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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지르다/최지안

에세이향기 2021. 9. 12. 10:00

엎지르다 / 최지안

 

 

때때로 울음을 엎지르곤 했다. 바닥으로 쏟아진 눈물, 내 속에 깊은 우물이 있는지 한 번 올라온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언제 그 많은 울분이 가슴 바닥에 고여 있었을까. 눈자위 붉은 설움은 설탕물 흘린 자리처럼 끈적거렸다. 울음의 끝동은 두통약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엎질러진 감정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감정은 질척였다. 주체 못한 감정이 출렁이다 흘러넘쳤다. 가시 돋힌 언어들은 마시다 흘린 커피처럼 누렇게 남았다. 먹을 만큼 나이를 먹고서도 가끔 재발하곤 했는데 그때가 나의 임계점이었던 것 같다. 한 발 뒤로 물러나면 아득한 벼랑이었다.

흔적을 남기는 말. 엎지른다는 말의 성분은 물이 아닐까. 눈물처럼 그렁그렁하게. 물처럼 흐르고 죽처럼 걸쭉하게 출렁이는 말. 그리하여 돌이키지 못하고 결국은 돌아서는 말. 울컥 쏟아놓고는 당황하여 수습하는데 애를 먹는 말.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감정이 제 맘대로 튀어나왔다. 장마전선처럼 기압이 낮은 곳에서 개구리 뛰듯 불쑥, 양서류의 표면처럼 축축하고 장마철 곰팡이처럼 일단 피고 나면 뒷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 엎지르고 닦지 못한 자리처럼 얼룩지던 관계였다. 다시 주워 담지 못해서 숙취 후 두통처럼 후회와 무력감을 남겨놓기도 했다.

엎지른다는 것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상의 모든 것이 중력을 거스를 수 없듯 원래의 틀을 벗어나는 물질은 '엎지르다'에 떠밀려 밑으로 쏟아진다. 넘치는 것은 의지일지 모르나 원형을 벗어나 넘어버린 것은 의지 밖이다. 어쩌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일파만파 번지듯. 경계를 넘어 쏟아진 것은 나의 바운더리를 떠난다.

아이들은 중력을 시험하곤 했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확인 하고 싶어 했고 낙하하는 속성을 즐거워했다. 쌀이나 음료수를 쏟아놓거나 엎지르고 그 위에서 놀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엎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는 일과가 하루의 반이었다. 대개는 원래대로 쓰레기통으로 갔고 엎지른 음료수는 걸레로 스며들었다. 원형은 보존되지 못했다.

한 번 엎지른 감정도 원형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처음보다 못한 결과도 나왔고 변질되기도 했다. 조심해도 쉽지 않아서 모질게 내뱉은 말 한마디에 끝내 돌아서지 못한 관계들도 있었다. 어떤 말들은 독해서 씻기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 낡고 풍화되어야 먼지처럼 날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고 엎지르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었다. 엎지르고 나면 시원해지는 것도 있었다. 탐탁지 않은 것을 엎지르면 후련해졌다. 힘이 부치는 것을 엎지르면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 안경을 사던 날이었다. 수치심이었는지 분노였는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그마 분출하듯 뿜어져 나왔다. 나는 아무도 묻지 않은 과거를 뒤적이며 울었다. 실명된 눈이 사시라는 것을 숨기려고 애썼던 날들과 내게 와서 박혔던 말들과 콤플렉스로 묶인 장애를 쏟아냈다. 그동안 가두어 둔 설움이 눈으로 입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엎드려 마저 나를 엎질러 버렸다. 시인 이재무는 '엎지르다'라는 시에서 국그릇을 엎질러서 얼룩을 닦다가 자신을 돌아본다. 살구꽃 흐드러진 봄날의 감정이나 시간을 엎지르면서 살아왔다며 엎지른 것이 어디 국물뿐이냐고 반성을 한다.

내가 엎질렀던 것을 되돌아보는 밤, 책상에 엎드려 조용히 나를 엎지른다. 내가 엎질렀던 부끄러움 중에서 그나마 잘 엎지른 것도 있다는 것. 그 때문에 많은 실수를 눈 감으며 사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살구나무가 마당에 꽃을 하얗게 엎지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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