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이재은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 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 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저, 맛없으면 공짜 소리가 시장 입구부터 질펀하게 깔려 나왔다. 장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녹아있는 우렁찬 목소리를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말들의 잔치가 벌어지고 흥정하는 소리가 가락을 타는 시장에서 나는 생강을 사러 온 목적도 잊은 채 자유로운 이방인으로 느릿느릿 시장통을 활보하고 다녔다. 김장철은 김장철인가 보다. 여기저기 배추, 갓, 쪽파며 무가 여름의 푸성귀인 양 시퍼런 혀를 빼고 늘어졌다. 간판도 없는 채소 좌판 상인은 얼굴도 목소리도 젊은 청년이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 손님은 엄마로, 중년의 아주머니에게는 누님이라고 부른다. 배추를 사는 엄마에게는 갓을, 알타리를 고르는 누님에게는 쪽파를 곁들여 내놓는 넉살도 보통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주 같기도 아들 같기도 한 청년의 패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절을 역행한 호칭에 들뜬 손님들이 흥정도 않고 값을 치르는 모습은 당연해 보였다. 철커덕 철커덕 소리가 맞은편에서부터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흥이 붙은 얼굴의 엿장수였다. 큰 가위를 휘두르며 목판에 담긴 엿을 대패 쇠 날로 툭툭 치면 엿가락은 먹기 좋게 잘려 나갔다. 둔탁한 소리만큼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은 가위를 자유자재로 쓰며 노랫가락에 사람들의 시선까지 엮는 엿장수는 곡예사이자 입담꾼이었다. 호기심에 한 봉지 사고 싶어졌다. 한 봉지에 담기는 정량이 있기나 했을까. 돈만큼 적당히 엿을 떼어줄 마음은 애초부터 장삿속에 없었던 것 같다. 엿판을 들썩이게 하는 엿장수의 흥에 맞춰 손님은 고갯방아만 잘 찧어 주면 된다. 즐거워하는 만큼 봉지에 엿이 담기니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실한 대추가 흔한 계절이다. 가을 햇살의 애정이 담긴 붉은 껍질 위로 갈바람이 드나든 주름이 쪼글쪼글하다. 톡 쏘면서 쏴하는 맛의 생강과 부드럽고 달큼한 맛의 대추는 궁합이 그만이다. 이집 저집 대추의 모양새가 어차피 비슷비슷하니 좌판 상인의 인상을 살피는 것이 좋다. 후덕한 얼굴에 풍채가 좋은 상인 앞으로 갔다. 두 손으로 됫박을 바쳐가며 수북이 담아 올렸다. 봉지에 넣을 때도 떨어질 세라 신중하게 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도 한 줌도 모자라 한 줌을 더 넣어 주는 것이 아닌가. 됫박의 중량을 계산하던 나의 머릿속 깜빡임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시장통을 빠져나오자 인도의 가장자리에는 노점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빨강 노랑 하양이 연속으로 돌아가는 파라솔 아래가 그들 각자의 영역인 듯싶었다. 줄지어 늘어선 노점의 끝에는 하늘에 펴 받칠 것도 없이 장사를 하는 노인도 있었다. 볕조차 비껴가는 구석자리에 바람이 어찌나 왔다갔는지 노인이 기댄 나무는 벌써 졸가리만 앙상하였다. 축 늘어진 전봇대 전선 같은 그림자는 노인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맨바닥에 찬기를 깔고 앉은 탓인지 세운 두 무릎 사이에 묻은 얼굴은 눈만 살짝 보일 뿐이었다. 휘주근한 노인의 모습과는 달리 머리채를 단단히 묶어 똬리를 틀어 놓은 마늘은 들어찬 알맹이로 미어질 듯 보였고, 방파제의 둑처럼 아귀를 맞춰 쌓아 올린 생강에서는 코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향이 휘발되고 있었다. 생강을 살피는 척 쪼그리고 앉았다. 얼마냐는 물음에 노인은 뭐 하려는지 되레 묻는 것이다. 끓여 마실 요량이라고 하니 연륜의 레시피를 요긴하게 일러주었다. 생강 담을 봉지를 펼쳐 든 노인의 손이 그을린 솥단지처럼 검고 오래된 부뚜막처럼 갈라져 있었다. 씨알 굵은 생강을 골라 담아 주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가늘고 질긴 손은 무척 컸다. 손님의 눈대중으로도 중량은 초과였다. 건네받은 봉지를 염치 있게 바라보고 있으니 ‘가져가, 나는 더 주려고 파는 거야’라며 봉지를 밀어내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다 식은 무릎 사이로 파고드는 노인의 얼굴에서 겸연쩍어 하는 미소를 보았다. 속 깊은 덤의 고갱이인 양 하얀 미소였다. 끓기 시작한 주전자는 도르륵 도르륵 밝은 소음을 낸다. 열기가 띄워 올리는 생강이 서로 부딪치며 맛과 향을 내는 소리일 것이다. 주둥이로 빠져나온 희뿌연 김이 생각의 도화지로 펼쳐진다. 줄기와 가지만으로 우뚝 서 있는 나무 곁에 시간의 흠결처럼 거칠고, 떨어지는 세월처럼 앙상한 노인의 모습이 정물처럼 그려진다. 정적이고 많은 여백을 담은 그림은 한층 깊고 너그러운 느낌이다. 자신의 그릇에서 기꺼이 더 내어주고 마음까지 얹어주면서 흥정을 하지도 생색을 내지도 않는 도타운 덤의 색깔로 채색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에서 향이 배어 나온다. 마음 구석구석까지 온기를 전하는 진한 덤의 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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