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걸레/박시윤

걸레 박시윤 봄같이 따스한 날이다. 꽁꽁 얼었던 수도가 녹고 잔뜩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켠다.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방문을 열어젖히신다. 모처럼 맞는 휴일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나 대청소를 하자는 말씀에 못 이기는 척 걸레부터 집어 든다. 손부인 내게 걸레가 쥐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걸레를 물에 텀벙 던져 넣는다. 비틀린 채 바싹 건조된 걸레는 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움츠린 몸을 푼다. 푸른 추억을 더듬기라도 하듯 원래의 제 모습으로 풀어지는 걸레다. 뽀얀 빛깔과 가녀린 고름이 제법 앙증맞다. 쳐다보는 내내 물처럼 맑은 미소가 걸레 위로 떨어진다. 하늘하늘 잘도 풀어져 느낌마저 보드랍다. 욕조 속에서 여린 몸을 드러내고서 첨벙첨벙 조심스레 물길 질을 하는 아이의 모습 같다. 잔잔한 미소가 얼굴에 번질 즈..

좋은 수필 2021.12.05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글쟁이들 대장간/이문자 풀무질에 쇳덩이가 익어간다. 벌겋게 달궈진 쇠가 모루에 놓이자 드디어 시작되는 메질.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리드미컬한 연주다. 앞 메 옆 메가 번갈아 치고 때리면 엿가락처럼 휘었다가 늘어난다. 대장장이가 집게로 잡아주는 방향에 따라 대충 매무새가 잡히다가 불 속에 들고 나기를 수십 차례. 두드리고 펴고 다듬기는 또 몇 번이던가. 찬물 담금질을 수없이 거쳐야만 온전한 모습으로 탈바꿈 한다. 시우쇠 한 도막이 명품 연장으로 탄생되는 순간이 감격스럽지 않은가. 글 대장간이 차려졌다. 글쟁이들이 차린 온라인 대장간이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단숨에 좌정하는 장인들! 이레 만에 지척에서, 수천수만 리에서 눈결에 달려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야말로 인간의 IT 두뇌는 찬사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좋은 수필 2021.12.04

귀명창 / 정연원

귀명창/정연원 소리에는 귀명창이 있다. 귀명창에는 추임새가 날고 있다.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그곳에서 귀명창을 만났다. 부채를 쥔 소리꾼과 북과 북채를 쥔 고수(鼓手) 뿐인 단촐한 무대다. 고수가 엇! 기합 소리를 내며 북채로 타당 탁, 북을 치자, 소리꾼이 춘향가의 쑥대머리 대목을 시작한다. '그때 춘향이는 옥중에서 머리를 풀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인 아니리를 한다. 다시 고수가 엇! 타당 탁, 북을 치면 소리꾼은 '쑥대머리~' 하며 본격적인 창으로 들어간다. 고수는 시작이나 변화, 음절마다 박을 치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등 추임세로 소리꾼의 목을 풀고 흥을 불러낸다. 소리꾼의 창과 고수의 추임새에 몸짓의 발림이 어우러지면 조용하던 관중석이 소란해진다. 판소리를 들을 줄 아는 관중이..

좋은 수필 2021.12.02

풍로초 2 / 정성화

풍로초 2 / 정성화 동생이 전화를 했다. 엄마가 요즘 말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매일 챙겨 보던 TV 드라마도 재미없다고 하며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본다고 했다. 폐질환으로 심년 넘게 입 · 퇴원을 반복했으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옷을 사드리고, 신나는 노래 테이프를 틀어드려도 엄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감정이란 걸 죄다 내다버린 것 같기도 했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사는 게 귀찮다고 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달달한 믹스커피를 한 잔 타 드렸더니, 몸에 좋지 않은 걸 권한다며 타박하셨다. 아주 심각한 상태는 아닌 듯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도 엄마는 좁은 마당 한 편에 분꽃과 채송화를 심었고 종종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곤 했다...

좋은 수필 2021.11.28

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곽재구

바다로 가는 따뜻한 바람처럼 곽재구 오후 4시 나는 한라산의 제2횡단도로를 건넜다. 갈대밭에 떨어지는 햇살들이 보기 좋았다. 공항에서 렌터카 회사 직원은 내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 그의 웃음 끝이 맑았으므로 나는 끝까지 그의 말을 따랐다. 과속하지 말 것, 섬 안의 모든 도로에 감시 카메라가 있어 육지로 돌아 간 뒤 한두장의 속도위반 스티커를 받는 것은 기본이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첫 번째 그의 부탁은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3개월전에 그의 말에 상응하는 전과를 제주에서 경험한 적이 있었다. 두 번 째 당부는 그가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차 열쇠를 건네주며 그가 내게 오늘밤 어디서 묵을 것이냐고 물었고, 내가 서귀포라고 대답하자 그의 웃음 끝이 한층 싱싱해지더니 아침에 서귀..

