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나이 오십이 넘어 소주 맛을 알게 되었다. 새벽녘에 내린 소낙비에 잠이 깨어 아무리 뒤척여도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부엌에 나와 냉장고에 든 소주 한 병을 꺼낸다. 기껏해야 마른 멸치 한 줌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안주의 전부지만, 이제 안주 없이도 술맛이 쓸 때와 달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멸치 대가리를 떼어내고 새까만 똥을 빼낸다. 멸치 똥을 쉽게 빼내려면 아가미 쪽에 이쑤시개를 넣고 아랫배 부분을 들어 올리듯 하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멸치 똥만 제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몰랐을 땐 멸치를 반으로 쪼개어 속에 든 새까만 똥을 긁어내느라 멸치 몸통이 부스러진 게 태반이었고 깔아놓은 신문지엔 멸치가루가 수북했다. 멸치의 어원은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데..

좋은 수필 2021.05.15

봄바람/한경희

봄바람 한경희 무르익은 봄이 흰 전시 벽을 휙휙 지나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여름으로 달음질을 친다. 다르면서도 같은, 고만고만한 화폭들이 지루해질 때쯤 한 청년이 인솔자에게 다가와 소곤거린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상큼하다. 청년은 어디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 귀 위로 짧게 쳐낸 윤기 나는 머리카락, 생기 있고 뚜렷한 이목구비, 반듯하고 넓은 어깨에 긴 팔과 뽀얀 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에 세련된 옷과 깨끗한 운동화 차림이다. 아름다움이란 ‘조화로운 상태’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전시회를 다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벌써 미술 기행이 실어다 준 봄바람에 푹 빠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청년의 뒤만 졸졸 따른다. 청년은 커다란 펜화 앞에 멈춰 섰다. 자목련이 ..

좋은 수필 2021.05.15

엄대/김옥한

엄대/김옥한 잠든 남편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마른논바닥 같은 그곳엔 구석구석 크고 작은 주름이 떼를 이루고 있다. 이마를 가로 지르는 주름과 눈 가의 잔주름들이 다투어 피어 있다. 마주볼 땐 몰랐는데 잠든 얼굴에서 더욱 선명하다. 어떤 주름은 분절음처럼 뚝뚝 끊기기도 했고 어떤 주름은 이랑처럼 골이 깊다. 언젠가 보았던 엄대 같다. 엄대는 옛날의 외상장부다. 반찬 가게나 푸줏간에서 외상 거래할 때 물건 값을 표시하는 길고 짧은 금을 새긴 막대기를 말한다. 엄대에다 들여놓은 물건의 분량만큼 금을 그어놓고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을 했다고 한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장부역할을 대신했다. 몇 해 전 여행길에 삼강주막에서 엄대를 보았다. 부엌은 물론 바깥벽까지 금을 그어 놓았다. 흙벽에 부지깽이로 그은 흔적..

좋은 수필 2021.05.15

누름돌/최원현

누름돌/최원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 있다. 세상을 사신 분들의 삶이 결코 나만 못한 분은 없다는 생각이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서가 아니다. 그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날들은 분명 오늘의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과 조건의 세상살이를 하셨다. 그런 속에서도 묵묵히 그 모든 어려움과 아픔을 감내하면서 지신의 몫을 아름답게 감당하셨던 것이다. 요즘의 나나 오늘의 상황을 살펴보아도 그분들보다 어렵다고는 할 수 없겠고, 특히 그분들이 처해 있던 시대는 지금에 비교도 할 수 없이 열악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대였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보다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엄격하게 당신들 스스로를 절제하고 희생하셨다. 그분들의 어느 한 삶도 결코 오늘의 우리만 못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저 잘났다는..

좋은 수필 2021.05.15

누름돌/정성려

누름돌/정성려 그런대로 아담하고 반질반질한 항아리 속에서 노란빛이 어린 오이지를 꺼냈다. 펄펄 뛰는 오이들을 사뿐히 눌러 진정시켜주던 누름돌을 들어내니, 쪼글쪼글해진 오이들이 제 몸에서 빠져나간 물에 동동 뜬다. 항아리 속의 오이는 볕이 들지 않은 음지에만 있어야 하기에 조금은 서먹하지만, 누름돌 무게로 숨을 죽이며 제 몸속 물을 토해내고, 간기가 스며들면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숙성되어 짜릿하고도 오독거리는 맛을 냈다. 이렇게 숙성된 오이를 맛깔스럽게 썰어 참기름을 치고, 갖은 양념을 넣어 무치면 그야말로 침이 절로 돌며 식욕을 돋운다. 그래서 오이지는 여름철 내내 우리 집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밑반찬으로 각광을 받는다. 오이지를 유독 우리 집 식구만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

