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밍밍함, 그 끌림 / 박성희

밍밍함, 그 끌림 / 박성희 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하지만 예외는 있게 마련이다. 어시장에서 만난 개복치가 그랬다. 오래된 어물전 귀퉁이에 내걸린 개복치의 사진은 좀 유난스러웠다. 평범한 생선의 대가리를 뚝 잘라놓은 듯한 외형에 몸의 끝부분엔 아래위로 뾰족한 지느러미가 뿔처럼 돋았다. 배지느러미도 없어서 얼핏 보면 생선이라기보다는 꼬리가 떨어져 나간 연 같았다. 배는 잿빛이 간간이 섞인 흰색에다 등허리는 푸른색이었다. 거대한 몸에 이목구비는 어쩌면 그리 오종종한지 기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피부 만은 철갑처럼 견고해 보였다. 어설픈 생김새 때문에 개복치는 제대로 생선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름마저 귀한 대접과는 거리가 먼 물고기였다. 복어과 이면서 생선을 낮추어 부르는 치자를 단것도 서러운데 앞머..

좋은 수필 2021.06.15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물소리를 들으며 / 허창옥 혼자 앉아서 물소리를 듣는다. 그 시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물은 눈앞에서 두세 번 꺾이며 떨어져서 소(沼)에 잠긴다. 영국사 가는 길, 숨이 찰 즈음에 삼단폭포를 만났다. 폭포는 높지 않고 물줄기도 새지 않다. 마찬가지로 소도 둘레가 크기 않고 깊이도 얕다. 작고 조용한 폭포, 오히려 쉬기에 편안한 느낌이다. 평상처럼 편편한 바윗돌에 홀로 앉아있다. 이제 막 돋아나는 새잎들의 투명한 초록으로 천지가 눈부시다. 물은 연신 떨어져서 포말로 퍼지고 소는 그물을 받아 안는다. 물은 소에 이르나 한 쪽이 터져있어 또 어디론가 흘러내린다. 그러니 소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마냥 그대로이다. 품었으나 다시 흘려보내니 소는 편안해 보인다. 소는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이끼 낀..

좋은 수필 2021.06.14

하늘 天 / 김응숙

하늘 天 / 김응숙 늦깎이 공부를 하다 보니 새삼스레 천자문를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뜻으로 보나 차례로 보나 하늘 天이 으뜸이다. 세상 만물이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 또한 하늘 아래에 있다. 天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늘 아래 있는 人자가 보인다. 한자가 상형문자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 사람 人은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문자화 한 것이라 한다. 긴 획이 짧은 획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짧은 획이 긴 획을 지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획 하나만으로는 글자가 될 수 없으니 일견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속성을 담아낸 것으로도 보인다. 휘어져서 서로 균형을 맞추고 있는 두 획에서 삶의 탄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사람 人 위..

좋은 수필 2021.06.14

어떤 표정/배종팔

어떤 표정 / 배종팔 스산한 가을날 오후, 짙은 가을빛에 이끌려 비탈진 돌계단을 오른다. 아내와 보름 만에 나선 산행길이다. 돌계단 양옆 단풍나무 잎사귀에 가을 햇살이 뛰논다. 산의 형상이 물고기라면 눈의 자리에 암자가 있다. 암자를 지나 몇 발짝 오르면 화강암으로 된 돌부처가 토굴 속에 광배를 끼고 앉아 있다. 가슴 한켠에 불심이 자리한 건 아닌데도 그의 엄숙하고 숙연한 분위기에 매번 발목이 잡혀 아내와 나란히 서서 합장하며 숨을 고른다. 오늘도 두려움 반, 경건함 반으로 그를 쳐다본다. 삶의 행적을 훤히 꿰뚫어 보는 듯한 눈매가 서늘하여 매번 그의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이제 무뎌질 만도 한데 표정이 깊고 무거워 도무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다. 보름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손톱달처럼 눈을 내려뜨..

좋은 수필 2021.06.11

알밤/최민자

알밤/ 최 민 자 ‘밤을 깐다’라고 썼다가 ‘밤 껍질을 벗긴다’라고 고친다. ‘깐다’라는 말이 주는 동물적 어감이 낯설어서다. 이 쓸 데 없는 까탈. 요즘의 나는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 있다. 생체리듬이 저조해졌는지 행동은 게을러지고 생각은 과민해졌다.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저 밤톨들처럼. 복숭아나 사과 같은 과일은 향기와 빛깔로 사람을 유혹하고 상큼한 속살을 베어 먹히면서까지 씨를 퍼뜨리는 전략을 쓴다. 알밤은 아니다. 열매이면서 씨앗인 그들은 먹혔다 하면 끝장이어서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내어 줄 여지가 없다. 그 절박함이 자기보호 의지 같은, 견고한 고독을 강요하는가. 야물고 또랑또랑한 이 결실들은 헤프게 농익어 향기를 발산하지도, 풍만한 살빛으로 식..