좋은 수필 2021.11.28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이웃집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릴 하시지 않는 분인데 단단히 벼르고 오신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도 적잖이 놀랐다. 시골살이를 하러 오기 전부터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마음 준비를 많이 했었다. 이사 와서는 집집이 떡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가져다 드렸다. 어르신을 뵈면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인사성 바르다고 좋아들 하셨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받게 되었다. 청송으로 귀농을 결정하고 암수 강아지 한 쌍을 분양받았다. 오래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청이와 송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중 송이는 잘 생긴 수컷이다. 송이가 어느새 자라 어엿한 총각이 되었다. 애교라..

좋은 수필 2021.11.28

수염 / 주인석

수염 / 주인석 씨 없는 싹이며 거꾸로 자라는 줄기다. 여느 생물과는 달리 굴광성이 작용하지 않는다. 씨앗이 없어도 멸종하지 않는다. 아무리 오래 길러도 꽃이 피거나 열매 맺지 않는 줄기다. 필요성은 없으나 세대를 이어 유전되어 내려오고 퇴화되지도 않는다. 성숙한 남자의 뺨이나 턱에 자리를 잡고 남성만의 관능미를 자랑하고 액세서리 역할까지 한다. 오후보다 오전에 더 잘 자라며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을 먹고 산다. 몸에 있는 털 중에서 가장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수염이 아닐까. 눈썹이나 코털, 머리카락은 이물질이나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사명을 다한다. 이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한꺼번에 잘리거나 밀려 나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수염은 아침마다 한꺼번에 쓸려 나간다. 남성 상징 액세서리..

좋은 수필 2021.11.28

고사목의 변(辯) / 이은희

고사목의 변(辯) / 이은희 고사목이 눈에 든다. 금방이라도 연둣빛 신록에 묻혀 나무줄기 여기저기에서 푸른 잎이 돋아날 것만 같다. 구병산 팔백여미터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만난 허옇게 말라버린 소나무. 꽃 빛바랜 화석 같다. 몸체가 굵고 하얘서 유난히 도드라진다. 시선은 나무의 줄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지만, 신록에 가려 우듬지가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니 뜬금없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낱말이 뇌리를 스친다. 혹여 이 나무가 바로 '고독의 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른다. 고독도 깊으면 병이 되고, 관계 또한 과하면 탈이 나지 않던가. 저 많은 나무 중에 누구와도 소통이 어려워 지쳐버린 나무인가. 주변의 수종을 살펴보니 대부분 활엽수종이다. 참나무와 아기단풍, 산진달래 등속이다..

좋은 수필 2021.11.28

씨, 내포하다/문경희

씨, 내포하다 / 문경희 씨 마늘이 발을 내렸다. 파종 전에 하룻밤 침지를 했더니 밑둥치에 하얀 실밥 같은 뿌리를 내민 것이다. 왕성한 생명의 피돌기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뿌리가 정靜이라면 발은 동動이다. 끝내 한 자리만 파고드는 것이 뿌리의 속성이라면, 끊임없이 앉은자리를 박차게 만드는 도구가 발인 까닭이다. 부지런히 걷고 뛰어야만 겨울이라는 냉혹한 계절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다는 다그침 같은 것일까. 사람들은 마늘에 뿌리가 아닌 발을 달아주기로 했는가 보다. 나도 그들을 흉내 내며 마늘이 내민 뿌리를 발이라 읽는 중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발이 난 마늘을 꾹꾹 눌러 심는다. 얼었다 녹았다, 비록 월동의 가풀막이 험난하다하여도 발의 투지가 저리 다부지니 옹골찬 봄을 의심할 수는 없겠다..

좋은 수필 2021.11.28

후식 같은 하루/남태희

후식 같은 하루 / 남태희 ​ ​ 직장인에게 일요일은 달콤한 후식 같다. 한 주에 닷새 근무하는 사람이야 덜하지만 일요일 하루 쉬는 사람에게는 아껴 먹는 디저트처럼 감질난다. 밀린 잠도 자야하고 미룬 집안일도 해야 한다.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여 못다 한 인사들도 챙겨야 한다. 일요일 내내 평일 못지않게 나름 종종댄다. 눈을 뜨니 아침 아홉 시다. 이불 속에서 좀 더 꼼지락거리며 휴일의 평화를 즐길까 하다 벌떡 일어난다. 커다란 머그잔 가득 커피를 타고 티브이 리모컨을 무의식적으로 켰다가 끈다. 한구석에 쌓아 올려진 책과 우편물을 정리해야겠다는 강박에 마음이 바쁘다. 읽은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답을 줘야하는 책을 분리한다. 봉투에 적힌 신상은 검은 매직으로 지워버린다. 몇몇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나의 ..