좋은 수필 2021.05.15

소반/류재홍

소반/류재홍 나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왔다. 모태로부터 물려받은 강인한 의지와 묵직함을 자랑으로 여긴다. 더러 모질다는 소리도 듣는다. 산다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이던가. 내 안의 나보다 더 독해져야 할 때도 있느니, 이것이 4대째 쇠심줄처럼 살아남은 생의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소반(小盤)이란 이름으로 태어나던 날이 까마득하다. 보리가 제법 파랗게 살이 올랐을 때였다. 한 부인이 맏아들 혼사 때 쓸 것이라며 공방에 들렀다. 그 공방은 근방에서 꽤 소문난 집이었다. 목공은 다른 것들보다 달포나 더 씨름한 끝에 나를 완성했다. “백 년 묵은 귀목 통판을 그대로 쓴 놈이니 요긴하게 쓰일 것이오.” 그는 내가 아까운 듯 몇 번이나 쓰다듬다 건네주었다. 주인을 따라 집에 오던 날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앙..

좋은 수필 2021.05.15

빈집/류재홍

빈집/ 류재홍 녹슨 철문을 민다. ‘삐거덕’ 된소리를 낼 뿐 그만이다. 팔에 힘을 실어 밀어 제치자 그제야 무거운 몸을 비켜선다. 마당은 그새 풀밭이 다 되었다. 인기척에 놀란 잡초들의 수런거림에 집안으로 들어가려던 내가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자기들이 주인인양 기세가 대단하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태어나는 질긴 목숨일진대, 두 달 여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툇마루는 더욱 가관이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흙부스러기들을 잔뜩 안고 있다. 올려다보니 천정 한쪽이 허물어져 흙덩이 몇이 또 떨어질 기세다. 민망하여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닌 게야. 하기야 훈기도 없는 집에 무슨 낙으로 제 몫들을 하려고 들겠나. 살 비비며 눈 맞춤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생겨날 게 아닌가. ..

좋은 수필 2021.05.15

‘디귿’과 돌고 돌아 / 민명자

‘디귿’과 돌고 돌아 / 민명자 디귿, 너를 생각하면 ‘돌고 돌다’가 먼저 떠올라.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 했던가. 그런데 돌고 도는 게 어디 인생뿐이겠니? 지구도 돌고, 굴렁쇠도 돌지. 수레나 자전거나 자동차 바퀴도 돌고 돌아야 제구실을 하지. 가만, 생각해 보니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세월 따라 인심도 돌고 돌아. 디귿이 없으면 ‘돌다’도 없지. 오늘은 디귿, 너와 더불어 디귿의 나라를 돌고 돌아볼까? # 다 ‘다’, 모으고 흩트리며 마치는 힘이 있지. ‘다’는 ‘우리, 모두, 함께’와 친해. 이것도 모으고 저것도 다 모아. 아니, 모두 다 버리기도 해. 오늘은 우리, 모두, 다, 함께 모여 마음을 나눠볼까? 노래나 한바탕 불러볼까? 놀이동산에라도 가볼까? 아니야, 모두 다 흩어져서 제..

좋은 수필 2021.05.14

토렴 / 문경희

토렴 / 문경희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다는 함양땅 상림이다. 아직도 이곳은 사람보다 꽃과 나무와 새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이름 모를 풀들이 가녀린 목숨을 빼곡하게 꽂고 있다. 이따금 손 없는 바람에 멱살을 잡히기도 하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앉은자리를 지켜낸다. 개개의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를 우리는 숲이라 부른다. 숲의 구성원들은 경쾌한 팔분음표가 되는가 하면 묵직한 쉼표가 되기도 하며 웅장한 숲의 악장을 이끌고 나간다. 나서면 물러설 줄 알고, 취하면 버릴 줄도 아는 오래된 약속이 살아 있는 곳. 간만에 그들만의 세상에서 청정한 하루를 탁발해 볼 욕심으로 우중불사 달려왔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인간은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하는 족속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꼬집어 놓은 ..

좋은 수필 2021.05.14

각도/박지영

각도/박지영 주인보다 늠름한 지팡이가 초인종 없는 대문을 대신 두드린다. 여든 중반인 친정아버지 친구 분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느닷없는 의식불명으로 일주일가량 병원 신세를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신 게다. 관절염 환자인 엄마에게,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치매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의 간병은 무리였다. 그래서 환자에게 환자를 맡길 수는 없다는 판단 하에 잠시 동안 친정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던 터였다.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 없어 달려 나가 대문을 열어 드렸다. 녹슨 대문은 엄마 무릎을 닮았는지 여닫을 때마다 삐걱거린다. 삐걱, 그 여운의 말미쯤에 할아버지, 할머니 대여섯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신다. 당장 병원 신세를 지지는 않고 있을 뿐, 병문안이라면 가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익숙한 분들이다. 그 어려운 ..

