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밤을 주우며 / 김만년

밤을 주우며 / 김만년 이맘때의 숲은 풍성하다. 열매들은 실팍하게 살이 오르고 다람쥐들은 겨울 양식을 모으느라 분주하다. 툭툭, 시간의 여백을 타고 알밤들이 떨어진다. 몇 알은 개울로 굴러가고 몇 알은 여뀌 풀 틈새로 숨는다. 나는 밤의 행방을 쫓아 풀섶으로 몸을 낮춘다. 반지르르 윤기 나는 놈은 금방 출타한 알밤이다. 어쩌다가 삼형제 밤이라도 만나면 횡재를 한 기분이다. 성급하게 떨어진 밤송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아직 설 여물었는지 밤은 두피를 바짝 밀착시키고 완강하게 버틴다. 밤송이가 손마디를 따끔따끔 찌른다. 가시를 세우는 폼이 둘째 녀석의 모습과 흡사하다. "여보 우리도 반려견이나 한 마리 키울까. 반려견은 꼬리치는 맛이라도 있잖아." 얼마 전 퇴근 무렵 아내가 나에게 불쑥 던진 말이다. 평소에..

좋은 수필 2021.09.16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조선 개똥이 / 이난호 ​ ​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어 자취를 감춘 단어 중에 '조선'이란 말이 있다. 어떤 단어 앞에 이 '조선'이란 말이 붙으면, 마냥 소박한 것, 가장 우리 것다운 것으로 쑥 다가왔고 얼마쯤은 진국이라는 다소 예스런 의미의 어떤 향수까지 묻혀와 단박 유년기 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었는데, 가령 '조선 참외' 하면 개구리참외나 작고 동글반반하고 샛노란 참외를, '조선무' 하면 짤막하고 통통하고 속이 단단해서 날것으로 먹기는 맵고 빡빡하지만 일단 김치류로 갈무리되면 긴 겨울을 나고도 다음해 한여름까지 생생하니 든든한 밑반찬으로 버텨주는 무를 일컬었던 것이다. 조선간장은 어떤가. 햇콩을 오래 삶아 빚어 띄운 메주로 역시 제 입맛에 간 맞춰 담근 재래식 장, 이곳에..

좋은 수필 2021.09.16

굴뚝새/강돈묵

굴뚝새/강돈묵 떨기나무의 키를 넘지 않는다. 바위의 옆구리를 스치듯 질주해도 허리쯤을 가로지른다. 아무리 날갯짓을 해도 그 이상 높이 나는 법이 없다. 이런 낮은 자세는 제어된 삶 탓인지, 스스로 겸손의 길로 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전생의 죄 때문인가. 이생의 허물이 너무 큰 탓인가. 언제나 고개 숙이고 땅만 바라보며 나댈 뿐이다. 그것도 대낮에 나대는 일은 거의 없고, 저녁 무렵 남들 다 귀가한 후에 골바람처럼 지나간다. 저녁연기 자욱한 부엌 궁둥이로 돌아간다. 늘 칙칙하고 음습한 곳만 찾아다닌다. 몸에 두른 옷가지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그을음 가득한 굴뚝에서 빠져나왔는지 몸빛이 어둡다. 작은 몸뚱이지만, 늘 꼬리를 추켜세우고 촐싹거리는 모습이 바라보는 눈까지 불안하게 한다. 금시 큰일이라도..

좋은 수필 2021.09.15

칠七의 생각 / 강돈묵

칠七의 생각 / 강돈묵 분명 이는 십진법 때문일 것이다. 어려서 배운 이 십진법은 지금까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십十이면 가득 찬다. 아니 가득 찬 것은 모두 십으로 보인다. 만족도 십이고, 기쁨도 십이고, 슬픔도 십이다. 백두산도 십이고, 남극도 십이고, 북극도 십이다. 보름달도 십이니, 삶도 십이다. 그래서 나는 아홉만 되어도 포만감이 밀려와 나머지 공간 하나에 애착을 갖게 된다. 이런 까닭에 칠七을 만나면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꽉 차는 것보다야 좀 여유가 있는 칠이 훨씬 멋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안타까움은 감출 수가 없다. 가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십진법을 배우지 않고, 십이진법이나 십사진법 정도를 익혀서 가슴에 ..

