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한경희
무르익은 봄이 흰 전시 벽을 휙휙 지나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여름으로 달음질을 친다. 다르면서도 같은, 고만고만한 화폭들이 지루해질 때쯤 한 청년이 인솔자에게 다가와 소곤거린다. 이내 고개를 들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상큼하다.
청년은 어디 하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 귀 위로 짧게 쳐낸 윤기 나는 머리카락, 생기 있고 뚜렷한 이목구비, 반듯하고 넓은 어깨에 긴 팔과 뽀얀 손,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에 세련된 옷과 깨끗한 운동화 차림이다. 아름다움이란 ‘조화로운 상태’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전시회를 다 둘러보기도 전에 나는 벌써 미술 기행이 실어다 준 봄바람에 푹 빠져 버렸다. 나도 모르게 청년의 뒤만 졸졸 따른다.
청년은 커다란 펜화 앞에 멈춰 섰다. 자목련이 활짝 핀 시골 버스 정류장의 풍경이다. 전신주도 전선도 다 삼켜버린 찬란한 햇빛 속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그림 속 차창에 청년의 얼굴이 비친다. 내게도 저렇게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지. 나는 어느새 스물셋 그 봄날의 버스에 올라탄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버스엔 오직 그와 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깡마른 몸에 덥수룩한 수염, 잘라야 할 타이밍을 한참 넘긴 너저분한 머리, 두꺼운 안경은 낮은 콧대에 가까스로 걸쳐 있고, 금방이라도 좁고 구부정한 어깨를 들썩이며 기침을 해댈 것 같았다. 내 눈에 그는, 젊어서는 시인을 꿈꿨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초췌한 중년의 가장으로 보였다.
나는 그 ‘상처받은’ 영혼에게 홀리고 말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건 이성적 판단 너머의 불가사의며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다. 스물셋의 처녀가 꾀죄죄한 버스 기사에게 마음을 빼앗길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즈음 나는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첫 사회생활은 아무런 재미와 흥미, 기대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직장에 하루 여섯 번씩 버스를 갈아타고 출퇴근해야 했다. 나중엔 차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출퇴근의 고역 속에서도 내 청춘은 언제나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었나 보다.
나는 맨 뒷좌석에 자리 잡고 운전기사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오감도>의 이상이 환생한 것 같았다. 툭 건드리면 겨우 유지되고 있는 억눌린 꿈과 현실의 조화가 와르르 무너지지나 않을까 위태로워 보였다. 오로지 나만이 그의 내면을 엿본 듯 가슴이 아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한다. ‘당신의 상처를 보았어요. 이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함께 도망쳐요.’ 우리는 외딴 바닷가의 허름한 집에서 함께 지낸다. 그는 시를 쓰고 나는 집 앞에서 캐온 조개로 국을 끓인다. 마주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는 별이 촘촘히 박힌 해변에서 시를 읽어준다. 나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갯내음조차 향기롭다. 퍽, 갑자기 뒤통수가 뜨겁고 골이 흔들린다.
눈을 뜨기도 전에 두툼한 손이 내 머리채를 잡는다. 그가 고릴라 같은 여자를 말려보지만 소용없다. 이번엔 여자의 성난 손이 냅다 그의 멱살을 잡아챈다. 나는 달려들어 그 뚱뚱한 마녀에게서 그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는 대롱대롱 매달려 애원한다. ‘여보, 제발 저 여자는 건드리지 마.’ 이 말에 새로이 분이 솟아난 여자는 남편을 내동댕이치고 나를 노려본다. 마녀의 손놀림이 생각보다 빠르다. 머리로 수많은 돌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는 절규한다. ‘왜 널 이제서야 만났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마녀의 주먹과 발길질의 포화 속에서 오열하다가 뜨겁게 포옹한다. 달콤짭조름한 눈물이 서로의 볼을 타고 입안으로 흐르는 순간, 꽝, 퍽, 빠직! 커다란 바위가 내 앞통수를 강타한다. 순식간에 밤하늘의 별이 다 떨어져 눈앞에서 반짝인다.
한참 동안 멍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승객들이 여기저기 고꾸라져 있었다. 버스 바닥에 널브러진 나는 날아간 안경을 찾아 더듬거렸다. 머리가 터질 만큼 욱신거리고 이마가 몹시 쓰렸다. 운전대에 파묻힌 기사는 어깨만 움찔거렸다.
버스를 들이받은 트럭 기사가 뛰어 올라왔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나의 환생한 이상’도 다친 승객을 부축해 병원으로 보냈다. 나는 찌그러진 안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음 버스를 탔다. 지각이나 결근으로 상사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팔다리가 부러지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나를 보자마자 직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거울을 보니 눈두덩이 찢어지고 피딱지가 엉겨 있었다. 멍까지 번지고 푸르딩딩 부풀어 있는 꼴이라니.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락없이 ‘허락도 안 받고 내 남편과 연애를 꿈꿨냐.’고 패대기를 당한 모습이었다.
나는 버스 회사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안경값이라도 물어달라고 요구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하필 딱 그 찰나에 사고가 날 게 뭐람. 내 시시한 로맨스는 그렇게 끝이 났다.
청년은 이번에는 밝게 채색된 유화로 눈길을 돌린다. 분홍 앞치마를 두르고 딸기를 따는 여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빨간 과즙을 줄줄 흘리면서 한 입 베어 무는 여자, 막 바구니에 딸기를 다 채우고 허리를 펴는 여자, 씨알 굵은 딸기에 손을 뻗는 여자들이 화폭 가득 분주하다. 나는 그림보다 청년의 기색만 힐끔거리며 훔쳐본다. 한참을 서 있던 청년이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딸기밭의 여인들도 뒤돌아 청년을 본다. 봄바람에 분홍 앞치마가 들썩인다. 그녀들도 가는 봄이 아쉬운 모양이다.
모든 게 봄바람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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