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유리로 만든 창/김현숙

유리로 만든 창 김현숙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휴일오후. 나는 버스 맨 뒤 칸 창가에 앉아 그 햇살을 삼키며, 털 고르는 고양이마냥 권태를 즐겼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국도변의 추루한 풍경은 재채기를 부를 만큼 건조했고, 그곳 사람들의 기름기 없는 일상은 부서질 듯 파삭했다. 버스가 신호에 잡혔고 [건너 다방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 주인의 말처럼 건너 순댓국집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 내 가슴팍에 안겨 이 사이에 낀 점심 찌꺼기를 후비적대고 있는 중년의 남자, 그 위엔 인력소개소의 낡은 창문이 있고 그 틈으로 참말 비듬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 나도 ..

좋은 수필 2021.05.25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윤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윤영 꽃잎 빨아 쓰듯 젖은 날 많은 당신이 싫었습니다. 거름 자리마다 붉은 달리아 꽃을 심어놓고, 태풍에 쓰러진 꽃대나 묶어주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에 봉숭아가 흰 꽃을 피웠다고 ‘참하다, 참하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햇살 들지 않는 부엌 찬장 옆에 노란 감국 꽂아놓고 ‘곱다, 곱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차디찬 골방에 비틀린 가시선인장 들여놓고, 천 쪼가리 칭칭 동여 매주고 ‘봄날까지 잘 견뎌야 하느니라.’라던 당신의 읊조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고 문을 열어보면 수북하게 쌓인 거라고는 비료 포대나 나일론 끈 따위가 전부였습니다. 부뚜막에 꽝꽝 얼어붙은 행주, 뜨거운 물에 녹여보면 해진 런닝구 쪼가리였습니다. 겨울밤 윗목..

좋은 수필 2021.05.25

낙장불입/ 김현숙

낙장불입/ 김현숙 이미 패牌는 내 손을 떠났다. 8월 공산명월이 갔다. 던져진 팔 광光에 엄마가 눈독을 들였다. 아차, 엄마 앞에 놓인 패를 읽었지만 늦었다. 저 팔 광을 엄마가 가져간다면 이번 판은 요대로 끝이다. 광 박 제대로 쓰게 생겼다. 엄마는 당신 왼속에 거머쥔 패와 바닥에 깔린 패를 번갈아 훑으면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분명 저 손안에 기러기 떼 날아가는 공활한 하늘 있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는 엄마, 어떤 표정도 들키지 않겠다는 저 포커페이스 좀 보소. 두 눈을 공산명월에 꽂은 채 입을 쭉 내밀고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몸을 흔들고 계셨다. 나만 아는 표정이다. 당신 앞에 놓인 화투 패는 잘 못 읽어도 당신 속마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칠푼아, 어데 가서 고..

좋은 수필 2021.05.25

큰 나무가 서 있던 자리 / 은옥진

큰 나무가 서 있던 자리 / 은옥진 창문을 열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집 앞 빈터에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막 넘어지고 있다. “저 일을 어째.”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갔다. 함성 같기도 하고 통곡 같기도 한 소리에 이어 쿵, 와지끈하는 땅 흔들림이 이어졌다. “어머나!” 비명이 내 목구멍에서 막힌다. 저 큰 나무가 땅바닥에 누워서 사지를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러진 밑동에는 굵은 밧줄이 감겨 있고, 그보다 조금 위쪽은 또 하나의 밧줄로 매여 있다. 길게 늘어진 밧줄 끝은, 저만치서 부르릉거리고 있는 덤프트럭 꽁무니에 매달려있다. 저 괴물이 잡아당긴 것이 분명하다. 엇비슷하게 잘린 그루터기는 물기 어린 속살이 드러나 처참하고, 잔가지에 매..

좋은 수필 2021.05.24

광어와 도다리 / 최민자

광어와 도다리 / 최민자 오 억 오천만 년 전, 세상은 일테면 장님들의 나라였다. 캄브리아 대폭발로 진화의 포문이 열리기 전까지, 느리고 평화로웠던 저 식물적 시대는 눈의 탄생이라는 지구적 사건으로 시나브로 종결되어 버린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을 이용해 시각을 가동시키기 시작한 동물들은 생명의 문법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조용했던 행성이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포식과 피식의 격전지가 되어갔다. 먹히지 않기 위해 외피를 강화하거나 지느러미를 발달시키고, 사냥을 위해 힘센 앞발과 송곳니를 장착하는 등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공격과 방어, 양수겸장의 초병으로서 눈의 역할이 지대해졌다. 한번 켜진 빛 스위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눈이 다섯 개나 달린 녀석도 생겨났다..

