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유리로 만든 창/김현숙

에세이향기 2021. 5. 25. 04:56

유리로 만든 창

 

                                                                       김현숙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휴일오후나는 버스 맨 뒤 칸 창가에 앉아 그 햇살을 삼키며털 고르는 고양이마냥 권태를 즐겼다차창 밖으로 펼쳐진 국도변의 추루한 풍경은 재채기를 부를 만큼 건조했고그곳 사람들의 기름기 없는 일상은 부서질 듯 파삭했다.

 

  버스가 신호에 잡혔고 [건너 다방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그 위엔(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 주인의 말처럼 건너 순댓국집 유리창에 내가 비쳤다내 가슴팍에 안겨 이 사이에 낀 점심 찌꺼기를 후비적대고 있는 중년의 남자그 위엔 인력소개소의 낡은 창문이 있고 그 틈으로 참말 비듬 같은 햇살이 쏟아졌다나도 그 남자의 입 근처에 입술을 포개놓고 혀끝을 굴려가며 점심밥 찌꺼기를 훑었다.

 

  잘강잘강 뭔가를 씹으며 연신 두리번대던 내 앞의 여자가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그 짜증 섞인 얼굴이 창 안으로 쑥 들어오면서 건너 사진관 유리창에 여자의 옆얼굴이 비쳤다마치 물색없는 시어머니처럼궁색한 모양새로 가족사진 틈에 끼여 앉았다하지만 두 눈을 내려 깔고 한 곳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표정에는 걱정이 묻어있었다잘강대던 입을 꾹 다문 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만 가지 사연이 담긴 아주머니만의 흑백사진 한 장이 사진관 진열장에 새로 하나 생겼다.

 

  버스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세로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으로 눈을 돌려낯선 이들의 삶을 곁눈질 하고 있었다머리를 유리창 가까이에 대고 면밀히 살피는 모습으로아니면 눈길만 돌린 채 삐딱한 시선으로자신이 속해 있는 버스 내부와 차창너머 세계가 겹쳐지는 그 찰나를 함께 나누었다편의점 창가에 서서 즉석복권을 긁고 있는 외국인과 이마를 맞대고 앉은 아저씨횟집 텅 빈 수족관 속에 한 쪽 어깨를 집어넣은 채 잠이 든 학생… 물때 낀 수족관 벽에 청춘의 고단함이 같이 들러붙어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투명한 유리면 안에 서로의 몸을 포개고 생각을 얹어놓고 있었다우리의 삶은 그렇게 겹쳐져 가는 것인가 보다건너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초상(肖像)과 그 상에 어른거리는 창밖의 수많은 사정들은 결코 내 삶과 별개일 수 없다는 듯서로에게 깃들면서 이어졌다.

 

  지난겨울 나는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지금처럼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염습실의 안과 밖을 삶과 죽음으로 극명하게 가르고 있는 유리로 만든 창’ 하나그 뚜렷한 차단만큼 그곳은 냉정하고 차가웠다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듯 이생과 피안의 분리대가 되어 우리를 가로막았다.

 

  어디가 차안(此岸)이며어디가 나락인지… 나와 아버지가 있는 두 세계가 바뀐 듯 보였다아버지는 눈부신 불빛아래 흰 명주로 몸을 감싼 채 하얀 강보가 깔린 침상에 누워있었다살아생전 무섭던 얼굴은 다 어디가고 한없이 평안한 모습이었다외로움과 두려움에 이지러졌던 당신 삶을 구김살 없이 펴놓고 계셨다그곳엔 근심도 눈물도 없었다.

 

  비상구 표시등만 켜진 어두운 대기실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지고 일그러져있었다내가 서 있는 곳이다시커먼 상복에 묻은 죄는 털어도 비벼도 떨어지지 않고 복인(服人)을 애끓게 했다유리벽을 두들기며 부셔버릴 듯 덤벼들어도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다아버지의 주검을 쓸고 어루만지는 내 손길은 차가운 유리에 서러운 지문만 남길 뿐가닿지도 더는 만져 볼 수도 없다눈으로 보고 있지만 내 뜻대로 닿을 수 없는 세계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미 약수(弱水어디쯤을 건너 서천(逝川)으로 가고계실 테지나뭇잎도기러기 깃털도 그 약수 위에 떨어지면 이내 가라앉고 만다는데 아버지의 삭정이 같은 저 몸을 어쩌나제 아무리 오열과 통한으로 때려 봐도 내 눈물로는 그 유리벽을 깰 수 없다아버지를 건질 수 없다.

 

  얇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나는 아버지와 가슴을 포개고 있다당신 품속에서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나를아버지는 하얀 강보로 싸안고 달래셨다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겹쳐져있었다.

 

  오늘 버스 창밖으로 언뜻언뜻 보인 얼굴들은삶의 변곡점마다 걸음 폭을 줄이고 함께 걷는 법을 일깨워준 무언의 가르침이었다차창에 깃든 모습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삶은 겹쳐져 존재하는 어떤 풍경일 것이다그런 점에서 삶과 죽음타인과 나시간과 시간 사이에 놓인 유리창은 와 나의 외부가 만나는 공유점일지 모른다그것은 창 저쪽을 바라보는 나의 사적인 욕망과 공적인 의식이 같이 들어앉는 자리다그래서 내 존재만을 담아내고 되비추는 거울과는 사뭇 다르다지금 막 내 옆을 스쳐간 어린아이를 보면서 귀엽다라고 생각했다면그 순간 이미 그 아이와 나는 겹쳐진 것이다.

 

*약수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 속의 강.

한 번 건너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