좋은 수필 2021.11.25

기다리는 나무/조현숙

기다리는 나무 조현숙 소낙비 연주에 고요하던 숲이 수런거린다. 빗방울이 푸른 느낌표를 찍을 때마다 한 뼘씩 나무들은 자라고 시나브로 가을도 깊어진다. 하늘과 땅이, 음악소리조차 깊숙이 가라앉은 날, 비 내리는 날은 기다림의 색도 짙푸르다. 비 그친 뒤 고요한 적막이 나무의자에 길게 앉아 있다. 비 탓인지 밤나무는 오늘따라 더 쓸쓸해 보인다. 등에 커다란 옹이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나이가 많은 나무다. 중심을 곧추 세울 기력조차 없는 걸까. 이웃한 언덕바지를 짚고 선 것이 영락없이 지팡이를 쥔 노인의 모습이다. 언제부턴가 낡은 의자처럼 허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산후 후유증 탓이거니 했는데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 생(生의) 가을에 이르렀음에도 용수철처럼 팽팽하리라 믿고 몸을 혹..

좋은 수필 2021.11.19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나선형의 등 / 조옥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 비개..

좋은 수필 2021.11.19

먼 길 /박금아

먼 길 / 박금아 차는 가파른 황톳길을 돌아 북녘을 향해 달린다. 시고모님과 함께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우리는 외투 차림으로 앉아서 가는데 고모님만 내가 골라 드린 삼베옷 한 벌 입고 누워서 간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이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가. 차에 앉은 사람들은 오감이 정지된 듯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누구 한 사람 차 앞을 가로지르는 이 없고,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지도 않는다. 풀어헤친 몸으로 누웠던 땅도 일어나 옷깃을 여민다. 생을 다하고서도 이루지 못한 귀향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고모님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이승을 떠나던 날까지 타향에서 살았다. 열아홉에 결혼하여 시집에 들어가 살다가 친정 나들이를 갔던 길에 전쟁을 만났고,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금방이면 돌아갈 ..

좋은 수필 2021.11.18

미용실 소묘 / 신성애

미용실 소묘 / 신성애 “죽일까요? 살릴까요?” 나는 날이 선 금속의 차가움을 손끝으로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순간 어깨를 움찔거린다. “죽여주세요.” 소파에서 책을 뒤적이던 여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남자는 살려달라고 하고, 여자는 죽여 달란다. 이 순간 나는 냉철한 집행관이 되어야한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빈틈없게 일을 처리해야한다. 잘 갈린 기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바짝 말라 있는 머리카락에 촉촉이 물을 뿌려야한다. 미세하게 숨 쉬는 머리카락의 아우성은 귀가 먹은 사람처럼 못들은 척 완전히 무시해 버려야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일 곳과 살릴 곳을 정확히 찾아내어 사람의 지붕 하나를 꾸미는 일이다. 처음 지붕을 올릴 때는 비..

좋은 수필 2021.11.16

삭발 / 신성애

삭발 / 신성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따라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모습의 그녀가 성큼 들어서고 있다. 말없이 털썩 의자에 앉는 그녀의 뒷모습이 잎새 떨구어낸 겨울나무같이 썰렁하다. “살 빠졌어요? 날씬해진 것 같아요” “십 오 킬로그램이 빠졌어” “그래요, 참 좋으시겠어요” “나, 빡빡 밀어줘요”” “정말, 결혼식은요?" "상관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을 듣고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다잡았다. 바리캉을 집어 들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잡았다. 무성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발 디딜 틈 없는 뻣뻣한 억새풀 밭 같다. 부처님을 집에 모시고 있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무남독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라난 머..