좋은 수필 2021.05.24

찐빵이 익어가는 저녁 / 김만년

찐빵이 익어가는 저녁 / 김만년 오랜만에 오일장을 찾았다. 시장좌판이 풍성하다. 봄 산을 막 내려 온 두릅 취나물 다래 순들이 청향을 뽐내며 장돌뱅이들의 입맛을 돋운다. 갑자기 목안이 컬컬해진다. 노찬탁자에 걸터앉아 데친 두릅에 막걸리 한 사발 벌컥,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나를 꿰뚫어 보는 아내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아 참는다. 뱅뱅 돌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게 장돌뱅이 아닌가. 방임된 시간은 파장 무렵으로 유예해두기로 한다. 난전을 돌아 나오다가 찐빵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 엄마가 만든 찐빵 짱^^맛있어요!", 광고라면 이만한 광고가 또 있을까. 절로 미소가 번진다. 삐뚤삐뚤한 필체를 보면 필시 이집 코 흘리게 아이가 쓴 것이 분명하리라. 어쩌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밤새 엄마의..

좋은 수필 2021.05.22

장롱 속의 구두/최종희

장롱 속의 구두 최 종 희 휑한 기운이다. 주인을 떠나보낸 애절함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맴돈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지팡이가 마루 끝에 덩그마니 쓰러져 있다. 책장 속의 빛바랜 고서에서 묵은 냄새가 폴폴 날린다. 오래된 사진첩에 흑백의 젊은 아버지가 밝은 미소를 보낸다. 장롱 문을 연다. 아버지를 감싸고 있던 옷들이 슬픈 듯 축 늘어졌다. 장롱 깊숙한 곳의 유품을 정리하는 손끝에 둔탁한 물체 하나가 와 닿는다. 뜻밖에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새 구두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노년을 보냈다. 노인들의 기력은 예측이 어려운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의지하여 마실을 다녀오시곤 하였다. 그 기력마저 없어지자 과거인지 현재인지 오락가락하는 기억 속에서 대문 ..

좋은 수필 2021.05.21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 조정은 거기 콰지모도가 있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장으로 갔다. 석 달 만의 외출이었다. 햇살이 눈부셨다. 씩씩하게 걸으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어 걸음이 자꾸 허방을 짚었다. 십 수 년을 살아온 이 거리가 이렇게 낯설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낯설었다. 생선 가게를 기웃거리는데 누가 내 팔을 툭 쳤다. 전에 근처에서 비디오 가게를 하던 형님이었다. 그녀는 몇 년 전 이혼을 했는데, 그때 이미 가게마저 남편의 빚잔치로 넘어간 다음이라 갈 곳이 없었다. 한 겨울, 불도 들지 않는 우리 집 지하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말없이 사라졌다. 어디 가서 죽었으면 어째? 한동안 걱정을 많이 했다. “아니, 형님! 살아 있었수?” “그럼, 나야 잘 지내지.” 그녀는 ..

좋은 수필 2021.05.20

솔기/박종희

솔기 / 박종희 어머니가 또, 옷을 벗었다. 밤 도깨비같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혼자 숟가락질도 못 하시는 분이 단추가 달린 환자복을 술술 벗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노인병원의 간병사는 "그러니 이곳에 계시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건 괜찮은데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은 퍽 언짢은 표정이었다. 밤새 환자복과 실랑이하던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어 고민하다가 어머니가 벗어놓은 환자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뒤집힌 환자복의 솔기 부분이 내가 입어도 불편할 만큼 거칠었다. 수선이 필요없는 환자복이라 그런지 겨우 솔기를 박을 수 있을 만큼 좁은 시접이 휘갑치기도 안 된 채 뭉쳐있었다. 그제서야 옷을 벗는 어머니 심정..

좋은 수필 2021.05.20

생짜배기/박종희

생짜배기/박종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흙구덩이에서 꺼내놓은 투박하고 촌스러운 무를 보면 왠지 자꾸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자란 환경이 달라서인지 시댁에 가면 모든 게 낯설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시댁에 갔을 때였다. 저녁밥을 지으려고 부엌에 들어서다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앞에 펼쳐진 부엌은 아주 어렸을 적에나 봤음 직한 구식 부엌이었다. 순간, 새 사람을 격하게 반기듯 입이 찢어지라 웃는 것이 있었다. 마치, 쇠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기세등등한 아궁이를 보니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월의 더께로 윤기 잃은 가마솥과 넙데데한 나무 주걱 등, 부엌살림을 훑느라 잠깐 방심하는 사이 한쪽 발이 허방다리를 짚을뻔했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보니 아궁이 앞이 둥그스름하게 파여 있었..