좋은 수필 2021.09.15

선/강돈묵

선 강 돈 묵 점들이 모여서 손을 잡으면 선이 된다. 그 점들이 하나의 통제 속에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모이면 직선이 되고, 자유분방하게 어깨동무하면 곡선이 된다. 그래서 직선은 경직되어있고, 곡선은 자유와 부드러움을 표방한다. 직선은 언제나 최대치를 요구한다. 직선은 일정한 수의 점들이 모여서 가장 길게 늘어설 수 있는 것을 바라고, 그 대열에서 이탈하면 질서에는 엄청난 파괴를 초래한다. 직선에 가담된 점들은 이토록 긴장된 안주를 위하여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된다. 곡선은 직선과는 전혀 다르다. 언제나 느긋한 마음이어서 경직이란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최소의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개성을 발휘한다. 언뜻 보기에는 질서라고는 없는 듯하면서도 선의 끝남이 없이 이어진다...

좋은 수필 2021.09.15

모음삼각도/강돈묵

모음삼각도 강 돈 묵 dmkang892@hanmail.net 한글사전을 들여다본다. 자음들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줄을 서 있다.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열 네 개의 자음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기본자이든, 가획자이든, 아니 이체자이든 다른 것의 자리를 넘보거나 탐하지 않는다. 그들이 꼼지락거리면서도 사전 속에서 자리한 모습은 개미의 질서처럼 신기하다. 한참을 훔쳐보던 나는 신기하게도 지켜야 하는 규율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나서는 놈을 발견한다. 맨 뒤에로 밀렸던 ㄲ, ㄸ, ㅃ, ㅆ, ㅉ 등이 본실 소생의 ㄱ, ㄷ, ㅂ, ㅅ, ㅈ의 곁으로 가서 서출을 숨기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빙긋이 웃는다.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모음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

좋은 수필 2021.09.15

이 빠진 자리/강돈묵

이 빠진 자리 강 돈 묵 사람마다 조금은 다르겠지만, 어린 시절 겪었던 일들 중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던 일은 역시 ‘이 빼기’일 것이다. 이를 뺀 기억은 커다란 바윗돌에 부딪쳤던 것만큼이나 큰 사건으로 내 기억의 한가운데에 남아 있다. 놀기에 바빴던 시절, 느닷없이 나타난 이의 흔들림은 예고 없는 한파처럼 차갑게 찾아왔다. 내가 처음 앞니가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걱정이 되어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별스럽지 않게 손으로 점검하고 마셨다. 그 후로 아버지는 물꼬를 보듯 가끔 내 이를 점검하셨는데, 그 모습은 마치 이 해 박는 김씨 아저씨 같았다. 그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표정 없이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러던 하루, 아버지는 봄을 맞아 가래로 봇도랑을 치듯 작업에 착수하셨다. 물론 형과 누나들도 ..

좋은 수필 2021.09.15

마당 쓸기/강돈묵

마당 쓸기 / 강돈묵 잠결에 맛본 텁텁한 공기는 서서히 몰려 나간다. 내 안에 자리한 안개들이 밀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의 긴 시간을 짙은 안개 속에 갇혀 헤매었다. 지저분한 꿈에 시달린 것이언제부터이던가. 오래되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구겨진 꿈은 내가 알아채면 아니되는 것이나 되듯 뿔뿔이 사라졌다. 조금 전에 꾼 꿈도 안개처럼 바람결에 흩어졌다. 마당에 내려서니 아침 공기가 달다. 마당을 쓰는 게 일상이 된 나는 싸리비를 든다. 하루를 열어가는 첫 행위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당은 지저분하다. 지난 시간의 앙금처럼 자국들이 널브러져 있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마당에는 온갖 발자국이 엉켜 있다. 큰 신의 흔적도 있고, 아주 조그마한 것도 함께 따라가고 있다. 분명..