좋은 수필 2021.06.10

돌매/류영택

돌매 / 류영택 콩콩 마늘을 찧는다. 아래층에 소리가 울릴까봐 사타구니에 백철절구를 끼고 마늘을 찧는다. 절굿공이에 빗맞았는지 메뚜기처럼 마늘한쪽이 절구를 타고 넘는다. 어디로 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손을 뻗는다. 겨우 손이 닿았지만 슬슬 짜증이 난다. 믹스기로 갈면 될 텐데 굳이 절구에 찧어달라는 아내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어 물끄러미 아내를 바라본다. 아내는 보채는 아이 보듯 두 눈을 치켜뜬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것 같다. 나는 반항이라도 하듯 쿵쿵 공이를 내리찧는다. "그게, 그렇게 힘들어요?" "믹스기로 갈면 편하잖소!" "찧는 것과 가는 게 같아요!" 아내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지만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아내 말마따나 불린 콩을 믹스기에 가는 것은 ..

좋은 수필 2021.06.09

또랑광대 / 김순경

또랑광대 / 김순경 광대는 연극이나 곡예, 판소리를 업으로 하는 예술인을 말한다. 소리광대는 창을 위주로 하는 소리광대, 아니리와 재담을 위주로 하는 아니리광대, 용모와 발림 등 연극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화초광대 등으로 나눈다. 그중에서 소리광대를 단연 으뜸으로 치고 아니리광대를 가장 낮게 평가한다. 소리광대는 갖추어야 할 요건이 있다. 신재효 선생은 광대가廣大歌에서 인물, 사설, 득음과 너름새를 들었다. 많은 관객을 상대하려면 무엇보다 인품부터 갖추어야 하고, 사설 내용을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충분한 성량으로 막힘없는 소리를 자유롭게 내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시각적인 효과도 낼 수 있어야 진정한 광대라고 했다. 이것은 지금도 소리꾼의 필수 요건으로 지켜지고 있다. 역량이 조금 부..

좋은 수필 2021.06.08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송이의 사랑 / 박월수 이웃집 할머니가 다녀가셨다.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릴 하시지 않는 분인데 단단히 벼르고 오신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일이라 우리도 적잖이 놀랐다. 시골살이를 하러 오기 전부터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마음 준비를 많이 했었다. 이사 와서는 집집이 떡도 나누고 음식을 만들어 경로당에도 가져다 드렸다. 어르신을 뵈면 살갑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도 인사성 바르다고 좋아들 하셨다. 그런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이웃의 핀잔을 받게 되었다. 청송으로 귀농을 결정하고 암수 강아지 한 쌍을 분양받았다. 오래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청이와 송이로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중 송이는 잘 생긴 수컷이다. 송이가 어느새 자라 어엿한 총각이 되었다. 애교라..

좋은 수필 2021.06.07

소금 / 김원순

소금 / 김원순 간수가 모조리 빠져나간 소금자루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언젠가 세면장 바닥을 바르고 남은 시멘트 포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처럼. 국산 천일염 100%라고 쓰인 붉은 글씨가 없었더라면 그것이 소금자루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며가며 나는, 바윗덩이 같은 소금자루를 발로 툭툭 차거나 옆구리를 쿡쿡 쑤시곤 한다. 조금씩 부숴 놓아야지 배추나 생선을 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틈 하나 없이 엉겨붙은 소금들이 은근히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세상이란 바닷물에 여태 부대끼며 살아왔지만 소금처럼 한데 엉겨서 살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 내 삶의 간수들이 나를 가둬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웃의 아픔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대했던 일이며, 남의 불행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했던 ..

좋은 수필 2021.06.06

덤 / 윤 영

덤 / 윤 영 여름 일요일 저녁이었다. 한 며칠 드난살이 떠나는 계집아이가 보따리 싸듯 짐을 챙겼다. 낯선 곳에선 어둠도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놋쇠물 같은 불빛들이 질펀한 창밖을 한참 본다. 풋잠이 들었다. 날이 밝자 매미 울음이 호텔을 무너뜨릴 기세다. 이 땅의 여름도 어지간하다. 연꽃으로 흐드러진 길을 달릴 때만 해도 천국인가 싶더니 웬걸. 아침부터 뛰고 달리고 줄서기에 지쳤다. 관광지가 아닌 선계로 가는 길이라더니 고생깨나 하겠다 싶어 맥이 풀린다. 풀린 맥을 다시 거두어들인 곳은 귀곡잔도와 유리잔도를 만난 후였다. 벼랑 끝에 선반을 매달아 뉜 길이 잔도다. 귀신도 곡소리를 하며 지나간다는 길.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린다. 깍아지른 절벽에 정신마저 혼미해질 때쯤 가이드가 턱 하니 질문 하나를 던졌다..

