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은살
임병숙
아버지의 발바닥은 평생 칠순 노인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질곡의 세월이 더께처럼 쌓여서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혀 있다. 피부라기보다는 갑각류의 그것 같다. 발바닥만 감싼 굳은살은 여느 피부처럼 촉촉하거나 매끄럽지도 않고 푸석 푸석한 게 아무런 반응도 없어 보인다. 척박하기만 하다. 멈춰선 시계바늘처럼 늘 그 자리에 정지된 모습이다. 만져보면 메마른 바람소리가 들린다.
갑작스런 마비증상으로 아버지가 입원을 하셨다. MRI 사진을 찍어보니 뇌 속의 혈액이 하얗게 고여 있는 게 보였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탁해지면서 무언가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몸속을 흐르는 혈액도 마찬가지다. 적은 양이지만 혈액이 고여 있어서인지 아버지의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되었다. 입원한 지 하루만이다. 무슨 말인가 의사 표현을 하셨지만, 들리는 것은 제자리를 뱅뱅 도는 혀의 웅얼거림이었다.
하루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하루 사이에 반쪽이 정지된 아버지에게 스물네 시간은 순식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절망감도 컸으리라.
“으, 으…,”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에 틀니 사이로 발작처럼 비명이 새어 나왔다. 얼굴에는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살집이 없던 체격은 며칠 사이에 뼈마디만 도드라졌다.
거미줄 같은 혈관을 따라 흐르던 수분이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발 끝에 당기 전에 증발해버린 것일까.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표피가 오랜 침목을 깨고 스멀스멀 움직였다. 아버지의 발바닥이 탈수증으로 타들어가는 식물처럼 하얗게 변했다. 곧이어 이리저리 가느다란 선을 긋더니 봉긋하게 일어났다. 잘 익은 봉숭아 씨앗 주머니 같은 초조와 긴장감이 돌았다. 굳은살이 툭툭 갈라지면서 소리 없는 파열음이 씨앗처럼 쏟아졌다. 찢겨진 종이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진 굳은살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다.
갑작스런 삶의 정지로 혼란을 겪은 것일까. 아버지의 기억력이 몹시 나빠졌다. 숫자 계산은 물론 자식들 얼굴도 몰라보셨다.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을 기억하다 어느 날은 방금 전의 것도 기억을 못하셨다. 어떤 날은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던 아버지는 직선적인 성격이다. 싫고 좋음이 분명하고 싫은 감정은 거르지 않고 그대로 내색하신다. 그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셨다. 그 모든 것을 거세당하듯 누워 있으니 기억력마저 떨어지는 것 같다.
기억이란 지나간 시간이 남긴 유물이다. 그 시간이 많을수록 기억들도 많지 않을까.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니 두꺼운 퇴적층처럼 쌓여 있으리라. 하지만 똑같은 장면이나 사건일지라도 기억이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구는 슬프고 누구는 슬프지 않고, 혹은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 느낌에 따라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 못할 수도 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오랫동안 뇌리에 남기도 한다. 또한 큰 사건이라도 그 순간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전혀 기억 못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기억의 농도가 다른 것도 그런 차이리라. 그러니 굳이 기억 못한다고 해서 탓할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의 뇌리에 깊게 각인 되어서, 두고두고 말했던 것조차 기억 못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수십 년을 함께 살다 먼저 가신 어머니의 기일조차 하얗게 지워버린 아버지, 심지어 당신의 몸에서 떨어진 살비듬이 쌓여 있는 집 주소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세포에 층층이 쌓여 있던 기억들이 굳은살처럼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기억력을 되돌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볼펜을 쥐어 드렸다. 날짜가 지나간 달력 위에 단어를 불려드리며 써보라고 했다. 쉬운 단어도 쓰지를 못하셨다. 고대 어느 벽화에 그려져 있는 상형 문자 같은 선만 간신히 그었다. 며칠 동안 연습을 했지만 같은 선 긋기의 반복이었다. 아버지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얘기를 하면 이해를 하셨다. 하지만 그 중에 한마디라도 써보라고 하면 쓰지를 못하셨다. 아버지가 기억의 저장고에서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해도, 앵무새처럼 지난 시간들을 되감기해보았다.
쓰기 연습을 한 달력이 늘어났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글씨지만 아버지만의 생각들을 유추해보았다. 정지된 기억 속에서 들춰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서모, 자식들, 농사, 술,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일까. 아버지의 기억의 저장고에서 꺼내온 것은 매번 엉뚱한 것이여서 답답해 하셨다. 하지만 힘들어 하면서도 틈 날 때마다 글씨를 쓰더니, 마침내 몇 개의 단어를 쓰셨다. 모자르(못자리), 고츠(고추), 송(사위), 불생해(불쌍해). 평생 써본 적 없는 왼손 글씨는 구불구불 기어서 그림이 되었다. 그 중에 ‘불생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보였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도 속정을 쉽사리 표현 못하셨다. 뒤늦게 만나서 당신 때문에 고생하는 서모지만, 한 번도 고생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연한 걸로 여겨서 서모를 힘들게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불생해’라고 쓰셨다. 지금까지 고생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과, 혹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다음의 서모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흙냄새에 성큼성큼 발도 담그고, 사위에게 얹어준 집의 무게도 가늠하고 계셨다. 뇌졸중으로 정지된 언어의 틈새로 기억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인가.
침대 매트리스 위에 바람결에 떨어진 이팝꽃처럼 굳은 살이 하얗게 떨어졌다. 양말을 갈아 신길 때마다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언젠가 굳은살처럼 두꺼운 껍질이 갈라진 나무를 본 적이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모습은, 껍질 속마저 퇴화되어서 텅 비어 있을 것처럼 보였다. 호기심에 껍질을 벗겨보니 힘없이 툭툭 떨어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벗겨낸 껍질보다 더 부드럽고 파르스름한 속살이 자라고 있었다.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아버지의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굳은살이 떨어진 자리에 부드럽고 마알간 속살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걸음마를 하지 않은 아기의 발이 이보다 더 부드러울까. 평생 농사를 지은 노인의 발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두껍고 투박한 두께로 인해 속살도 하얗게 굳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속에는 새살이 씨앗처럼 발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기억력을 차단하는 이물질 때문에 일시적으로 정지되었을 뿐이다.
굳은살이 각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세포마저 소멸되는 듯했다. 힘겹게 붙들고 있는 작은 희망마저 고기의 비늘처럼, 툭툭 떨어지는 것 같은 초조와 불안감이 가슴 한켠을 차지했다. 하지만 굳은살이 떨어진 자리에는 절망만 있는 게 아니고 희망도 웅크리고 있었다. 쉽게 절망했던 것은 절망이라는 두텁고 단단한 문을 밀치고 나가면, 또 다른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쉽게 절망을 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까.
결국 굳은 살이 떨어지는 것은 퇴화가 아니었다. 자신의 살점이 파열되는 고통을 견디며,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희망을 발아시킨 것이다. 그러니 퇴화되어서 정지된 것이 아니다. 절망도 아니고 희망이었다. 아버지의 부식되지 않은 삶의 기억들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며, 미처 떨어지지 못한 굳은살을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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