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촌감(寸感) /허석 말아 쥔 악보 속에 높은 음표들이 유희한다. 슬픔을 날것 그대로 토해내는 비탈리 ‘샤콘느’의 음계며 선율일까. 의뭉스러운 삶의 비정을 맛본 느낌표와 의문형의 기호들이 세상 앞에 단독자처럼 버티고 있다. 아니다. 잎도 없이 연둣빛 꽃망울을 머리에 이고 올라온 석산 꽃대공들이다. 미끈하고 탄력적이며 날렵한 몸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그대로이다. 건강에 좋다며 지인이 재배한 까만 쥐눈이콩을 선물 받았다. 크기는 좁쌀만 하지만 오동통하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콩나물 기르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혼자만의 살림에 항아리 들여놓기도 부담스러워 투명한 페트병을 이용해 조그만 시루 두 개를 만들었다. 성장기는 일여드레, 일차를 두고 기르면 사나흘에 한 번꼴로 콩나물을 맛보는 셈이다. 까만 비닐봉지를 우장처럼 발끝까지 씌우고 기도시간 지키듯 하루 서너 차례 물을 주는 것이 수행자의 의례처럼 되었다. 산다는 것은 눈뜨기부터일까.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새 흑진주 같은 껍질을 젖히고 세상과 호흡한다. 보드라운 잇몸에 젖니 돋아나듯 여린 싹눈이 배꼼 고개를 내민다. 탈피각을 뚫고나오는 영락없는 애벌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올챙이 꼬리 자라듯 고물고물 우윳빛 속살을 드러낸다. 한 점으로 발아한 몸뚱이가 싱그러운 물밥을 먹고 되새김질하면서 옆구리에 숨어있던 생장점을 간질였나 보다. 어찌된 일일까. 실지렁이처럼 뒤엉켜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물구나무서고, 처음에는 직립이 아니었다. 저게 어떻게 고개를 들고 일어설지 의구심이 앞선다. 과중한 물의 부력에 무게중심을 잃었을까. 깜깜한 밤길에 방향과 위치를 상실한 것은 아닐까. 어쩌다 물을 제 때 주지 못하면 뿌리가 억세어지고 굽어져 사방팔방 촘촘히 뻗어나가는 것을 본다.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리라. 허공이었을 테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해바라기할 빛도, 딛고 설 땅도 없었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길도 불빛도 없는 전도(顚倒), 그 두려움과 절망에서 살아남는 일이란 서로가 서로를 붙잡는 일이었을 것이다. 잔뿌리끼리 버팀목 역할을 하여 서로 보듬고, 부둥켜안고, 등받이하며 저들 힘으로 일어나 결국 울울창창한 숲 하나가 만들어진다. 잎도, 가지도, 꽃도 없이 순과 뿌리뿐이다. 햇빛의 엽록체보다 달빛의 백색체에 익숙한 결과이다. 색도 향도 없지만 청처짐한 낙숫물 소리, 청각 하나로 세상을 읽는다. 자양분은 광합성의 유기물이 아니라 오직 침묵 한 모숨과 물 한 모금이다. 군더더기 말이나 글이 필요 없는 불립문자처럼 세상을 향해 오로지 막대기처럼 곧은 몸 하나로 자신을 표현한다. 굴 속 같은 어둠속에서 어쩌면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은자(隱者)이고, 숨어서 내다보는 견자(見者)의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일까. 씨앗은 열매를 맺고 열매는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것이 만물의 이치일 테다. 신의 지문처럼 그만의 생애와 우주가 담겨있는 씨앗, 흘러내리는 물의 입김으로 싹을 틔우려 했을 때 그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모든 생명들이 그러하듯 초록의 싱싱한 대지에 오렌지 빛 태양을 쬐며 푸른 잎과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꿈을 간직하였을 것이다. 막상 세상은 온통 어둠의 장막으로 드리워져 보이지도,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혹해하지나 않았을까. 같은 콩깍지에서 자랐는데도 하나는 땅에서 자라 씨앗을 맺고 하나는 물에서 자라 나물이 된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운수소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고 신의 뜻이라면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꿈꾸는 석회동굴의 석순처럼 빛 하나 없이 젖은 몸으로만 살아야 하는 구조적인 숙명. 가난의 수용소에 내몰린 여린 군상들처럼 맨몸으로 일어서야 하는 사시랑이 육신. 어찌할 것인가. 장벽을 넘고 수렁에서 탈출하듯 오직 수직상승의 의지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웃자란 콩나물을 뽑고 나면 뒤늦게 자라는 것, 그제야 싹을 틔우는 것도 보인다. 마음 깊은 곳에 울혈 때문인지 어느 씨앗은 결국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도 있다. 우리네 사는 모습도 그러하리라. 작지만 단단한 존재로 어둠속에서 의연하고 담대하게 깨어나기도 하지만 조건과 환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상실과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다. 청국장을 띄울 때 발효와 부패는 종이 한 장의 차이인 것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살이다. 삶은 늘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불확실성을 내포한 풀기 어려운 방정식 같다. 때로는 신세타령도, 한번쯤 인생역전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주어진 자기 길에 순순히 응하는 자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그들 가슴으로 삶의 의미와 이유가 분명하게 발현하고 있음을 느낀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보다 잘 견뎌내는 사람,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잘 살아내는 사람들이 어쩌면 삶의 정답인지도 모른다. 얼큰한 콩나물국이 먹고 싶다. 덮어둔 까만 봉지를 조심스레 벗긴다. 밤새 올라온 콩나물들이 싱싱하면서도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이제 막 세상 옷을 갈아입은 새물내인지, 긴장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식은땀내인지도 모르겠다. 애써 힘들게 자란 생명인데 국거리를 위해 뿌리를 뚝뚝 자르다보니 마음한편에 가느다란 통증이 인다.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탁정(託情)이고 관계맺음인가 보다. 관심과 배려를 가지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란 결코 어려운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살아있는 정물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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