좋은 수필 2021.06.05

춘천에 가면/최지안

춘천에 가면 ​ 최지안 ​ 봄이 오는 춘천, 소양강에 가리라. 4월 어느 날. 아침부터 서둘러 서울-춘천 고속도로를 달리리라. 가지마다 탐스런 소양강댐 벚꽃을 보러. 봄바람에 꽃잎은 흩날리고 나는 휘파람 불며 가리라. 겨울이 오면 소양강에 가리라. 물보다 찬 공기가 습기를 머금은 나무에 입김을 불면 하얗게 꽃이 피는 상고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점점 커나가는 얼음 꽃. 겨울 아침, 전설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상고대를 보러 새벽잠 털고 졸린 눈 비벼가며 가리라. 강을 낀 조그만 마을. 그런 마을이 보인다면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리라. 강변 어디쯤에 낡은 나룻배가 있는지, 바위가 모여 있는 곳에 다닥다닥 고둥이 살고 있는지 찾아 볼 것이다. 마을은 강을 허리에 끼고 낮은 언덕과 교회를 껴안고 있을 ..

좋은 수필 2021.06.04

기적의 하나님/마경덕

기적의 하나님 마경덕 초등학교 때 윗집 아줌마가 내게 전해준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한 알의 씨, 돌밭 같은 내 가슴에 떨어졌어도 죽지 않고 시나브로 자라고 있었다. 바닷가 마을이라 무속신앙이 성행하고 무당들의 징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대나무에 깃발을 매달아둔 점집도 많았다. 미신을 믿던 어머니는 가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곤 했는데 밤새 무당의 주술에 맞춰 반복되는 징소리 장단을 자장가로 들으며 잠이 들었다. 무언가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이 잠을 덮치고 그런 날은 가위에 눌린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렸다. 태풍이 불면 머리를 산발한 바람이 집채만한 파도를 들어올렸다. 요동치는 바다를 보며 이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천둥이 치면 ..

좋은 수필 2021.06.04

사막에서 버티기 / 허창옥

사막에서 버티기 / 허창옥 그 여자는 키가 작다. 150cm나 될까한 작은 키에 오동통하다. 부스스한 파마머리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이지만 맑고 큰 눈이 빛나고 있어 예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사시사철 입고 있는 짙은 녹색 앞치마에는 노란 몸과 까만 눈, 갈색 귀를 가진 헝겊 곰이 아플리케로 붙어있다. 곰도 예쁘다 여자와 곰은 닮았다. 그 여자는 동구시장 한 모퉁이에서 야채노점을 하고 있다. 이불가게, 양품점, 그릇가게 등 불빛 환한 점포들 앞에서 길게 좌판을 늘어놓고 야채를 다듬고 있는 그 여자의 이름은 그냥 ‘훈’이네이다. 얼핏 거칠어 보이지만 함빡 웃으며 물건을 팔 때 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다. 그의 꿈은 버젓한 점포하나 마련해서 이불가게 주인처럼 수북이 쌓인 불건들 가운데에 떡하니 버티고 앉는 ..

좋은 수필 2021.06.03

냄비받침 변천사 / 안도현

냄비받침 변천사 / 안도현 밥그릇에다 국을 담을 수도 있고 국그릇에다 밥을 담을 수도 있다. 그러나 냄비받침에는 냄비만 올릴 수 있다. 사과를 깎아 올려놓을 수도 없고 과자를 담을 수도 없다. 그것이 냄비받침의 비애다. 주방용품 중에 제일 비천한 역할을 맡은 게 냄비받침이다. 평소에는 싱크대 구석에 웅크리거나 틈에 끼여 있다가 뜨거운 임자를 만날 때만 호출된다. 그것도 열을 받을 대로 받은 냄비만 말이다. 불기에 덴 자국은 그래서 필수다. 검은 상처를 문신처럼 몸에 새기고 산다. 어떤 냄비받침은 생김새가 험상궂기 그지없다. 조폭인가 싶은데 알고 보면 냄비의 똘마니다. 냄비받침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든 견디는 게 그의 삶이다.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콜라병 뚜껑을 철사로 꿰어 만든 냄비받침이 있었다. 강아..

