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돌담, 쉼표를 찍다 / 허정진 ‘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마시게’* 집과 집으로 이어진 돌담이다. 담장 너머 안주인의 생이 조각보처럼 바느질된 것 같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완벽한 퍼즐처럼 삶의 편린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진 것 같다. 채마밭처럼 푸른 이끼로 덮인 돌담들이 세월의 눈가에 주름진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돌담 위로 호박넝쿨이 느릿하게 타고 오른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그들의 언덕이고 기둥이었던 것처럼 오래된 생을 끌어안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길이 탈출구를 찾아가는 미로 같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순간 나를 잃고 자리에 멈춰 선다. 귀를 기울이고 코를 벌렁거려본다. 뭔가 알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방향과 표식보다 자기에게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쫓..

좋은 수필 2021.10.13

궤적(軌跡) /윤남석

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좋은 수필 2021.10.11

헌책방을 읽다/김이랑

헌책방을 읽다 김이랑(김동수) 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을 보태 법서를 사던 시절부터 허기를 채워준 곳인데, 허전한 걸음으로 나는 다른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헌책방의 질서는 뒤죽박죽이다. 정해진 자리는 형식일 뿐 계급이나 서열이 없다. 펄벅의 대지 위에 한국의 야생화가 피고 백과사전에 눌린 시집이 숨을 못 쉬겠다고 엄살을 떠는가 하면, 돈키호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창을 겨누며 어서 칼을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큰스님의 어깨에 발을 척 걸친 동화를 보며 명랑만화가 깔깔거리고 명심보감이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앉아있다. 법전을 깔고 앉은 사형수의 참회록과 명작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좋은 수필 2021.10.09

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어머니의 기억/ 박종희 계절은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돌아온다. 매화꽃이 세상을 물들일 때면 하얀 기억 속을 걷던 어머님 생각이 난다. 기억은 잊었어도 몸짓말로 나를 반기던 어머님이 올해도 어김없이 봄을 데리고 왔다. 빼꼼히 열린 병실 문 사이로 나를 발견하고는 쑥스러운 듯 당신 코를 잡아당긴다. 기다렸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어머님만의 몸짓이다. 어머님 눈에 낯익은 눈부처가 들어앉는가 싶더니 이내 잇몸을 다 드러내며 까르르 웃는다. 병실에서 무에 그리 웃을 일이 있을까만 며느리를 웃게 하려는 어머님의 배려일 성싶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꼿꼿하던 어머님이 큰아들을 앞세우고 나서는 맥없이 들어앉았다. 불덩이 같은 오 남매를 품어 키우느라 당신 몸이 녹아내리는 것도 모르고 살았던 어머님한테 아주 특..

좋은 수필 2021.10.08

소처럼 느린 당숙/김용택

소처럼 느린 당숙 김용택 여름엔 점심밥을 먹으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강가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든다. 누가 오라고 하지도 않고 누가 부르지도 않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네 사람들은 모두 밥숟갈을 놓기가 바쁘게 정자나무 아래로 끄덕끄덕 더위와 힘든 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드는 것이다. 진메 마을 정자나무는 툭 터진 강가에 있기 때문에 그 그늘 아래 들면 아무리 더운 여름날에도 선풍기 아래 앉아 있는 것보다 몇백 배 시원하다. 그렇게 정자나무 아래 앉아 잠자거나 쉴 때 이따금씩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칠 때가 있다. 비는 꼭 우골이라는 골짜기에서 묻어오게 마련인데 누군가 “우골에 비 묻었네” 하면 사람들은 하나둘씩 잠에서 부스스 깨어 잠을 쫓으며 저 비가 참말로 여그까장 소낙비로 올랑가 안 올..

