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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에 대해 / 박월수

에세이향기 2021. 9. 10. 23:10

떠남에 대해 / 박월수

떠난다는 건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지금껏 살던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고부터 주변 모든 것들이 애틋하다. 달비골을 비추는 달과 학산에 뜨는 해와 사문진 낙조가 새삼 눈물겹다. 월광공원을 거닐며 한나절을 보낸다. 자주 찾던 수밭골과의 이별이다 생각하니 막 넘긴 커피 맛이 쓰다. 꽃 사진을 찍곤 하던 수목원에서 나는 금세 그렁그렁한 눈빛이 된다. 열대 식물원 앞 벤치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부겐벨리아를 영원히 못 볼 것처럼 오래 바라본다.

 흔히 이사는 내게서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결정하게 한다고 한다. 집안을 둘러본다. 한때 발코니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거실 안에도 들여놓았던, 지금은 빈 게 더 많은 화분과 무거운 돌확들, 돌절구가 눈에 들어온다. 식물이 담긴 화분에 내 마음을 심어놓고 좀 먹히듯 살고 있는 현실을 견디고 싶었을까.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줄 것 같아 자꾸만 사 들이던 다양한 모양의 의자들, 장롱 가득 넘쳐나는 입지도 않을 옷들. 느닷없이 몸이 무겁다.

 장식장을 정리하다가 손바닥만 한 낯익은 물건과 마주친다. 작은 바구니에 가지런히 포개진 신발 두 켤레.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신은 신발이다. 딸아이는 첫 걸음마를 시작하고도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보행기용 신발을 신었었다. 작은 발로 기우뚱기우뚱 걷기 시작했을 때 세상에 모든 행복은 온통 내 것이었다. 하얀 고무신은 엄밀히 말하면 아들아이의 두 번째 신발이다. 시골장을 구경하다가 앙증맞은 고무신이 눈에 띄었다. 나는 앞뒤 잴 염도 없이 집어 들고 아들 발에 신겼다. 작은 배 같은 고무신을 신고 아들은 이 골목 저 골목 잘도 떠다녔다. 내 속에 선명히 남은 그 모습은 언제든 밝은 빛을 배경으로 멎어 있다.

 동글납작한 도자기 그릇엔 좀 더 특별한 게 담겨 있다.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가다 안면도 갯벌에서 캐온 소라껍질이다. 한 곳에서 캔 네 개의 소라껍질은 올망졸망하니 모양은 닮았어도 크기는 다르다. 남매를 둔 한 가족의 단란함을 보는 것 같아 알맹이를 빼먹고 껍데기를 챙겨왔었다. 가끔씩 소라껍질을 차례로 귀에 대고 그 여름의 바다 소식을 묻는다. 작은 공명통에서 풋내기 부부와 어린 남매가 바다처럼 출렁이며 흐드러지게 웃는 소리 들린다.

 집안 구석구석 둘러보며 버릴 것과 챙겨야 할 것에 대한 눈인사를 마친다. 비로소 멀리 떠난다는 일이 현실로 와 닿는다. 시골로의 이사를 결정하기까지 주변의 걱정은 정작 나 자신보다 더 컸다. 말이 좋아 귀농이지 여린 몸으로 힘든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느냐. 오죽하면 '사회적 이민'이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느냐. 아이들을 데리고 정말 시골로 갈 셈이냐. 도시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데 떠나려고 하느냐는 식의 우려 섞인 말들이었다.

 통 속에 갇힌 듯 한 생을 산다는 건 얼마나 갑갑한 일인지 나는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면 자면서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편리로 치장한 도시의 궁핍이 나를 말리는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록색 강물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와 상수리 나무에 내리는 싸락눈을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 깨어있는 시간들이 될 것이다.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밤에 적막을 친구삼아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고 얼음꽃이 반짝이는 사이로 일출을 볼 수 있다면 도시에서 누리던 편안함 따위는 내어주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시골에서의 결핍은 내 영혼의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므로 함수초처럼 조그만 자극에도 움츠러드는 나를 다잡았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때가 되어 무언가가를 깨닫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벼르기만 하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들을 놓쳐버린다면 그보다 후회스런 일도 없을 것이다. 나는 차곡차곡 시골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늘 곁에서 위로가 되어준 친구가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불러싸. 어찌할 수 없는 설움으로 눈물조차 나지 않을 때 나 대신 울어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차려주는 소박한 밥상은 지금껏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달콤했다. 사과 꽃 필 무렵쯤 들에 핀 민들레를 캐서 샐러드를 만들고 넝쿨딸기로 상을 장식해 그 친구를 초대할 생각을 하니 떠난다는 일이 적적하지만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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