좋은 수필 2021.05.14

조율/유현주

조율 / 유현주 TV채널을 돌리다‘국악한마당’과 마주쳤다. 비췻빛 한복을 입은 여자가 창을 하고 한편에 두루마기 차림의 남자가 장구를 치고 있다. 장구는 소리를 밀었다 당기고 때때로 튕겨주며 가락과 조화를 이룬다. 화면을 응시하다 나도 모르게 흐름 따라 손가락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이런 시간과 마주하면 한때 저 자리를 지키신 적이 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마치 수십 년 후에 찾아낸 일기장을 보는 듯 소중한 기억도 살아난다. 그중에 지금도 시골집 안방 선반에 놓여 있는 장구를 만들던 때는 더없이 특별하다. 내 바탕이며 정서의 원류가 된 날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본업은 농사꾼이지만 표면적인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당신께서 평생 업으로 여긴 것은 시조창(時調唱)이었고 동반되는 것이 장구였다. 농번기에는 피치..

좋은 수필 2021.05.14

물풀과 딱풀 / 허효남

물풀과 딱풀 / 허효남 월말이면 습관처럼 편지를 보낸다. 고작해야 작은 문학회의 월례회 안내장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게 번거롭고도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다. 풀로 회원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붙이다 보면 가끔씩은 받는 이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도 있고, 작품을 발표할 사람의 차례에는 새 글에 대한 기대로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도 한다. 끈적끈적한 풀로 봉투를 모두 붙이고 나면 내 마음마저 끈끈하게 동인들 곁에 다가간 것 같아 이 일은 늘 귀찮으면서도 즐겁기 그지없다. 어느 달엔가는 봉투를 붙이다가 풀이 다 되어버린 적도 있다. 슬리퍼를 신고 동네 문구점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하지만, 정작 풀은 사지도 못한 채 오히려 고민에 빠져 버렸다. 신랑각시처럼 나란히 붙은 물풀과 딱풀, 그 중 어느 것을 고를지 갈등이 된..

좋은 수필 2021.05.13

소금꽃/박월수

소금꽃/박월수 곰소의 여름은 짭짤하다. 곰소에서는 태양도 소금밥을 먹고 뜬다. 사는 일이 물에 물탄 듯 싱겁게 느껴질 때 나는 곰소로 간다. 폭양 아래서 소금꽃을 피우는 염부를 만나러 간다. 소금밭 물거울에 비친 그들 경건한 몸짓을 매만지러 간다. 염전 초입에서 허기에 발목이 잡혔다. 무한정 내어주는 간장게장 한 상 차림으로 점심을 먹는다. 등딱지 살은 비리고 짠데 뒤이어 오는 고소함이 앞의 맛을 덮고도 남을 만큼 관대한 맛이다. 다리 살은 입천장에 착 달라붙을 만큼 찰지다. 체면이란 녀석은 뉘집 빨랫줄에나 걸어두고 쩝쩝거리는 소리 곁들여 알뜰하게 발라 먹는다. 짭조름해진 입안을 함께 나온 꼬막 국물로 헹군다. 서해 한 귀퉁이가 딸려 들어온다. 향긋하니 시원하다. 등딱지에 쌀밥을 비벼 맨 김에 싸서 한 ..

좋은 수필 2021.05.13

그랭이질/김제숙

그랭이질 / 김제숙 여행 사진을 들여다본다. 유난히 기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많다. 기둥에 기대어 서 있는 내 모습은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안정감 있고 편안해 보인다. 기둥은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되는 구조물이다. 위의 하중을 받아서 아래의 바닥으로 적절하게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건물이 제대로 공간을 유지하고 서 있게 하는 장치이다.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기둥이 사용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다만 신석기 시대의 수혈 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수혈의 안 가장자리에 구멍을 파서 세우거나 바닥에 직접 세워서 윗부분의 구조물을 지탱하게 한 것이 기둥의 시작이라고 본다. 몇 해 전, 인생길에서 복병처럼 숨어있던 힘든 일을 만났다. 건강이라는 물리적인 기둥과 바른 마음이라는 ..