좋은 수필 2021.10.06

신기료 / 신성애

신기료 / 신성애 삼 층 요리 학원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감영공원 한 귀퉁이 도장 가게 처마 밑에 풍경처럼 신기료장수가 있다. 오늘도 담벼락을 등지고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노인이 돋보기안경 너머 아스팔트 길을 내려다본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땅을 울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신발의 상태를 가늠하는 모습이다. 널빤지에 ‘신발 닥음, 신발 수선’ 이라고 엉성하게 쓰인 글씨에는 고삐를 놓아 버린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오전에는 햇살이 들이 비춰 적나라한 모양이 어설퍼 보여도, 그늘이 반쯤 내려오면 제법 오래 된 가게 티가 난다. 사람도 공구도 반지르르 세월이 묻어나는 짙은 갈색이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곳이 십 리라도 되는 양, 나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새로 신발을 끌며 갔다. 멀리서 볼 때는 ..

좋은 수필 2021.10.06

미용실 소묘/신성애

미용실 소묘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지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 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잘 갈아진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바짝 말라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 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키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 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버려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좋은 수필 2021.10.06

발/최장순

발 최 장 순 jschoi0426@hanmail.net “발목 잡힌 정부, 야당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뉴스가 발목을 잡는다. 소파에 앉아 무심히 발을 내려다본다. 지금 나의 걸음을 막은 것은 나의 발목, 그렇다면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누구인가. 맨발이 멀뚱멀뚱 올려다본다. “고생이 많다” 굽은 발가락이 대답이라도 하듯 꼼지락거린다. 왜 나는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 발에는 무심했을까. 나를 온전히 받쳐준 든든한 바닥. 발은 주춧돌이다. 몸의 끝자락에서 나를 지탱해준다. 수많은 뼈와 관절, 근육과 인대, 혈관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구조다. 발바닥에는 인체의 각 기관과 상응하는 반사구가 밀집되어있다. 이곳에 자극을 주면 피돌기가 좋아지고 통증이 가라앉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사람들이 발마사지를 즐기는 이..

좋은 수필 2021.10.05

거미/ 배종필

거미/ 배종필 아무리 봐도 그는 신이 내린 건축가임에는 틀림없다. 덫이라 하기엔 짜임새와 균형, 간격이 한치의 빈틈도 없어 적어도 먹잇감이 걸리기 전까진 아름답고 섬세한 고품격의 구조물이다. 눅눅한 이불을 널려 베란다 방충망을 열어놓은 사이, 거미가 들어와 베란다 들창과 회벽을 축으로 그물을 짰나 보다. 그물의 얼개가 되는 발판실과 세로실은 거미 뱃속의 점액이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굳어진 거미줄로, 거미의 이동을 위한 통로이면서 그물의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사냥의 비결은 가로실에 있다. 가로실은 공기와 접촉을 해도 끈적끈적한 끈끈이로 남아 걸려든 곤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물살처럼 퍼져나간 동심원의 한가운데 블랙홀에 거미는 낮게 엎드려 이 가로실의 미동을 감지한다. 어린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

좋은 수필 2021.10.05

부사와 인사/김애란

부사와 인사/김애란 나는 부사를 쓴다. 한 문장 안에 하나만 쓸 때도 있고, 두 개 이상 넣을 때도 있다. 물론 전혀 쓰지 않기도 한다. 나는 부사를 쓰고, 부사를 쓰면서, ‘부사를 쓰지 말아야 할 텐데’하고 생각한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부사는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버려지는 단어다.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나는 부사가 늘 걸린다. 부사가 낭비된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문장을 고쳐 읽게 된다. 한 번은 문장 그대로, 또 한 번은 부사를 없애고. 그러곤 언제나 나중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문장에 부사가 있었다는 걸 부사가 없는 자리를 보며 기억한다...

