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나이 오십이 넘어 소주 맛을 알게 되었다. 새벽녘에 내린 소낙비에 잠이 깨어 아무리 뒤척여도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부엌에 나와 냉장고에 든 소주 한 병을 꺼낸다. 기껏해야 마른 멸치 한 줌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안주의 전부지만, 이제 안주 없이도 술맛이 쓸 때와 달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멸치 대가리를 떼어내고 새까만 똥을 빼낸다. 멸치 똥을 쉽게 빼내려면 아가미 쪽에 이쑤시개를 넣고 아랫배 부분을 들어 올리듯 하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멸치 똥만 제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몰랐을 땐 멸치를 반으로 쪼개어 속에 든 새까만 똥을 긁어내느라 멸치 몸통이 부스러진 게 태반이었고 깔아놓은 신문지엔 멸치가루가 수북했다.
멸치의 어원은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광활한 바다에선 큰 물고기에게 쫓겨 다니느라 항상 주눅 들었을 테지만, 줏대도 없고 창시도 없고 배알도 없는 요즘 세상 사람들을 비꼬느라 오히려 작은 멸치를 뼈대 있는 가문이라 우스갯소리를 자주 한다. 보통 물고기의 위胃주머니를 가르면 그 물고기보다 작은 크기의 물고기가 들어있지만, 멸치는 배를 갈라도 작은 물고기가 나오지 않는다. 물고기가 아닌 플랑크톤을 먹기 때문이다. 이렇듯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에 있는 물고기가 멸치인 것이다.
지금은 불면증 환자의 안주거리로 오른 저 멸치의 전생도 어느 한때는 격정의 찰나가 지나갔으리라. 기껏 살아봐야 1년 반 정도라는데, 구부러진 등과 몸에 비해 유난히 큰 입은 비스듬히 경사져 있다. 비쩍 말라버린 몸과, 그 여린 뼈 속에 감히 소리 한번 못 내지르고 억눌렸던 비명이 숨었으리라. 생각해보니 저 새까만 똥은 그냥 단순한 똥이 아니라 멸치의 내장들이었다. 언뜻 보기에 검고, 맛도 씁쓰레하여 멸치 똥이라 여겼던 게다.
멸치 똥을 따며 문득 생각해 본다. 당신도 저 멸치의 내장처럼 어지간히 속을 태웠겠구나. 내장이 마르고 비틀어져 저리도 새카맣게 타버렸겠구나. 새벽별 보고 출근하여 거래처를 한 바퀴 쭉 돌아보고 자갈치 시장 모퉁이, 뜨거운 멸치 국물에 말아먹었던 국수 한 사발, 꽃무늬 몸빼 입은 국수집 할머니는 멸치내장도 빼지 않고 통째로 육수를 낸다고 했다. 약간 씁쓸해도 몸에 좋은 영양분이 엄청 많다나 뭐라나.
바싹 마른 멸치처럼 고달픈 삶을 살며 당신은 또 얼마나 많은 좌절을 맛보았을까. 단단한 벽에 박히는 못처럼 때로는 튕겨나고 때로는 온몸이 구부러지기도 하며 그 고통의 순간들을 견뎌내는 동안 애간장인들 어찌 녹아내리지 않았으랴.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해질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어느 한구석에 처박혀 버린 듯한 회의에 빠진 적도 많았을 테지. 그 숱한 날들의 상처들도 저녁에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의 조롱박처럼 달린 자식들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보며 조금씩 아물어 갔을 게다. 하지만 이미 멸치 똥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아픈 속을 끝끝내 보여주지 않았기에, 그 속 모르는 아내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작스런 이별을 맞이할 수밖에.
후두두둑! 소낙비가 내리는 새벽녘에 옆에 누운 사람에게 늘 하던 버릇처럼 "여보, 창 밖에 비가 엄청 내리네요."라고 소곤거리면, 비몽사몽간에도 "그러게 말이야. 웬 소낙비가 저리 내릴까."라며 대답해 주던 사람이 이젠 내 곁에 없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이토록 헛헛하고 적막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또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는 비로소 존재함을 깨닫는다. 여태껏 나를 지탱해 온 힘은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언제나 나를 따끗하게 품어주고 바라보아준 누군가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사람. 나보다 먼저 당도해버린 그 곳은 나중에 내가 혼자 가야할 먼 길이다. 너무 아프고 시린 슬픔도 먼발치에 떨어져 바라보면 그 농도가 조금은 옅어지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언제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들 속에 그와 나는 함께 묶여 있었다. 인간이란 우주적 종말이라는 불안한 시간 앞에 서 있는 유한한 존재들이고, 우리가 그토록 애써 살아가는 일상이란 새벽녘 빗소리에 잠깨어 소주 한 병을 놓고 안주삼아 '멸치 똥을 따는 일'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싶다.
불면증에 소주 몇 잔이 특효약이 될까마는 한 잔은 내가 마시고, 또 한 잔은 그냥 비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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