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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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식은태 / 이정숙

에세이향기 2021. 11. 5. 09:07

식은태 / 이정숙

 

 

 

식은태는 순수한 우리말로 도자기에 균열이 생긴 상태를 말하는 데 태토胎土와 유약의 수축률이 달라서 생기는 금이다. 이것을 한자로 말하면 빙렬氷裂이다. 글자 그대로 얼음 빙자는 ‘세차다, 없다’의 뜻이 있고, 열은 ‘찢어진다. 무너진다’이다. 이를 이어 보면 비약된 표현일지 몰라도 얼음과 불의 조합은 얼음이 세차게 무너짐을 말한다.

온종일 말없이 지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사막처럼 고독하다. 변방으로 밀려나 고독을 일상처럼 함께했다. 역시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사는 존재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거침없는 사막에서 통제와 간섭이 무시 때보다 더 더워져 숨이 막혔다. 한 방향을 향해 느낌을 공유하며 지낸 열흘, 열악한 긴 여정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포만감이 있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몸에서 소호되지 못하고 부글거리는 말들을 삼키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혼자서 엉두덜거렸으면 좋았을 걸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달궈진 인내는 날 선 말로 이내 불뚝성을 내고야 말았다. 낙장불입이다. 나에겐 왜 묵묵한 어리석음과 배짱이 없는 걸까? 별것이라면 별것이지만 어찌 보면 사소한 일일 수도 있는데 넉넉한 마음 부재에서 그만 밑바닥의 치부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증거 없이 갖는 신념 때문에 내가 옳다라는 그것에 가닿기 위해 너는 틀렸다는 말을 내뱉고 만 것이다. 충돌이 있는 동안 어처구니없는 나의 못난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쩌면 상대에게 인정받고 싶은 연약한 마음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직선의 길이 눈앞에 와서 활을 당겼지만, 화살이 명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너그러운 품을 키우지 못한 나의 졸렬함과 택선고집을 탓한다. 아차 하면서도 이율배반적으로 내 안에는 화가 치밀어 속이 부글부글했다. ‘세상에 그럴 수는 없지.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의 합리화를 위해서라면 진리까지도 거부하고 거짓도 진실로 바꾸어 버리는 슬픈 세상. 차라리 바보가 되는 게 속 편할 걸 그랬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계속 차오르는 말들을 내뱉지는 못하고 목울대에 삼켰다.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흩어질 말들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 지금 생각대로,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이지만 좋은 관계가 삐끗 틀어졌다. 거칠고 천박한 질투라는 것이 작용해 꿈에 부풀었던 도자기 굽기가 열이 강했던지 그만 금이 가고 말았다. 누구 탓할 일이 아니다. 나를 탐색하지 않음은 깨진 거울을 보았거나 양면의 거울을 보지 못하고 단면만 본 것이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쯤 되는 양 죽음 아니고서는 세상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등 매사 대범한 척했지만, 막상 부딪치고 보니 완전 소인배다. 반면교사로 타인을 보면서 반성하고 성찰했으면 좋았으련만 뭐 그리 대수라고 따지고 보면 별일도 아닌데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어떤 생각들이 계속 서성거릴 때는 한 줄기 바람에도 전신이 흔들리는 나뭇잎이 된다. 감정에 스파크가 일어나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도자기의 식은태처럼 생각이 우둘투둘해진다. 대항 작용으로 꼬리잡기를 하며 버티지만 깨진 곳은 모두가 무기가 될 수 있어 서로를 할퀴고 찌른다. 사람 속에 섞이는 일이 거친 세파 속인지 만선 간절해도 쉬이 발을 내디딜 수 없다. 불가근불가원이다. 상대에게 쌓았던 온갖 의미들이 무의미해진다. 포개질 수 없는 틈을 확인하는 순간 극단적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에서 불이 붙고, 그 불을 끄는 과정은 시나브로 꺼지기도 하지만 강력한 소방 호스를 들이대 서로의 옷이 젖기도 한다.

회로의 전류가 있어도 스위치가 연결되지 않으면 사랑이 흐르지 않는다. 이음이 좋아야 마음과 마음의 연결 고리가 파동을 일으켜 물이 흐를 수 있다. 사랑의 부재로 소통되지 못하는 여행이 점차 사물화 되어가 쓸쓸하다. 가구의 서랍이 되어 자꾸만 마음이 닫혀버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여행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틀어졌다. 마음이 두엄자리라 평화니, 고요니 즐거움이니 하는 낱말은 사라지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고무래질을 한다.

지지고 볶고 갈등하면서도 한통속으로 지내야 하는 게 세상사일까? 주변 사람들은 내전보살이 되어 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중립이 최상이기 때문일 거다. 그러면서 함께 움직이고 밥 먹고 정을 나누는 모순의 합일로 지낸다. 세상에 진리는 없고 관점만 있을 뿐. 옳은 일에도 되술래잡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시비비를 따져 무엇하리오마는 언젠가는 진실이 규명될 수 있으니까 이럴 땐 따지기보다 침묵이 필요하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과 꽃의 관계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손잡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내가 바라는 것은 꿈의 세상일까? 정으로 상대를 위하고 보듬으면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자리이타의 삶을 살고 싶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에서 벗어나 봐야 타인과 나 사이에 놓인 경계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다. 나와의 내적 대화는 다른 존재의 입장에 서서 자기를 바라보게 해준다. 마음이란 마음먹은 대로 사용할 수 없기에 나를 비우는 작업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그렇게 비웠을 때 우리는 무한히 타의 것을 흡수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일이 쉽게 풀린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고 타인에 대한 이해다. ‘상처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너를 키울 것이다.’라고 한 니체의 말처럼 책에서 터득하기 어려운 사물과 사람과 사건에서 느끼고 깨닫는 그 무엇이 있다. 상대가 매설한 지뢰를 밟는 것이 새로운 생각의 변곡점이 되어 뜻밖의 관점 하나를 얻어내기도 하고 몽돌처럼 둥글어지기도 한다. 땅의 뿌리는 날카롭고 가지는 뾰족하고 맺은 열매는 모나지 않는다. 내가 나울나울 말을 둥글게 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하겠다.

곡선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직선을 이긴다. 돌아가는 길은 더디고 휘청거리지만, 그 길은 아름답게 무늬를 그린다. 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여기 경계선을 넘어야 성숙한다. 멀리 볼 수 있어야 사는 정답을 찾아가는 길이 보인다. 낮과 밤, 자연은 상극인 것들을 서로 품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데 왜 인간은 어긋나고 대립하는가. 대립과 평화는 한 끗 차이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내면의 갈등이 누그러지고 평온이 찾아든다. 능력보다 중요한 게 인간관계가 아닐까. 역시 여행도 사람이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인간관계가 만사인 것 같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 만나서 나이테처럼 본연의 주름이 만들어진다. 주름은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흔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타인의 생이 담긴 흔적을 하나하나 펼쳐 다양하게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같이 지내려면 낯선 그의 주름을 끌어안아 그와 새로운 아장스망(agencement)을 만들어야 한다. 나나 상대나 각각의 인생에 아름다운 주름이 형성될 수 있도록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디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스친다. 식은태 없는 근사한 도자기 하나 눈앞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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