좋은 수필 2021.05.31

발 도장/황미연

발 도장 / 황미연 무심코 보던 책 속의 한 문장이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다. 종일 그 생각에 발목이 흥건해질 때가 있다.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이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여든네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이다. 시간의 두께가 내려앉은 늙고 앙상한 손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자 맑은 소리가 공중으로 피어오른다. 입으로 뭔가를 주억거리는 표정이며 몸짓, 피아노 건반 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주름진 손은 참으로 아름답다. 보헤미안 출신인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하여 열두 살에 독주를 할 만큼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여든여덟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음악에 헌신한 순순한 영혼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

좋은 수필 2021.05.31

이별 연습 / 정재순

이별 연습 / 정재순 말간 햇살에 익어가는 들판을 달린다. 휘감아 도는 바람에도 오어사로 향하는 길에서도 가을은 물들어간다. 이 계절이 이울 즈음이면 딸은 내 곁을 떠나갈 것이다. 바로 앞에 널따란 연못이 이채롭다. 당대의 고승들이 수도하며 머무른 절집이어서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원효와 혜공선사가 죽어가는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 내기를 하다가 한 마리가 헤엄쳐 가는 것을 보고 서로 내 고기라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못 쪽으로 걸린 사찰 현판이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인다. 내겐 친구 같은 더 없는 딸이다. 나이에 비해 사리판단이 재바르고 명쾌해 의지가 많이 된다. 동생들이 말썽을 부려 힘겨워 할 때면 제 경험을 들려주면서 나를 다독여주곤 한다. 딸은 저만 생각지 않고 동생들의 장래를 염려 ..

좋은 수필 2021.05.31

길베/이고운

길베/이고운 여인이 붓을 풀고 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을 다 그렸나보다. 열두 폭 옥색 치마 자락에 복사물이 번진다. 누굴 만나러 여인은 저리도 사뿐히 가는가. 잔허리 선을 따라 술 익는 마을로 세월이 넘어가고 있다. 자욱한 연홍사軟紅紗 아래로 저녁 산이 묵향으로 내려앉는다. 오늘이 외할머니의 삼우제인데도 어머니는 병실에 누워 있다. 가슴이 답답다 하여 침대를 반쯤 일으켜드렸다. 심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급성 췌장염이 생긴 데다 평소에 아프던 곳들이 재발했으니 절대안정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생각나서 눕혀드리려니까 어머니가 힘없이 손을 저었다. 눈이 노을진 창에 젖어 있다. 아흔을 넘기신 외할머니는 노환으로 오래 누워계셨다. 그렇게 맑고 고우시더니 이승의 끈을 놓을 무렵에는 고원의 고사목 같았다. 저 ..

좋은 수필 2021.05.28

동전 남자/조문자

동전 남자 조 문 자 ‘동전’이란 말 속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 능력도 없으면서 무개만 차지한 데다 성가시다고 버릴 수도 없다. 보면 볼수록 이것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다. 해도 설핏 기우는데 동네 여자들이 골목에 모여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누군 턱 끝을 바짝 쳐들고 말한다. 남편 양복 드라이클리닝 맡기러 세탁소에 가다가 백만 원짜리 수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고. 누군 세탁기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오만 원짜리를 건졌다고. 누군 배춧잎 서너 장은 기본으로 남편 빨랫감을 뒤지면 나온다고. 은근슬쩍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사람 기를 죽인다. 나도 처음에는 그네들 속에 끼여 재갈재갈 옴팡진 수다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삼베바지 방귀 새어 나오듯 스리슬쩍 빠져나왔다. 그..

좋은 수필 2021.05.28

경주 감은사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경주 감은사터 -바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 박시윤 구절양장 추령을 넘으니 내리막길 끝에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세상이 나타날 것처럼 순하고 연한 땅이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느슨하고, 아직 남은 일이 있는지 손을 더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촘촘하다. 메마른 하천엔 이름 없는 돌들이 호기롭게 누웠다. 저기 코앞이 바다인데 굴러갈 내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 이것이 인생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 그러기에 오늘만큼은 조금 게을러도 괜찮다. ‘끼익’,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또 지나칠 뻔했다. 여전한 곳을 왜 매번 가늠하지 못하는지. 그만큼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오늘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팔았던 것도 같다. 감은사 터에 왔다. 우습게도 무심히 지나던 곳에 답이 있었..

좋은 수필 2021.05.27

유리로 만든 창/김현숙

유리로 만든 창 김현숙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휴일오후. 나는 버스 맨 뒤 칸 창가에 앉아 그 햇살을 삼키며, 털 고르는 고양이마냥 권태를 즐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국도변의 추루한 풍경은 재채기를 부를 만큼 건조했고, 그곳 사람들의 기름기 없는 일상은 부서질 듯 파삭했다. 버스가 신호에 잡혔고 [건너 다방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 주인의 말처럼 건너 순댓국집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 내 가슴팍에 안겨 이 사이에 낀 점심 찌꺼기를 후비적대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 위엔 인력소개소의 낡은 창문이 있고 그 틈으로 참말 비듬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나도 ..

좋은 수필 2021.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