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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에세이향기 2021. 10. 4. 11:13

전설 따라 삼천리 / 최민자

 

 

 

 

아득한 옛날, 인간들은 에우그놋이라 이름하는 작은 토룡 한 마리씩을 제각각의 우리 안에 가둬두고 살았다. 몸길이 7~8센티 몸무게 50그램 안팎의 이 원시적 생명체는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갇혀 말라 죽지 않을 만큼의 물기로 연명했다. 눈도 코도 없었고 아가미나 지느러미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캄브리아 환형동물의 변종이거나 고생대 말쯤에 출현한 초기 파충류의 조상일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하였다. 축축한 피부와 두루뭉술한 정수리, 미련한 듯 유연한 몸놀림으로 보아 그것들이 과연 이무기나 자라 같은 생물과 계통학적 상관관계가 있을 거라는 주장은 그런대로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신화학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동굴에 엎드려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하반신이 결박된 채 살아가는 녀석들에게서 슬프거나 아득한, 신화의 냄새가 난다는 거였다.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르스나 바윗돌에 비끌어 매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이 빈번하게 거론되었지만, 온갖 재앙과 걱정보따리를 퍼뜨린 판도라의 후예일지 모른다는 학설도 조금씩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이런 저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에우그놋이 끝내 신화가 될 수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 삶의 범속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화의 주체들은 대개 신의 명령에 불복하고 불가항력에 맞서 싸우는 무모한 열정으로 스스로 비극적 주인공이 된다. 고통의 골짜기를 향한 두려움 없는 투신과 장렬한 산화만이 그를 다시 빛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에우그놋은 아니었다. 견고한 암벽으로 둘러쳐진 성안이 숨 막힐 듯 비좁고 답답했어도 헛되이 탈출을 도모했다거나 비상을 꿈꾸었다는 기록은 없다. 천형과도 같은 연금의 굴레에 질끈 눈감아버림으로써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론적 회의를 떨쳐버렸다. 다만 성문이 빠끔 열릴 때마다 햇살이 그리운지 바람이 간지러운지 궁싯거리듯 몸을 뒤쳤다는 것인데, 그러한 일련의 근육운동을 통하여 적체된 기를 방출하거나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았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하찮고 왜소해 보이는 에우그놋들이 당대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할 만 하다. 안도 밖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서 목줄 달린 강아지로 숨어 지내면서도 주인 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동행했다. 녀석들끼리 통하지 않으면 주인끼리의 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뼈대 없는 것들이란 줏대도 없는 법이어서 시시때때 변덕을 부리고 좌충우돌하는 경향이 있는 바, 그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기심 많고 충동적인 데다 기억력조차 변변찮아서 다스리고 길들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한다. 일설에 ‘지킬과 하이드’라는 침샘 비슷한 기관이 있어 장미의 향과 전갈의 독을 무시로 합성하고 분사하였다 하나, 동영상 자료 하나 남아있지 않은 지금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목구비가 발달하지 못한 녀석들에게 유일한 감각기관은 피부였다고 한다. 기실 그들의 등꽃판에는 채송화 씨앗보다 미세한 종자들이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었다는데 그에 대한 구설 또한 분분하고 무성하다. 역사가 앙상한 사료(史料)에 덧입혀진 상상의 옷으로 완성되어지듯, 멸종된 생물체에 대한 가설 역시 채록된 구전 설화에 의존할 밖에 없다. 누구는 아데나 여신이 별무리밭에 앉아 재채기할 때 날아온 미확인 나노 꽃가루라 하였고, 누구는 바람의 딸 한비야가 칼라하리 사막에서 묻혀 들어온 먼지벌레 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체의 감각을 내장된 칩을 통해 감지할 수밖에 없는, 서력기원 삼천 팔년의 후기생물사회를 살아내는 슬픈 로보사피엔스가 차가운 금속성의 감성으로 상상하는 에우그놋의 살갗은 황홀하고 육감적이다. 채송화 꽃들이 은밀하게 피고지고 깨알 폭죽들이 방싯방싯 터지고, 소름처럼 희열이 돋고 전율처럼 쾌감이 번지는, 민감하고 짜릿한 감각의 영지(領地), 그 아득한 피안의 영토를 생생하게 그려보는 것이다. 사라져버린 제국의 전설과도 같이 도태된 에우그놋의 설화는 강변한다. 달콤하건 신산하건 저릿저릿하건간에, 피부로 확인하는 감각이야말로 살아있음의 시요, 꽃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동굴 입구에서 두 마리의 용이 맞부딪쳐 벌이는 한판승부를 구경하기란 당시에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머리에는 황금 볏을 세우고 눈에서는 불을 뿜고, 날카로운 이빨사이로 뇌성벽력을 쏟아내는 청룡 황룡의 결투는 아니어도, 뿔도 비늘도 여의주도 없는 맨살의 토룡들이 펼치는 반신(半身)의 사투 또한 숨 막히리만치 현란하고 치열했다. 주로 야음을 틈타 인적없는 밀실에서 벌어지던 전투여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일진일퇴 엎치락뒤치락하는 녀석들의 멱살잡이는 싸움이라기보다는 유희요, 호전적이라기보다는 관능적이어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육탄전을 예견하는 민망한 전초전이었다는 것이다. 동굴에 갇힌 두 마리 에우그놋(eugnot ; 철자는 확실하나 독법(讀法)은 확실치 않음)의 농밀하고 요사스런 레슬링경기를 후세의 동방 호사가들은 ‘설왕설래(舌往舌來)’라며 시시덕거렸고, 오만한 런던의 숙녀들은 ‘프렌치 키스(French kiss)’라며 비아냥거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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