좋은 수필 2021.05.20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

좋은 수필 2021.05.20

실수/나희덕

실수 / 나희덕 옛날 중국의 곽휘원(廓暉遠)이란 사람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답시는 이러했다. 벽사창에 기대어 당신의 글월을 받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임을 전하고자 하신 듯 하여이다. 그 답시를 받고 어리둥절해진 곽휘원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에게 쓴 의례적인 문안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옆에 있던 흰 종이를 편지인 줄 알고 잘못 넣어 보낸 것인 듯했다. 백지로 된 편지를 전해 받은 아내는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그 여백을 읽어내었다. 남편의 실수가 오히려 ..

좋은 수필 2021.05.20

참외는 참 외롭다/김서령

참외는 참 외롭다 / 김서령 참외의 '외'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외아들·외딴집 할 때의 그 '외'다. 영어로도 참외는 'me-lone'이다. “Are you lonesome tonight?” 할 때의 그 'lone'이니 역시 '혼자'라는 뜻이다. 한자의 외로울 고孤자에도 참외 하나瓜가 들어앉아 이쪽을 말갛게 건너다본다. 우리말과 영어, 한자를 만든 이들이 함께 모여 회의를 한 것도 아니련만 '혼자'라는 의미에 똑같이 '외'라는 과일을 사용한 건 희한한 일이다. '슬기'가 '슬기-롭다'가 되고 '지혜'가 '지혜-롭다'가 되는 우리말 구조를 따져보면 '외-롭다'는 '외'로부터 나온 게 확실하다. 그들은 왜 '외로움'이란 의미를 밭에 돋아 홀로 열매가 굵어가는 저 보잘것없는 초본식물로부터 만들어 냈을까. ..

좋은 수필 2021.05.20

약산은 없다 / 김서령

약산은 없다 / 김서령 ​ ​ 오늘 낮 백석의 시를 읽었다. 내게 백석의 시는 읽는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소설처럼 죽 페이지를 넘겨가는 방식이 아니고 시집을 눈앞에 두고 집히는 대로 뒤적거리다 맘 가는 아무 페이지나 코를 박고 들여다보다가 또 저만치 던져놓는 식이다. 그러니 읽는 게 아니라 코를 박는다거나 저만치 던져놓았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읽다말고 저리로 던져둔다는 건 시가 별 볼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읽기를 계속할 수 없을만큼 가슴 속이 뻑뻑하게 격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걸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시집을 저만치 던져놓게 된다. 이것도 노화의 일종인지 버거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꼭짓점까지 올라가지 않으려 애쓴다. 8부쯤에서 멈추려 애쓴다. 그러자면 읽던 책을 저만치 던져두는 ..

좋은 수필 2021.05.20

구월이 왔다 / 김서령

구월이 왔다 / 김서령 연일 하늘이 맑다. 바람이 연일 산들산들 잘도 분다. 땅에 돋아난 모든 식물들, 나무든 풀이든 농작물이든 땅에서 솟은 것들은 지금 물기가 살짝 걷히고 있다. 열매엔 단맛이 깊이 스미고 이파리는 슬쩍 시들고 알곡은 탱탱하게 익어간다. 그 섭리를 관장하는 것이 저 바람이다. 부드럽고 감미롭되 가차 없고 잔인한 저 바람. 햇살은 다만 무심한 기록자일 뿐이다. 물기를 잃는 양을 정교하게 기록할 의무를 배당받았다는 듯 진행과정을 땅 위에 또렷하게 새겨넣는다. 무심하게 밝게 완벽하게 뿌리 인근에서부터 시작되어 땅 위로 길게 드러눕는 나무와 풀의 그림자. 물론 그 그림자는 고정되지 않는다. 바람결을 따라서 함께 흔들린다. 흔들 흔들 흔들… 연일 세상이 온통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면서 나무들은 ..