좋은 수필 2021.09.15

재탕/정경자

재탕/정경자 황사가 심해서 손님이 없을 줄 알았다. 쇼윈도 너머 주차된 차들이 분첩을 두드린 것처럼 희뿌옇다. 꽁꽁 닫아둔 실내는 바깥 공기와 무관하게 맑고 싱싱하다. 두꺼운 유리문을 힘겹게 밀치고서 머리카락 희끗한, 칠십 줄은 족히 넘은 할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 가득 거머쥔 보따리들을 내려놓고 휜 등허리를 더디게 펴면서 가게 안을 쭉 훑어 보았다. 오래전 며느리를 맞이할 때 얌전하게 예단을 쌌을 법한 참꽃색 보자기는 곱디고운 색은 아득하게 바래지고 성질 뾰족한 오가피를 품어, 군데군데 올은 미어지고 가시가 뚫고 나왔다. 부직포 가방은 지난 가을에 거둔 인진쑥, 민들레, 엄나무 등을 꾹꾹 눌러 담아 아가리가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낱 밭두렁 잡초에 불과했던 푸성귀들은 할머니의 부지런한..

좋은 수필 2021.09.13

엎지르다/최지안

엎지르다 / 최지안 때때로 울음을 엎지르곤 했다. 바닥으로 쏟아진 눈물, 내 속에 깊은 우물이 있는지 한 번 올라온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언제 그 많은 울분이 가슴 바닥에 고여 있었을까. 눈자위 붉은 설움은 설탕물 흘린 자리처럼 끈적거렸다. 울음의 끝동은 두통약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엎질러진 감정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감정은 질척였다. 주체 못한 감정이 출렁이다 흘러넘쳤다. 가시 돋힌 언어들은 마시다 흘린 커피처럼 누렇게 남았다. 먹을 만큼 나이를 먹고서도 가끔 재발하곤 했는데 그때가 나의 임계점이었던 것 같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면 아득한 벼랑이었다. 흔적을 남기는 말. 엎지른다는 말의 성분은 물이 아닐까. 눈물처럼 그렁그렁하게. 물처럼 흐르고 죽처럼 걸쭉하게 출렁이는 ..

좋은 수필 2021.09.12

떠남에 대해 / 박월수

떠남에 대해 / 박월수 떠난다는 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지금껏 살던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고부터 주변 모든 것들이 애틋하다. 달비골을 비추는 달과 학산에 뜨는 해와 사문진 낙조가 새삼 눈물겹다. 월광공원을 거닐며 한나절을 보낸다. 자주 찾던 수밭골과의 이별이다 생각하니 막 넘긴 커피 맛이 쓰다. 꽃 사진을 찍곤 하던 수목원에서 나는 금세 그렁그렁한 눈빛이 된다. 열대 식물원 앞 벤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부겐벨리아를 영원히 못 볼 것처럼 오래 바라본다. 흔히 이사는 내게서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결정하게 한다고 한다. 집안을 둘러본다. 한때 발코니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거실 안에도 들여놓았던, 지금은 빈 게 더 많은 화분과 무거운 돌확들, 돌절구가 눈에 들어온다. 식물이 담긴..

좋은 수필 2021.09.10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습기 혹은 눈물 / 박월수 신혼시절, 내게는 말 잘 듣는 세탁기 '예예'가 있었다. 그전까지와는 달리 전자동으로 만들어져 동작단추만 눌러 놓으면 저 혼자 빨래를 했다. 하지만 거기엔 치명적이 결함이 있었다. 전원 단추가 포함된 계기판은 습기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세탁실이 따로 없는 탓에 세면장 습기를 뒤집어 쓴 '예예'는 차츰 말을 듣지 않더니 얼마 못가 중병이 들었다. 몸에도 물기가 차면 마음에 한기가 들고 나중엔 앓아눕게 된다는 걸 그 무렵 알게 되었다. 겉만 번듯하고 속은 허술한 이국풍의 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집을 한 번 보고 대번에 전세를 들었다. 마주 보이는 언덕에 유채꽃이 살가운 봄볕을 이고 푸지게 피어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날마다 봄날일 것 같았다. 나는 차이코프스키와..