좋은 수필 2021.11.16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11월에 머물고 싶다 / 서성남 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 같기도, 겨울 같기도 한 그 모호함이 좋다. 책장을 넘기듯 분명하게 가르지 않고 다 어우르는 넓은 마음 같아서다. 떨어지는 나뭇잎, 두 장 남은 달력,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옅은 햇살들이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면서도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위안을 주어서 좋다. 곰곰이 생각하면 11월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어릴 적 11월은 풍성한 달이었다. 시골에서는 벼를 베면 그 자리에 길게 줄가리를 쳤다. 그러고는 보리파종을 끝내고 콩이며 고구마를 수확하여 저장을 다 마친 뒤에야 벼 타작을 했다. 타작을 끝낸 마당에는 짚으로 된 두지가 만들어지고 축담에는 벼 가마니가 쌓였다. 곳간과 빈방마다 곡식이 차곡차곡 들어찼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좋은 수필 2021.11.14

저승꽃/김원순

저승꽃 / 김원순 하늘색 철 샛문에 저승꽃이 만발했다. 구순이 넘은 어머니 육신 곳곳에 핀 저승꽃처럼, 살짝 손만 대도 부스스 떨어진다. 생전에 피우지 못한 꽃송이 피워보고 싶었던 것일까. 저승의 문턱에 닿아서야 흐드러지게 피운다. 여류하는 세월의 물살에 떠밀려 갈라지고, 찢기고, 벗겨진 육신의 진집마다 핀 붉어서 서러운 꽃, 서러워서 진정 애달픈 꽃. 굴곡진 삶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흘린 피눈물로 피운 꽃이며,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흔전만전 뿌리는 꽃이다. 이승을 떠나는 날 담담히 즈려밟고 갈 저승꽃에서 샛문의 지난했던 삶의 지문과, 당당하고 지엄한 자존과, 어기차게 살아온 시간의 지층을 읽는다. 사는 날까지 뜨겁게 살다가 떠날 때는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속절없이 지는 차갑고 따가운 꽃이다. 육신에..

좋은 수필 2021.11.11

호박꽃 / 변재영

호박꽃 / 변재영 신념의 꽃이 있다. 옥토와 박토를 고집하지 않는다. 논두렁 밭두렁이면 어떠랴. 햇빛 한 줄기 드는 곳이면 쇄석 자갈밭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 뼘의 빈 땅만 허락하면 가나안의 복지인 양 바득바득 덩굴손을 뻗어 꽃을 피운다. 인심 넉넉한 외할머니를 닮은 꽃, 담장 위에 노란 별로 뜨는 꽃이 호박꽃이다. 소낙비 한 줄금 긋고 간 아침, 텃밭을 뒤지던 뒤영벌 한 마리가 나를 시간 저편으로 끌고 간다. 유년시절, 초가집 일색인 동네에 유일한 기와집이 우리 집이다. 땡감나무에 몸을 숨긴 쓰르라미가 목청을 돋우면 담장 위에는 분칠한 듯 노랗게 핀 호박꽃이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내겐 어머니가 둘이다. 살을 주신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일 때 병마로 하늘의 별이 되셨고, 지금은 키..

좋은 수필 2021.11.08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는 순수한 우리말로 도자기에 균열이 생긴 상태를 말하는 데 태토胎土와 유약의 수축률이 달라서 생기는 금이다. 이것을 한자로 말하면 빙렬氷裂이다. 글자 그대로 얼음 빙자는 ‘세차다, 없다’의 뜻이 있고, 열은 ‘찢어진다. 무너진다’이다. 이를 이어 보면 비약된 표현일지 몰라도 얼음과 불의 조합은 얼음이 세차게 무너짐을 말한다. 온종일 말없이 지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사막처럼 고독하다. 변방으로 밀려나 고독을 일상처럼 함께했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사는 존재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거침없는 사막에서 통제와 간섭이 무시 때보다 더 더워져 숨이 막혔다. 한 방향을 향해 느낌을 공유하며 지낸 열흘, 열악한 긴 여정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포만감이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

좋은 수필 2021.11.05

양밥 / 김아인

양밥 / 김아인 현관 신발장 문고리에 걸린 가위가 놀리듯이 내려다본다. 애써 피한다. 수십 년 고수한 가치관을 바꾸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그럴싸한 말솜씨의 유혹에 넘어갔다하면 변명이 될까? 그만큼 답답해서라고 하면 조금 덜 부끄러울까? 연말에 구미 사는 지인 내외분이 찾아오셨다. 연고 없는 도시에서 누군가의 방문은 빈손이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오셨으니 상기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낮부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았다. 오래 전에 짜놓은 각본인 듯 흥겨운 분위기가 건조한 겨울 피부에 수분크림을 바른 것처럼 촉촉해졌다. 이사 이야기가 나왔다. 새집으로 안 가느냐는 질문에 이 집이 팔려야 가지요, 하면서 속사정을 꺼냈다. 불황 탓도 있겠지만 타이밍을 한번 놓치자 영 기회가 오지 ..

좋은 수필 2021.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