좋은 수필 2021.05.13

고딕과 명조/김현지

고딕과 명조 / 김현지 모니터 속 글자들이 내 처분만을 기다리는 듯 모여 있다. 크고 작은 글자들은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주어야 하기에 수십 가지의 서체들을 대입시켜 보지만 영 마뜩잖다. 한참을 이 옷, 저 옷으로 바꿔 입혀 보다가는 정해진 결론처럼 고딕과 명조로 마무리한다. 모두들 제 나름의 일을 하고 살아간다. 나는 글자들을 배열하고 다듬는 일을 한다.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던 시절에는 틀에 박힌 글자 모양만도 충분했던 때가 있었다. 컴퓨터가 보급되고 이름도 모양도 생소한 수많은 글자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고딕과 명조는 글자체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고딕은 제목 글자체로 탁월하다. 우직하고 곧은 획은 어떠한 역경에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어 본문을 이끌어 가기..

좋은 수필 2021.05.13

굳은살/김정임

굳은살/김정임 그는 내 무릎에 발을 올려놓고 잠이 들 었다. 남편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 억세게 보이는 발꿈치에는 온통 굳은살이다.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나중에 보게 되는 것이 발이 아닐까.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될 때쯤 발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그의 낯선 뒷모습을 보듯 가만히 그의 굳은살을 살펴본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단단하게 만들었을까. 잠시 낮잠에 빠져든 남편, 굳은살은 그의 발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말하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가슴 한구석에 층층이 굳은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잠든 그의 얼굴에 자리 잡은 굵은 주름이 지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아침이 되면 남편은 정확한 시계처럼 출근을 한다. 가끔 그의 구두를 닦을 때마다 구두 뒤축..

좋은 수필 2021.05.12

가자미 한 토막 / 정재순

가자미 한 토막 / 정재순 좋아하던 것이 갑자기 싫어질 때가 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입은 마음의 상처가 컸거나, 잘못을 저지른 걸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눈이 한쪽으로 몰린 생선을 멀리한다. 바다에서 나온 음식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지만, 납작하게 생긴 가자미는 이름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고개를 돌리게 된다. 옆 동네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정을 다녀왔다며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해 식욕이 돋았다. 식탁에는 금방 지어서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밥과 따끈한 미역국과 몇 가지의 반찬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었다. 친구는 가스렌지 불을 끄고 가자미조림을 쟁반에 수북이 담아왔다. 가자미를 보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몇 해 전, 만..

좋은 수필 2021.05.12

파장罷場과 노을 / 김원순

파장罷場과 노을 / 김원순 파장의 새벽은 늘 소리와 냄새가 연다. 갓 뽑아온 풋것들에 딸려 온 흙내, 풋내들, 붉은 고무물통 속의 잉어나 가물치들의 육탁과, 난장을 들썩이는 뻥튀기 소리, 제 살과 뼈를 바순 깨소금, 고춧가루 냄새도 이에 질세라 앞을 다툰다.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는 삶의 개펄이다. 난장 구석받이에서 펄펄 끓는 선지국 가마솥은 팔려나온 강아지, 닭 울음도 훌쳐서 푹 고으고 있다. 신산한 삶에 부대낀 속을 훑어줄 듯 시뻘건 관능미로 유혹하는 저 몸짓! 검은 가마솥이 척 걸쳐지는 장날은, 무싯날엔 볼 수 없는 정겹고 활기찬 한 폭의 풍속화다. 굳은살 박힌 생生들이 새벽부터 하나, 둘 샛강처럼 모여든 난장이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노동의 단내와, 밤새도록 부스럭대던 선잠도 따라와 난전을 편다. ..

좋은 수필 2021.05.12

궤적(軌跡) /윤남석

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좋은 수필 2021.05.10

그령 / 윤남석

그령 / 윤남석 【듬성듬성 돋은】 그령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긴다. 잔디 마당에 바소 모양 잎사귀가 어지간히 거슬리게 한다. 몇 번이고 뽑고 호미로 뿌리까지 캐냈지만, 잠자리 눈곱만 실뿌리라도 남아있으면 어김없이 살아나 성가시게 한다. 마당에는 그령뿐 아니라 질경이, 토끼풀, 새포아풀, 피막이풀, 바랭이 등이 여간 자드락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 잡초와의 긴 싸움에서 치러야만 잔디밭을 지켜낼 수 있다. 잡풀의 질긴 근성은 마치 불겅거리는 ​ 쇠심떠깨(힘줄이 섞여 있어 질긴 쇠고기) ​ 같다. 화사하거나 우아하지도 못해 눈 밖에 난 찬밥 신세지만, 은근히 시선 잡아끌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음달아 줄기를 키워내는 왕성함에 눈길이 온통 잡풀로 쏠리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그중에서도 질경이와..

좋은 수필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