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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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동전 남자/조문자

에세이향기 2021. 5. 28. 15:22

동전 남자

 

조 문 자

 

‘동전’이란 말 속에서는 가난의 냄새가 난다. 능력도 없으면서 무개만 차지한 데다 성가시다고 버릴 수도 없다. 보면 볼수록 이것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다.

해도 설핏 기우는데 동네 여자들이 골목에 모여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누군 턱 끝을 바짝 쳐들고 말한다. 남편 양복 드라이클리닝 맡기러 세탁소에 가다가 백만 원짜리 수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고. 누군 세탁기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오만 원짜리를 건졌다고. 누군 배춧잎 서너 장은 기본으로 남편 빨랫감을 뒤지면 나온다고. 은근슬쩍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사람 기를 죽인다.

나도 처음에는 그네들 속에 끼여 재갈재갈 옴팡진 수다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삼베바지 방귀 새어 나오듯 스리슬쩍 빠져나왔다.

그 남자에게선 언제나 팔랑대는 동전 소리가 난다. 오백 원짜리, 백 원짜리, 심지어 십 원짜리까지.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뒨지 쉽사리 구분이 안 되는 동전처럼 그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뒤통수까지 둥글납작하다. 하나뿐인 아들도 두루뭉술하여 두 남자를 보고 있으면 쿡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를 ‘동전 남자’라 부른다. 부를 때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지는 동전과 남자를 조금 떼어서 불러야 제 맛이다.

그의 옷을 챙기다보면 동전이 방바닥으로 뚝 떨어져 떼구루루 굴러간다. 그러면 나는 으레 관자놀이가 실룩거린. 흥, 코웃음을 치며 동전을 주워 플라스틱 통으로 던져버린다. ‘쨍~’ 별것도 아닌 것이 쇳소리만 되바라진다.

동전 통을 보며 진저리를 친다. 아무리 동전이 모여 차고 넘친들 은행으로 가져가 지폐로 바꾸는 칠십 년대식 새마을 운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낯간지럽게 동전 가지고 놀진 않으리라. 어떻게 제거해 버릴까 궁리 중이다. 동전이 가득 차면 누구에게 그냥 줘버릴 테다. 기하급수적으로 모인다 한들 동전은 동전일 뿐이다. 동전 통을 보고 있다가 ‘이것도 어딘데 뭐, 괜찮아.’ 자위해 보려하지만 어쩐지 쩨쩨하다. 내가 노리는 건 짤랑대 동전이 아니라 지갑 속 지폐이다. 나를 제일 열 받게 하는 것이 동전 남자 지갑 속이다. 남은 열 받는데 열 받지 않은 동전 남자를 보면 그만 또 열을 받는다.

“당신은 동전이 잘 어울려.”

그를 보면서 연탄불 위에서 바지지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말을 비비 꼬아 걸고 넘어진다. 스멀스멀 은밀하게 통쾌하다. 동전 남자는 말뜻을 못 알아듣는 건지 소갈머리가 없는 건지 이쪽 귀에서 저쪽 귀로 핑퐁 알 치듯 신 방귀 같은 웃음만 날릴 뿐이다.

그는 온 세상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여도 분발하지 않고 온 세상 사람이 자기를 헐뜯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자신과 세상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태연해 보이지만 남의 말에 급급하지만 않을 뿐 불혹의 자세는 아니다.

침대 위에도, 책상 위에도, 소파 위에도 아니 앞뜰에도, 뒤뜰에도 동전은 잘못 배달된 편지처럼 굴러다닌다. 아무 데나 비집고 들어와 누워 있다. 도대체 꼴도 보기 싫은 동전은 우리 집 여기저기서 나를 약 올리기 작전이라도 하는 듯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어 부아를 돋운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우리의 가난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동전 때문인 것 같다. 볼 때마다 날렵하게 달려가 질끈 밟아버리든지 구둣발로 질근질근 문질러버리고 싶다. 마음은 그렇지만 돌아서서 줍는다. 마트에 가면 당장 필요한 게 이놈이니까.

나뭇잎도 축 늘어진 여름이었다. 동전 남자가 어깨를 버팅기며 불쑥 흰 봉투를 내밀었다. 덥석 받아 들고 설왕설래하다가 입술을 모아 봉투 속을 훅 불어 보았다. 지폐가 들어 있었다. 신사임당이었다. 가슴이 덜덜 떨렸다. 사층에서 중고컴퓨터 쉰 대를 아래층까지 내려다 놓고 받아 온 일당이라 했다. 옷이라도 사 입으라는 것이다.

동전 남자의 까무잡잡한 얼굴이 사과처럼 시뻘겋다. 흰 이를 드러내며 소년처럼 웃더니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리다가 양동이로 물을 끼얹은 듯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본 순간 그만 기가 막혔다.

“나라고 만날 동전만 딸랑거리는 감?”

내 입을 봉해 놓은 말에서도 땀이 배어났다. 동그스름한 얼굴이 무쇠솥보다 커 보였다.

무지개 바큇살 함께 타고 혈기 방장한 청년에서 배릿한 향이 나는 중년으로 인생의 맛이 나는 노년으로 접어든 세월이다.

아들을 낳고 기르며 애증과 고락을 함께했다. 수더분하게 주름진 그의 얼굴은 두 번 세 번 우려 마시는 녹차 맛처럼 아무리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다. 걸핏하면 동전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짤랑짤랑 흔들어대는 아내에게 그는 가장으로서 권위를 잡고 싶었을까. 이런 전근대적 순애보라니. 가슴에서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뭉쳐졌다. 내가 싸구려로 보였다. 전철에서 어쩌다 빈자리라도 생기면 자리를 차지하려고 핸드백부터 멀리서 휙 던져놓고 보는 펑퍼짐하고 뻔뻔한 대한민국 아줌마였다.

동전 남자는 퇴직자다. 우리는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생활이다. 새벽이 목화송이처럼 창가에 피어나면 노을이 능선에 걸릴 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한다. 누가 보아주는 이 없어도 저마다 자신의 생을 거뜬히 살아 내는 잡초를 보며 생명의 저력을 깨닫는다. 고작 몇십 년 살면서 영원을 말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

동전은 어쩔 작정으로 저리 동글동글한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다. 세상을 저리 동그스름히 보듬을 수 있다면 어떤 적인들 감히 덤빌 수 있겠는가. 조금만 동전처럼 각을 세우지 않는다면 인간관계도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건 날뛰고 버둥거려 봐야 한 주먹의 동전이라고 플라스틱 통에 모여 있는 동전들이 아우성을 치며 대변하는 것 같다. 이태백은 마음이 흔들리면 술을 한잔했다지만 나는 마음이 흔들리면 동전을 바라본다. 내가 넘어서야 할 벽은 가난한 생활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