좋은 수필 2021.09.10

손/강여울

손 강 여 울 선산에 아버님을 묻은 지 반년이 지났다. 살아 계실 적 못한 효도가 내내 맘에 걸리는 지 남편은 자주 산소를 찾아 손을 본다. 그저께도 산소에 다녀온 남편이 잔디도 파릇파릇 살아나고 주변에 진달래, 조팝꽃이 한창이라고 말했었다. 어제 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은 씻은 듯 공기가 맑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맨몸의 햇살을 집안으로 들였다. 화분들이 좋아 한다. 몇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던 군자란이 그동안의 내 손길이 미안했던지 무더기로 꽃을 피웠다. 겨울에도 꽃을 놓지 않던 제라늄은 꽃숭어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사랑초도 꽃대를 쑥쑥 밀어 올리는 중이다. 다른 화분들도 새롭게 저를 키우느라 분주하다. 작년에 너무 작아서 긁기가 힘든 더덕들을 껍질들과 함께 화분 속에 버렸었다. 그 위에 흙을 덮..

좋은 수필 2021.09.10

꽃/임병숙

꽃/임병숙 이름에 '달'이 들어간 꽃은 왠지 정겹다. 이름만 들어도 순박하고 아련한 그리움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달을 닮아 드러내지 않는 몸짓과 애잔함이 묻어 있는 듯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품고 있는 '달맞이꽃'과 '달개비'는 논둑에 지천으로 피었다. 노란색과 보라색으로 색깔은 달라도 어감도 비슷하고 달처럼 순정한 몸짓으로 마음을 끌어들인다. 얼굴조차 쉽게 내밀 수 없어서 에둘러 표현한 듯한 '달거리'도 정감이 가는 이름이다. 그 꽃은 달빛처럼 은밀하게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핀다. ​ 꽃이 떨어진다. 발갛게 멍울 진 얼굴을 붉히며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다. 사십여 년을 달을 거르지 않고 내 몸을 거쳐 갔으면서 아직도 부끄러워할 게 남은 모양이다. 한 장씩 떨어지다 이슬이 되어 물속으로 미끄러진..

좋은 수필 2021.09.09

화투/임병숙

화투/임병숙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햇살이 여과 없이 스며들었다. 두텁게 내려앉은 침묵 사이로 각질 같은 먼지가 빛살에 실려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다. 보호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는 바람이 지나간 듯 휑뎅그렁하다. 방 안에는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간이 어머니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숨 소리와 화투가 조심스럽게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중환자 대기실에 처음 들어가던 날 어머니는 몹시 낯설어했다. TV 소리와 한숨 섞인 낮은 말소리, 이따금 들리는 낮은 울음소리와 호흡을 힘겹게 하는 크레졸 냄새. 눈앞에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둔 환자들 때문인지 방안을 흐르는 공기마저 무거웠다. 전등과 TV를 끈 밤이면 심해의 침묵 같은 어둠이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어머니는 이방인처럼 그 속에 섞이지 못하고,..

좋은 수필 2021.09.09

굳은살/임병숙

굳은살 임병숙 아버지의 발바닥은 평생 칠순 노인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질곡의 세월이 더께처럼 쌓여서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피부라기보다는 갑각류의 그것 같다. 발바닥만 감싼 굳은살은 여느 피부처럼 촉촉하거나 매끄럽지도 않고 푸석 푸석한 게 아무런 반응도 없어 보인다. 척박하기만 하다. 멈춰선 시계바늘처럼 늘 그 자리에 정지된 모습이다. 만져보면 메마른 바람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런 마비증상으로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 MRI 사진을 찍어보니 뇌 속의 혈액이 하얗게 고여 있는 게 보였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탁해지면서 무언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몸속을 흐르는 혈액도 마찬가지다. 적은 양이지만 혈액이 고여 있어서인지 아버지의 오른쪽 팔다리가 ..