좋은 수필 2021.10.04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아득한 옛날, 인간들은 에우그놋이라 이름하는 작은 토룡 한 마리씩을 제각각의 우리 안에 가둬두고 살았다. 몸길이 7~8센티 몸무게 50그램 안팎의 이 원시적 생명체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갇혀 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물기로 연명했다. 눈도 코도 없었고 아가미나 지느러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캄브리아 환형동물의 변종이거나 고생대 말쯤에 출현한 초기 파충류의 조상일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였다. 축축한 피부와 두루뭉술한 정수리, 미련한 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것들이 과연 이무기나 자라 같은 생물과 계통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주장은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신화학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동굴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하반신이 결박된 ..

좋은 수필 2021.10.04

복국/허은규

복국/허은규 복국 식당 앞에서는 가끔 복卜집, 점집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용한 점집의 무당처럼 식당 안에 돗자리를 깐 복어가 사람들의 막히고 엉킨 속을 상담하고 있다. 신 내린 무당인양 제 살점을 휘휘 풀어 국탕 속에서 한바탕 살풀이굿을 하고 있다. 복국집 간판에 그려진 은밀복의 웃고 있는 표정이 문득 애기보살의 볼때기 같다는 문과적인 상상이 스친다. '복어 맑은탕'을 '복지리' 또는 '복국'이라고 부른다. 복어로 만든 요리를 대하면 누구나 한 움큼의 긴장이 어리기 마련이다. 성냥개비 머리만한 미량에도 사람이 절명할 수도 있다는 풍문이 자꾸만 의식될 수밖에 없지만 이 야릇한 긴장이 도리어 맛을 깊게 각인시킨다. 국물 한 숟갈에도 온 미뢰를 집중하여 맛을 감별하게 만드는, 오묘한 집중을 낳는다. 특유..

좋은 수필 2021.10.03

덤/이재은

덤/ 이재은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 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 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저, 맛없으면 공짜 소..

좋은 수필 2021.10.03

간 맞추기 /최희명

간 맞추기 /최희명 나긋나긋해진 노란 배추속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다. 붉은 양념으로 침범하기가 저어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뻣뻣하게 구는 게 싫어져서 올해는 조금 오래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얌전히 숨죽인 채 물기가 빠지고 있는 채반에서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과 함께 간을 본다. 나긋함 속에 고집을 드러낸 짠 맛이 혀를 제압한다. 나는 배추에 간을 맞췄는데 배추는 나긋한 몸으로 내 눈을 맞추었고 짠맛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강요하듯 맞춘 간은 그저 짜거나 싱거울 뿐 진정한 의미의 간은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첫걸음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이가 그렇다. 최선의 선택이라 우기며 강요하거나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개입한 ..

좋은 수필 2021.10.03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정희승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정희승 회사일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장기체류하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변두리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퍽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그때만큼 가족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불 꺼진 썰렁한 방이었다. 괴괴한 어둠 속에 꼭 닫혀 있는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왜 그렇게 낯설고 외롭게 느껴졌는지. 시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바동거리다 온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져버리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마다 가정이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늘 용서해주고 ..

좋은 수필 2021.10.03

벽, 너를 더듬다/허효남

벽, 너를 더듬다 허 효 남 벽을 본다. 벽, 너는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있다. 더는 나아갈 곳 없는 절해고도의 끝점에서 안간힘으로 무한대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듯하다. 척박한 지평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조차 부딪혀서 흩어지고 마는 몸체를 우두커니 지탱하고 있는 벽, 온종일 정물에 불과한 너의 잿빛 등뼈 사이로 오도독거리며 언어들이 막 깨어난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공으로 산화될 무연한 것들을 주워 담으며 도리어 너는 발설할 것들을 제 안으로 찬찬히 되 넣고 있다. 너의 곁을 떠다니는 먼지와 역습하는 기류, 눅눅한 습기와 싸한 감정의 동요마저도 너에게는 언어의 씨앗이 된다. 면적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담으며 안으로 발화하는 법을 너는 익히는..

