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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김치를 담근 날 / 박금아

에세이향기 2021. 9. 9. 10:48

열무김치를 담근 날 / 박금아

저녁을 들던 친정어머니가 열무김치를 찾으셨다. 다음 날 아침, 슈퍼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열무 두 단과 얼갈이배추 한 단을 사 들고 왔다. 어머니는 칼과 도마, 양재기와 김치통을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도 담그시려고요?”
꽃무늬 앞치마를 입혀 드렸다. 머릿수건도 찾기에 씌워 드렸더니 거울 앞에서 한참을 매만지셨다. 그사이 나는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다듬어 양재기에 담았다. 한데 섞어 소금을 뿌리려고 할 때였다. 어머니가 놀란 듯 달려와 소금 쥔 내 손을 잡았다. 열무김치는 열무만 따로 담가야 맛있다며 얼갈이배추를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담았다. 마늘과 생강, 붉은 고추, 풋고추, 쪽파, 양파도 따로따로 갈라놓았다.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여 간조롱이 줄을 세우는 모습이 얌전했다. 천생 새색시 같다고 했더니 얼굴 가득 붉은 고춧물을 들이며 웃었다. 재료를 다 다듬은 어머니는 배를 깎았다. 큰 부엌칼로도 껍질을 얇게 베어내는 솜씨가 당신의 젊은 날을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이제 콧노래까지 불렀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갑자기 전화기를 찾았다. 번호 검색이 잘 안 되는지 몇 번이나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당황한 낯빛이 되어 일렀다.
“너거 작은엄마 전화번호가 없어져삤네. 인자는 전화기도 늙어서 번호가 자꾸 지워진다 아이가.”
어쩌나……. 물끄러미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 산 보득키 체리만 보고 있지 말고 퍼뜩 작은어머이 번호 쫌 주라 쿤께나!”
망설이다가 내게도 전화번호가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니는 우찌 그리 인정머리가 없노? 너거 숙모가 니를 올매나 예삐다 켔더노. 같은 서울 바닥에 살멘시도 전화번호도 모르고?”
가망 없음을 눈치채신 모양이었다. 집으로 가져다주어야겠다며 김치 통 하나를 더 내오라고 했다. 준비해 둔 통을 보여드리니 손을 내저으며 더 큰 것으로 달라고 했다.
“너거 숙모가 내가 맹근 열무김치를 올매나 좋아하는 줄 아나?”
용기를 내어 작은 엄마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찹쌀풀 끓는 소리가 심장 박동 같았다. 툭툭 풀물이 튀어 올라도 얼굴을 치켜들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여들없이 휘휘 휘저을 도리밖에. 황망해 할 어머니의 슬픈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십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온 날이었다. 석양이 지던 무렵이었다. 전화기가 울리고, 몇 번 외마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큰 울음이 나왔다. 작은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갑작스러운 기별이었다. 그 기억을 되찾았다면 지금도 대성통곡이 터져 나올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니, 어머니는 뜻밖에도 생게망게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슴 같은 눈망울이 되어서는 “현오네*가 세상을 베맀다고? 와 죽었노?” 하고 물었다.
양파를 썰던 내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친동생과 다름없던 작은 엄마의 기막힌 죽음을 까마득히 잊었다는 것보다, 당신의 가슴앓이였던 막내 동서가 죽었다는 말에도 놀라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제 어머니에게는 삶과 죽음의 거리가 아득하지 않다는 사실이 슬펐다. 간절하면 죽은 사람도 산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으려나 싶었다가, 오랫동안 잊히면 살아 있는 사람도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겠다 싶어 다시 먹먹해졌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몸을 파고든 몹쓸 병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다가 고통이 이만큼에서 멈춘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기억을 앗아가는 질환이라니. 전 생애를 통하여 얻은 오랜 기억의 통증까지 다 잊게 해 준단 말인가. 뼛속 깊이 새겨진 생채기까지 지워주려나. 그럴 수만 있다면 어머니도 평생을 누르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훨훨 날아갈 수 있으려나 싶어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헛갈려 하다가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섞어서 한 통에 담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또 슬퍼져 난감할 뿐인데 어머니는 이번엔 열무김치는 얼갈이랑 함께 버무려서 담가야 맛있다며 참 잘했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자꾸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양파 때문이라며 손으로 물을 떠서 눈을 씻어주었다. 머릿수건을 풀어 물기를 닦아주고는 눈가를 꼭꼭 찍어가며 눈 속을 들여다보고 또 보며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는 “인자는 우리 큰딸이 혼자서 열무김치도 잘 담그네.” 하고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쳐주셨다. 참 다행이었다.
관악을 넘어 베란다로 비껴드는 햇살이 갓맑았다. 높은 산을 넘어선 어머니의 얼굴도 해맑았다.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쯤일까. 그 시간 위에도 말간 빛만 내릴 수 있다면. 지나온 시간과 아우러져 잘 익은 열무김치처럼 말갛게 익어갈 수 있다면…….



*실제 이름이 아닌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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