좋은 수필 2021.09.09

그을음/임병숙

그을음 임병숙 흙투성이 옷을 입은 채 마루에 누운다. 집안에 배어 있는 오래된 냄새에 섞여 부드러운 촉감이 등줄기로 스며든다. 마당은 후끈 달아오른 햇살이 넘실대고 마루 위는 시원한 바람이 앉아 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하는 듯하다. 마루는 가슴을 열어 놓고 주말에만 오는 발길을 기다린 듯, 들에서 일하느라 늘어진 몸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천장에는 서까래가 투박한 몸짓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에 지은 친정 집은 반백 년이 훨씬 지났다. 서까래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지문이 그을음 속에 묻혔다. 하얗게 칠했던 회벽도 시간의 더께가 묻어서 검게 변했다. 처마 밑, 기둥, 창호지를 바른 문살, 집안 곳곳에 그을음이 진득하게 앉아 있다..

좋은 수필 2021.09.09

열무김치를 담근 날 / 박금아

열무김치를 담근 날 / 박금아 저녁을 들던 친정어머니가 열무김치를 찾으셨다. 다음 날 아침, 슈퍼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열무 두 단과 얼갈이배추 한 단을 사 들고 왔다. 어머니는 칼과 도마, 양재기와 김치통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도 담그시려고요?” 꽃무늬 앞치마를 입혀 드렸다. 머릿수건도 찾기에 씌워 드렸더니 거울 앞에서 한참을 매만지셨다. 그사이 나는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다듬어 양재기에 담았다. 한데 섞어 소금을 뿌리려고 할 때였다. 어머니가 놀란 듯 달려와 소금 쥔 내 손을 잡았다. 열무김치는 열무만 따로 담가야 맛있다며 얼갈이배추를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담았다. 마늘과 생강, 붉은 고추, 풋고추, 쪽파, 양파도 따로따로 갈라놓았다.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여 간조롱이 줄을 세우는 모습이 얌..

좋은 수필 2021.09.09

느린 동행 / 조현미

느린 동행 / 조현미 내겐 아주 오랜 벗이 하나 있습니다. 사는 일이 버겁거나 외따로 선 나무처럼 쓸쓸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입니다. 잡념이 너무 웃자라 부려놓을 곳이 필요할 때도 그 친구를 찾아갑니다. 마치 피접하듯 말입니다. 최상의 위로는 가만히 들어주는 게 아닐는지요. 일찍이 나의 외로움을 읽은 그는 그저 묵묵히 들어줄 뿐입니다. 등을 쓰다듬거나 찬 이마랑 뺨을 어루만지며 살며시 안아줄 뿐입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어쩌면 그것이 그이만의 '사랑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은 친구를 만났습니다. 한때, 사랑보다 우정을 앞세운 날도 있었고요. 서로를 지란芝蘭에 견주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청할 수 있는, 김치 냄새가 나더라도 흉보지 않..

좋은 수필 2021.09.09

나침반/김순애

나침반 김순애 여행 가방에서 나온 꾸러미가 제법 묵직해 보였다. 얼마나 정성 들여 포장을 했을까. 겹겹이 싸인 비닐을 풀고 포장지를 벗기는 남편의 손놀림이 조심스럽다. 상기된 낯빛이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와 같다. 나침반이었다. 하나같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것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무와 구리로 만들어진, 갈색 빛이 도는 크고 작은 나침반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모양, 거북이 모양, 북극성이 박힌 것, 해시계가 달린 것, 심지어 그 하나에 백 년의 달력이 새겨진 것도 있었다. 저것들을 구하려고 얼마나 거리를 누비고 다녔을까. 이국땅 낯선 골목을 떠도는 남편의 형상이 나침반 바늘과 겹쳐졌다. 남편은 4년째 인도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처음 인도 발령이 났을 때 그는 많이 망설였다...

좋은 수필 202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