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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삭발 / 신성애

에세이향기 2021. 11. 16. 10:46

삭발 / 신성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한줄기 따라온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익은 모습의 그녀가 성큼 들어서고 있다. 말없이 털썩 의자에 앉는 그녀의 뒷모습이 잎새 떨구어낸 겨울나무같이 썰렁하다.

“살 빠졌어요? 날씬해진 것 같아요”

“십 오 킬로그램이 빠졌어”

“그래요, 참 좋으시겠어요”

“나, 빡빡 밀어줘요””

“정말, 결혼식은요?"

"상관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을 듣고 약해지려는 내 마음을 다잡았다. 바리캉을 집어 들고 숱 많은 그녀의 머리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움켜잡았다. 무성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발 디딜 틈 없는 뻣뻣한 억새풀 밭 같다. 부처님을 집에 모시고 있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무남독녀를 시집보내기 위해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자라난 머리카락의 길이 만큼 그녀의 번뇌도 자란 것일까. 잘못 만지면 손을 베이는 억새처럼 날이 선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나는 궁금증을 삼켰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길 없는 산속처럼 오리무중이다.

나는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직선으로 머리에 고속 도로처럼 길을 만들었다. 막혀서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는 심정으로 거침없이 내달았다. 그 다음 사이사이 작은 오솔길을 만들듯 점점 둘레로 넓혀가면서 머리카락을 모두 잘랐다. 주저하던 내 마음과 그녀의 한숨도 잘라내었다. 보이지 않게 꼭꼭 숨겨둔 그녀의 집착을 걷어내고, 혹시라도 남아 있을 미망(迷妄)도 송두리째 밀어주고 싶었다. 샴푸까지 마치자, 그동안 햇볕을 받지 못한 머리는 파르라니 속살을 드러내었다. 장승같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그녀가 손으로 맨머리를 쓱 문질러본다.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는 안타까운 손짓 같다. 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삭발한 머리가 어울린다고, 공연히 실없는 소리를 한다. 그 제사 얼굴 표정을 누그러뜨린 그녀는,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은 것처럼 막막하다고 했다. 짓눌려버린 마음을 풀어헤치려고,, 거칠 것 없는 바다로 길 떠난다고 했다.

십 년 전, 그녀가 처음으로 우리 가게 손님으로 왔을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원한 이목구비의 강원도 말씨를 쓰던 그녀는 어떤 헤어스타일을 연출해도 잘 어울렸다. 스스로도 머리손질을 잘하여 우리 가게의 걸어 다니는 홍보맨처럼 우아하고 멋있었다. 한번 씩 들릴 때마다 그녀는 활달한 모습처럼 서글서글하여 좌 중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웃으로 새록새록 정이 들어갈 무렵, 식당을 하기 위해 이사를 간다고 인사를 왔다. 만나면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보내는 내 마음은 웬일인지 바람 든 무처럼 서걱거렸다. 부산한 일상 속에서 정든 그녀가 아스라이 잊혀져 가고 있을 때, 몹시 아프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들렸다. 종합검진을 받아도 병명은 나오지 않고 누군가 목구멍을 막고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게 한다고 헛소리를 해댔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병이 들었다고 푸닥거리를 했다. 신 내림을 받지 않으면 죽은목숨이라, 집안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불제자로 머리를 삭발하고 방황하는 영혼들의 길 안내자 겸 상담자가 되었다.

무엇이 그녀를 무속인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했을까? 가슴에 묻어둔 아들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 때문일까? 딸의 혼사를 위해 기르고 있던 머리를 오늘 삭발하러 왔다.. 근처에도 얼마든지 미용실이 있는 데도 삭발할 땐 꼭 우리 가게를 찾아온다. 그녀와 나는 어떤 인연으로 오늘 이 세상에 태어나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있는지.. 억겁의 인연으로 어느 별에서 만난 적이 있는지.. 나는 그녀에게 때때로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본다. 그녀의 세계를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녀가 짊어진 업보 때문이라면 하루속히 두터운 업장이 소멸되기를 빌어본다.

가끔가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삭발하러 온다.. 흔들리려는 자신을 다 잡기 위해 눈에 보이는 머리카락부터 자르는 것이다. 빡빡 머리카락을 밀어낼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진다. 더구나 오늘같이 삭발한 손님이 여자이면 나의 가슴 한쪽도 베어 내게 된다. 하루 이틀 한 일도 아닌데 매번 삭발을 할 때마다 나도 같이 맨머리가 된 듯 경건하고 허전해진다. 감춰진 내면을 드러내듯 드러난 맨머리는 갈색 껍질을 벗긴 양파처럼 매끈하다. 사람들의 마음은 속살인가 싶으면 어느덧 갈변하여 껍질이 되고 마는, 겹겹이 포개어진 양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 꺼풀 벗기고 나면 또 다시 쌓이는 일상의 더께에 발목을 잡히고 눌러앉게 된다. 가차없이 그들의 머리를 밀어버리는 내 가슴속에도 여러 모양의 티끌이 키 재기를 하고 있다.. 나는 어느 때쯤 흔들림 없는 고요한 경지에 이르러 묵상에 들 수 있을까. 이제는 섬세하던 감정의 날도 무디어질 때가 되었건만, 날이 갈수록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간다. 사람들의 머리를 삭발하듯 내 마음속에 엉켜있는 욕망도 떨쳐 낼 수 없을까. 나는 더부룩한 머리를 삭발하는 날이면 말끔하게 비워진 투명한 그릇에 비치는 달빛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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