좋은 수필 2021.05.20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20년 넘게 내가 사는 뜰에는 목련이 피었다. 해마다 꽃 피는 전과정을 지켜봤다. 책상 앞 바로 눈높이에 목련이 있어 눈을 들면 절로 목련과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차츰 볕이 달궈지는 어느 날, 가슴 안쪽에서 문득 수상한 동계가 감지되는 어느 날, 목련의 첫 꽃은 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 나는 흥분해서 4월 3일 혹은 4월 6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날을 기록했다.​ 20대엔 그저 좋기만 했다. 잎 없는 가지에서 커다란 목련을 불러내는 주체가 뭔지도 몰랐다. 무뚝뚝한 회색 가지 안에서 무심코 꽃이 툭 튀어 나오는 줄만 알았다. 내 기분이 좋으면 팝콘처럼 즐겁게 터지는군 싶었고, 내 심사가 사나우면 뭐가 좋은 세상이라고 철없이도 피어대는군 싶었..

좋은 수필 2021.05.20

부엌/김서령

부엌/김서령 어려서는 흙바닥에 물두멍이 있고 두 개의 아궁이에 가마솥과 동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큰 솥엔 밥을 하고 작은 솥엔 국을 끓인 후 큰 아궁이에는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작은 아궁이에는 석쇠를 올려 김을 굽거나 간고등어를 구웠다. 뜨겁고 어둡고 바쁜 부엌이었다. 나는 고작 열세 살에 그 부엌을 떠났다. 그 후 내 소유의 부엌을 여러 개 거치면서 밥상을 차렸고 혼인을 했고 아이를 길렀고 나이를 먹었다. 요즘도 나는 여전히 부엌을 서성거리며 밥상을 차린다. 아마 죽기 전까지 언제나 그럴 것이다. 쌀을 불리고 국거리를 다듬고 마늘을 다지고 양파 껍질을 까고 찌고 굽고 튀기고 삶으면서.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

좋은 수필 2021.05.20

좌판에 앉아 / 김서령

좌판에 앉아 / 김서령 연신내 시장 볕 안 드는 한 구석, 좌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곁에는 열살짜리 새순 같은 딸을 앉혀두고 비닐봉지에 덕지덕지 싼 시장 본 물건들은 한켠에 세워두었다. 숱한 사람들이 김칫국물을 흘린 조붓한 나무 판자 아래 뺑뺑 돌아가는 동그란 비닐의자를 곁들여둔 좌판, 거기 기대앉아 느긋하게 시장 안을 둘러보며, 이렇게나 세상과 분리된 나는 이제 막 내 곁을 스치고 달아나는 30대에 대한 조사를 쓰려고 한다. 30대, 그렇다. 스물몇이었을 땐 턱없이 청춘이 괴로웠고, 어디로 한발 제겨디딜 틈조차 없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그 혼란을 타넘고 나와 비로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서른을 넘긴 두 아이의 엄미가 되어 있었다. 아이 둘을 업고 안고 쩔쩔매다 그 아이가 "엄마 죄송해요. 친구..

좋은 수필 2021.05.20

반딧불이처럼/최윤정

반딧불이처럼/최윤정 슬픈 발광이다. 열흘 뒤면 풀숲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생의 마지막을 맞으리라. 우주 안에서 미천하기로는 저나 나나 매양 한가진데 별걱정 다 본다는 듯 반짝이는 엉덩이를 눈앞에 들이민다. 저수지 둑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겨우 찾아낸 녀석이건만 저를 쳐다보던 내 눈빛만 괜히 머쓱해진다. 생의 절정기를 맞은 반딧불이가 여름밤을 간질이고 있다. 어린 시절, 사내 녀석들은 반딧불이의 꽁지를 떼어내 이마에 문지르곤 했다. 번득이는 얼굴로 달려드는 여름밤의 시답잖은 귀신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사내아이들이 우-하고 달려오면 계집애들은 와-하고 도망가 주었다. 나는 놀이에 엮인 무언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얼굴에 짓이겨진 반딧불이가 가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해서 치를 떨며 도망 다녔다. 오랜..

좋은 수필 2021.05.20

이끼/최윤정

이끼 최윤정 죽은 게 아니다. 물기 사라진 몸으로 돌을 꽉 붙들고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새파랗게 생기 있던 몸피는 겨우내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그 안에는 낮게 엎드린 생명이 잠들어 있다. 가만히 귀를 대면 ‘바스락’하고 마른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이른 봄,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차분한 몸가짐으로 쬐고 있는 이끼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외가의 마루에 앉아 고서를 읽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운율에 맞추어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책을 읽으시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노년의 오수처럼 나른하고도 따뜻했다. 이끼는 원래 석부작에 붙인 풍란의 뿌리를 감싸던 것이었다. 석부작은 누가 봐도 꽃봉오리가 맺힌 풍란이 주(主)가 아니겠는가? 특별한 관리 없이 통풍과 분무만 열심히 해 주면 된다..

좋은 수필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