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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양밥 / 김아인

에세이향기 2021. 11. 5. 09:05

양밥 / 김아인

 

 

 

현관 신발장 문고리에 걸린 가위가 놀리듯이 내려다본다. 애써 피한다.

수십 년 고수한 가치관을 바꾸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그럴싸한 말솜씨의 유혹에 넘어갔다하면 변명이 될까? 그만큼 답답해서라고 하면 조금 덜 부끄러울까? 연말에 구미 사는 지인 내외분이 찾아오셨다. 연고 없는 도시에서 누군가의 방문은 빈손이어도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오셨으니 상기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낮부터 몇 순배의 술잔이 돌았다. 오래 전에 짜놓은 각본인 듯 흥겨운 분위기가 건조한 겨울 피부에 수분크림을 바른 것처럼 촉촉해졌다.

이사 이야기가 나왔다. 새집으로 안 가느냐는 질문에 이 집이 팔려야 가지요, 하면서 속사정을 꺼냈다. 불황 탓도 있겠지만 타이밍을 한번 놓치자 영 기회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헐값에 넘기기엔 너무 아깝다. 고민을 듣던 지인의 아내께서 대뜸 양밥을 쓰라고 일러준다. 호기심 끌기 충분한 말꼬 아닌가. 쌍둥이 낳은 집의 가위를 훔쳐다가 현관에 걸어두면 효험을 본다면서 불을 지핀다. 쌍둥이 낳은 이가 주변에 없다했더니 바로 자기가 쌍둥이를 낳았지 않느냐며 불쏘시개 하나를 더 보탠다. 까짓것 밑져봐야 본전인데 시도는 해보자고 마음을 굳혔다. 결심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의가 이미 반은 성공한 듯 기분이 지레 앞서간다.

밤새 마음이 흔들렸다. 구미까지 가위 훔치러 가는 게 말처럼 쉬운가 말이다. 궁금증을 푸는 데는 인터넷만한 것이 없는 세상. 나는 현대인답게 검색 창을 열었다. 질문 키워드는 ‘팔리지 않는 집 쉽게 파는 방법’이다. 원하는 사례의 글이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장사가 잘 되는 고깃집 가위를 훔쳐다가 현관에 걸어두란다. 절박하면 뭔들 못하랴. 남편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일단 집을 나섰다. 쌍둥이 집이냐 고깃집이냐, 마음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결론은 식당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합의를 봤다. 짜고 치는 고스톱보다는 차라리 낯선 집이 편할 거 같았다. 훔친다는 행위는 분명한 죄지만 발각 됐을 때 사정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이해는 해주시리라 싶었다. 정말로 일이 잘 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자고 남편과 입을 모았다. 차는 어느 사이 구미 시내를 배회하는 중이다.

한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서 그런지 테이블이 거의 비었다. 불륜커플이라도 되는 양 종업원들 눈길 닿기 어려운 구석자리를 골라 앉았다. 오늘 내가 원하는 얼굴 두께라 할까? 통삼겹살을 주문했다. 남편이 달궈진 불판에 고기를 얹어 태연스럽게 굽기 시작한다. 유연하고 차분한 손놀림이다. 나는 혹시라도 누가 우리를 주시하나싶어 가자미눈으로 홀 안을 살핀다. 도톰한 고깃덩이를 한꺼번에 다 올려놓고 굽던 남편이 가위질을 한다. 이윽고 가위가 남편 손에서 벗어났다. 이제 내가 활약할 차례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모근이 긴장을 한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기름 묻은 가위를 가방에 넣는다. 찰나의 움찔거림도 없는 잽싼 동작이다. 겨냥한 목표물 입수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졸지에 손발 잘 맞는 한 쌍의 도둑이 되었다.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질긴지 연한지, 아무 생각 없이 꾸역꾸역 씹는다. 남의 살 씹는 느낌을 제대로 경험한다싶지만 우리는 각자의 몫에 충실할 뿐이다. 행여 주인이 눈치라도 채는 날엔 무슨 망신인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먹으려고 속도까지 살피는 치밀한 연기를 한다. 양심이 갈기털을 세우고 방망이질을 해대지만 내 역할에 전념하고자 마음을 가다듬는다. 마치 전생에서 많이 써먹은 수법인 듯 미처 내가 몰랐던 능수능란함에 스스로 놀란다. 가위를 훔친 행위는 내 안에 잠재된 또 다른 나를 접견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상처(喪妻)한 아버지는 술집 붙박이로 사셨다. 새사람이 들어오면 새 마음으로 재기할까, 가족들은 기대를 했지만 헛수고였다. 한번 놓은 정신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을 일삼으셨다. 할머니는 집안에 닥친 우환을 몰아내기 위해 살풀이를 자주했다. 큰굿 작은 굿 가리지 않고 점쟁이 말이라면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거절을 몰랐다. 그게 자식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라 믿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따위 미신이나 믿는다며 콧방귀를 뀌셨다. 만취한 날은 괜한 헛돈만 날린다고 할머니를 원망하며 포악질을 부렸다. 할머니는 아버지 술부터 끊어놔야겠다며 양밥을 했다. 누룩가루를 아버지 베개 속에다 몰래 묻어두는 일이었다. 내 기억세포 속에는 아무 효력이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두 달이 돼 간다. 전화 한 통도 없다. 미신이라면 일찍부터 그 헛됨을 익히 알고 있다. 나목의 가지 끝에 걸린 희망처럼 조바심이 나면 헛됨을 알면서도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나는 지금 어쩔 수 없는 방편이었다는 자기변명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있다.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은 물안개처럼 흐려지고 얇아진 귀는 점점 팔랑귀가 되어간다. 목적이 없는 행위는 없겠지만 살다 살다 별 희한한 짓을 다했으니 그저 웃을 수밖에. 비라도 한 줄기 내리려는지 가라앉은 하늘이 내 마음처럼 어두워진다.

 

 

양밥 - 액운을 쫓거나 남을 저주할 때 무속적으로 취하는 간단한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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