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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이끼/최윤정

에세이향기 2021. 5. 20. 10:24

이끼

 

최윤정

 

죽은 게 아니다. 물기 사라진 몸으로 돌을 꽉 붙들고서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새파랗게 생기 있던 몸피는 겨우내 누렇게 색이 바랬지만 그 안에는 낮게 엎드린 생명이 잠들어 있다. 가만히 귀를 대면 ‘바스락’하고 마른 숨소리가 들릴 것 같다. 이른 봄,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차분한 몸가짐으로 쬐고 있는 이끼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린 시절 외가의 마루에 앉아 고서를 읽고 계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운율에 맞추어 앞뒤로 천천히 몸을 흔들며 책을 읽으시던 외할머니의 목소리는 노년의 오수처럼 나른하고도 따뜻했다.

 

이끼는 원래 석부작에 붙인 풍란의 뿌리를 감싸던 것이었다. 석부작은 누가 봐도 꽃봉오리가 맺힌 풍란이 주(主)가 아니겠는가? 특별한 관리 없이 통풍과 분무만 열심히 해 주면 된다던 풍란은 내 손에 들어와서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풍란이 죽어버린 석부작은 그저 이끼 낀 돌에 불과했다. 인삼을 포장할 때나 쓰이는 것쯤으로 여겼던 나에게 이끼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집 안에 돌을 키울 이유는 없었기에 그것은 금방 현관의 신발장 아래로 내쳐졌다. 그리곤 까맣게 잊고 지냈다.

 

무심코 현관에 물건을 두러 나갔다가 시야의 한 귀퉁이가 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고 외곽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 차에 싣고 나가 던져버리려던 돌을 덮고 있던 이끼가 꽃을 피운 것이었다. 작은 알갱이가 오밀조밀 돋아 있는 이끼의 꽃은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구석진 자리에서 오랫동안 나의 무관심을 견디던 이끼는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버텼을까? 아니, 그는 우직한 성품답게 그간 무심했던 내게 앙심 한 번 품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현관 앞에서 가부좌하고 들락날락하는 식구들의 발을 보며 묵언수행을 했던 것이다. 사람이었다면 사리를 품고도 남음직했다.

 

돌을 베란다로 들여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끼에는 미시세계(微視世界)의 신비로움이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마음을 끌었다. 오밀조밀 들어찬 잎들은 깃털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원시의 꾸밈없는 신비로움을 품은 이끼는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였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화초 못지않게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저를 보잘것없는 것이라 여겼던 내게 보란 듯이 자신의 한 생을 파랗게 피워 올린 이끼에 나는 빠져들었다. 자신이 피어날 순간을 기다리며 침묵할 줄 아는 이끼가 석부작의 진짜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끼는 내성적인 식물이다. 자신을 내세우는 법 없이 조용하고 침착하다. 처음 뿌리내린 곳에서 하루에 한 걸음씩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스크럼을 짠다. 여린 듯한 식물성의 어깨동무는 생각보다 견고해서 섣불리 흐트러지지 않는다. 덩굴손처럼 서둘러 팔을 뻗느라 연약한 줄기가 허공에서 휘청거리는 일 따위는 없다. 조금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몸피를 키워가는 이끼 앞에서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됨됨이보다 터무니없이 높기만 했던 자존심으로 성급하게 웃자란 나의 줄기는 옅은 바람에도 자주 고개가 꺾였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 늘 후회가 많은 나에게 이끼는 과묵한 스승이 되어주었다. 이끼를 바라보는 동안 내가 고매한 난이나 화려한 장미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 더는 섭섭지 않아졌다.

 

등산을 하다 보면 숲이나 계곡에서 이끼로 뒤덮인 바위나 고사목을 볼 때가 있다. 이미 죽은 나무라도 이끼 옷을 입으면 초록의 싱그러움이 그득해 보인다. 숲에 들어찬 다른 어느 나무 못지않게 생명력을 뿜어낸다. 돌조차도 이끼를 덮고 있으면 살아 숨 쉬는 듯 생명 있는 것처럼 느껴져 함부로 밟을 수 없다. 생명 없는 것을 제 몸으로 감싸고 푸른 숨을 불어넣는 이끼는 경이롭다. 어쩌면 이끼는 숲의 조용한 세력가일지도 모른다. 원시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채 끈질긴 생명력으로 수억 년 동안 숲을 지켜온 숲지기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살짝 비켜간 자리, 이끼가 돌과 나무에 그늘의 한가로움을 속삭이고 있는 앞에 서면 저절로 가슴에 손이 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끼는 침묵의 화법을 즐긴다. 소란스럽지 않은 성격으로 그가 머무는 숲엔 새소리도 비껴 다가온다. 산허리를 한 바퀴 돌아온 메아리처럼 은은한 지저귐이 환청처럼 귀를 적신다. 불교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오는데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의 발등을 찍는다고 한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쓸데없는 말들로 스스로 발등을 찍어 왔던가. 말 없는 이끼 앞에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켠다. 이끼가 뿜어내는 습한 기운은 무겁지 않아 청량하다. 도회지의 콘크리트 숲을 헤매느라 바싹 마른 마음으로 작은 부딪힘에도 쉽게 바스러지던 나였다. 그런 내 머리와 몸을 숲의 촉촉한 공기가 가득 에운다.

 

살펴보면 우리가 사는 어디든 이끼가 있다. 버스정류장의 기둥아래에도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끼가 바닥을 덮으며 살고 있다. 벤치의 다리, 가로수의 그늘진 곳, 골목의 담벼락아래도 이끼는 있다.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데도 묵묵히 이끼는 이끼의 삶을 산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그가 있다. 우리 집 베란다의 이끼는 돌 하나를 감싸고 앉아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한 땀씩 수를 놓듯 작은 돌 하나를 정복한 그는 혹독한 겨울을 의연하게 견뎌내고 새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의 곁에 앉아 눈을 감는다.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는 환한 온기가 이끼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그가 꾸는 꿈일까? 내 앞에 펼쳐지는 초록의 융단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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