좋은 수필 2021.10.02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론(論) / 최미지(본명 고경숙) 바닥은 한 번도 무엇을 밟고 일어선 적이 없다. 태곳적부터 오체투지의 자세로 모든 존재의 무게를 떠받들고 산다. 퇴화된 눈으로 세상을 보나 말하지 못하는 입을 가졌고, 우격다짐으로 삼킨 눈물은 귓바퀴를 두드리다 돌아나간다. 날선 울음으로 온몸을 곧추세우고, 묵상에 잠긴 밤하늘의 독백을 듣는다. 농밀한 어둠은 본능적으로 감지할 뿐 함부로 건드렸다간 절벽 아래로 처박히는 수가 있다. 조심하라. 붉은 심장의 박동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지렁이 한 마리가 땅속 집을 빠져나와 용케 차도로 기어오른다. 화물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헐떡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한나절 땡볕에 달궈진 지열이 화끈거리는지 길을 움츠렸다 폈다, 배밀이하듯 끌고 간다..

좋은 수필 2021.10.02

클로즈업 / 최장순

클로즈업 / 최장순 소란스럽다. 붕붕거리는 유혹, 어느새 손은 열고, 초단위로 대화가 달린다. 사진이 속속 뜬다. 좋아요, 멋져요, 아니 이런, 내가 왜 이러죠? 시끄럽다. 일정과 사건과 장면이 고스란히 뜬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시시콜콜한 단체카톡방. 참을성이 없다. 어디든 재빨리, 쉽게 날아가는 영상들.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전송되는 사진들은 대기권 어딘가에 하나의 층을 이룰 것이다. 맘에 들면 다행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드러났을 때 당사자는 불쾌하다. '난 당신에게 끌렸거든', 단 한 사람을 클로즈업한 사진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였음에도 '끌리게' 했다는 객체를 핑계 삼아 접근한다. 오래지 않아 고지서처럼 다시 날아든다. 드러내고 싶지 않다. 주름이나 잡티 같은 것들. 할리우드의 연륜 ..

좋은 수필 2021.10.01

다리/김미향

다리 김미향 아릿한 통증이 인다. 키 큰 나무 아래서 또다시 멈춰 선다. 무릎 속의 반란으로 주저앉은 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몸의 무게가 화근이었을까. 오십여 년 동안 나를 지탱해 준 다부진 다리, 절름거리는 걸음이 어색하여 잠시 몸을 벤치에 내맡긴다. 머리만 늙나보다 했던 생각은 망각이었을까. 나이는 비켜 가는 곳 없이 온 몸 구석구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건망증이 일고 육신이 피로해질 무렵 뜻하지 않은 무릎이 나를 붙들어 매고 만다. 이태 전, 어머니는 성치 않은 무릎에 결국 칼을 대셨다. 견디고 견디다 더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팔순 노모의 발목을 잡았다.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믿었던 젊음의 단단한 뼈도 세월에 바람이 들고, 물컹하던 연골도 말라갔다. 치미는 아픔도 숨기고 살아왔던 어머니, 돌아보..

좋은 수필 2021.09.30

가마솥/정현숙

가마솥 - 정현숙 - 나이가 들수록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처럼 금방 지은 밥인데 윤기가 없다. 어려서 먹던 싸래기로 지은 것도 아닌데 현란한 세상에 고급스러워진 혀끝이 변덕을 부리는가. 맛을 잃어 버린 슬픔을 알아 버렸을 때 오는 허기, "식욕은 성욕이요, 성욕은 성취욕이라. 식욕이 없어지는 것은 살맛을 잃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이 떠오른다. 선생님을 뵙기 위해 서울 외곽에서 흙과 남은 인생 보내시는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대쪽같은 성품이 묻어나는 집안 구석구석은 서재에 고서를 꽂아 놓은듯 정갈히도 삶의 흔적들이 꽂혀있다. 모처럼의 시골정경을 가슴에 한컷 담아두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헛간 가장자리에 천년의 한(恨)을 머금고 녹이 슬어 있는 무쇠가마솥이 눈에 스친다. 귀퉁이가 뭉게져 떨..

좋은 수필 2021.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