함께 꿈꾸듯 기억 속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아직도 돌아갈 수 없는 나의 고향. 유년의 꿈속에도 저 지겹도록 기나긴 신작로가 ​펼쳐져 있고, 몽롱한 의식 속으로 꽃가루처럼 날리던 벌떼의 웅웅거림. 그리고 7월의 폭양 아래 하얗게 피어 있던 찔레꽃의 진한 향기. 그 향기가 언제나 나를 멀미나게 한다. 갓 ..

좋은 수필 2021.07.15

비 오는 날의 산책 / 손광성

비 오는 날의 산책 / 손광성 비가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은 마음이 가라앉는다. 낮게 떠 있는 구름, 명주실처럼 부드러운 빗줄기, 그리고 나직한 빗소리,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빗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부풀어 있던 감정의 보풀들도 비에 젖어 차분히 가라앉는다. 화창한 날에 느끼던 그런 외로움 같은 것도 없다. 비는 창가에 와서 속삭이고, 마음은 귀를 열어 그 속삭임을 듣는다. 전에 아무도 그처럼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 없기에 온몸을 기울여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한 잔의 커피, 이따금 바람에 실려 오는 물보라의 찬 기운 속에 느끼는 커피의 따스한 온기와 그 진한 향기, 잠시 커피 잔 언저리에 어리는 우수의 그림자, 희미한 그림자와 함께 빗줄기 사이로 꼬리를 끌며 사라지는 긴 담배 연기의 ..

좋은 수필 2021.07.15

염장/박혜경

염장/박혜경 간잽이가 고등어의 대가리를 야물게 낚아챈다. 시퍼런 등짝이 금방이라도 철퍼덕 일어설 기세다.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패랭이 모자를 쓴 간잽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나는 간잽이의 손길이 닿자 긴 여행으로 단잠에 빠졌던 고등어가 눈알을 번뜩인다. 소매 끝에 불쑥 튀어나온 간잽이의 양손은 하얀 저고리 탓에 더욱 검붉은 빛깔을 띤다. 50여 년을 간잽이로 살아왔다니 아마 손끝에서도 하얀 소금꽃이 피어오를 듯하다. 소금꽃 속으로 그 옛날 아버지의 얼굴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안동에서도 한참 먼 두메산골에 살았다. 산골이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해산물을 구경한다는 건 할아버지 환갑잔치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임동면 챗거리 장터에 나가 마른..

좋은 수필 202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