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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이별 연습 / 정재순

에세이향기 2021. 5. 31. 11:36

이별 연습 / 정재순

말간 햇살에 익어가는 들판을 달린다. 휘감아 도는 바람에도 오어사로 향하는 길에서도 가을은 물들어간다. 이 계절이 이울 즈음이면 딸은 내 곁을 떠나갈 것이다.

바로 앞에 널따란 연못이 이채롭다. 당대의 고승들이 수도하며 머무른 절집이어서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다. 원효와 혜공선사가 죽어가는 물고기를 살리는 법력 내기를 하다가 한 마리가 헤엄쳐 가는 것을 보고 서로 내 고기라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못 쪽으로 걸린 사찰 현판이 마치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살아 움직인다.

내겐 친구 같은 더 없는 딸이다. 나이에 비해 사리판단이 재바르고 명쾌해 의지가 많이 된다. 동생들이 말썽을 부려 힘겨워 할 때면 제 경험을 들려주면서 나를 다독여주곤 한다. 딸은 저만 생각지 않고 동생들의 장래를 염려 하는가 하면, 또 느닷없이 엄마, 아빠가 건강하게 곁에 있어서 고맙다는 말로 빈 마음을 데워 주기도 한다. 이런 아이가 떠나고 없는 빈자리의 허전함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

대웅전의 빛바랜 단청과 꽃 창살에 천년의 세월이 묻어난다. 누런 소가 흰 소로 되어가는 모습을 그려 놓은 벽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수도 과정을 그려 놓은 심우도다. 소띠인 딸은 어릴 적에 말이 늦어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발음 '소'가 잘 되지 않아 '토' 라고 했던 게 생각나 피식 웃는다. 건너다본 아이도 웃고 있다.

맛있는 걸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이고 싶다더니 딱 그랬다. 딸은 언젠가부터 우리 집 식탁에 맛난 반찬이 올라오면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그런 딸 앞에서 남편은 심통을 부렸다. 아빠를 불러대던 아이의 입이 오빠라는 호칭에 더 익숙해지자 마치 딸을 도둑맞은 표정을 지었다. 애써 서운함을 감추려는 그를 보면서 마음이 다 짠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암자에 눈길이 머문다. 가파른 어귀에서는 둘러진 밧줄을 잡고 오르니 한결 수월하다. 맏이인 딸은 여간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려 든다. 많이 벅찰 땐 혼자 끌어안고 견디지 말고 엄마에게 손을 내밀면 기꺼이 밧줄이 되어 주겠다고 이른다. 녀석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면서 갑자기 울컥한다.

살다보면 인생이 결코 달콤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불당에 든 어미의 마음은 딸의 앞날이 달콤한 시간은 길고 고통은 잠깐이기를 두 손 모은다. 사방 기둥에 나 있는 코끼리 전각을 돌아보며 부디 아이가 언제나 꽃같이 피고 가을 달처럼 밝기를 빈다.

출렁다리에 서니 지난 사월이 생각나 벌써 눈은 연못에 가 있다. 벚꽃 등불이 환하던 그날은 꽃 멀미가 유난하였다. 한 편의 시를 펼쳐 놓은 듯 연분홍 꽃잎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간혹 꽃잎이 속눈썹이나 뺨에 사뿐 앉았다가는 사라지기도 했다.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하는 광경에 그만 눈가마저 젖었던 그날의 기억이 하도 선명하여 딸과 여기에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가을빛이 완연한 산이 잔잔한 연못에 그대로 비친다.

우리는 흔들흔들 장난치며 걷는다. 녀석의 생글거리는 눈웃음 사이로 어릴 적 모습이 겹쳐진다. 연년생으로 동생을 보아서 그랬을까. 이미 말라붙은 깨알만 한 딱지를 호 해달라며 애정과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엄마의 사랑을 나눠 갖는 게 싫었던지 걸핏하면 ‘내꺼’ 란 말을 앞세웠다. 하여 아이가 유치원 다닐 즈음 맘이 몹시 아렸다. 아기나 다름없는 세 살짜리 녀석을 다 큰 애 취급을 하고 어리광을 받아주지 못했던 게 밟혔다. 자기애가 강해 결혼하면 어찌 살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짝을 만나 자신을 낮추고 상대에게 맞추려 애쓰는 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다.

둘레 길이 시작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다’ 는 팻말을 읽으며 감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그 길에서 만난 벚나무는 하늘을 보고 서 있는 게 아니라 허리가 거의 땅에 닿으려 한다. 저 몸으로 버티려면 상당한 고통이 따를 텐데, 벚나무는 비스듬한 산모퉁이에서 비와 바람을 이겨낸다. 사월을 맞이하고 또 연분홍 꽃잎들을 끝없이 피웠던 것이다. 딸은 비바람 속에 모진 세월과 맞서온 벚나무를 한참 동안 응시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그네들 앞에서 녀석이 숙연해진다.

뱃속에서 열 달, 그리고 스무 여덟 해를 함께 한 딸을 시집보내려니 만감이 깃든다. 아쉬움보단 걱정이 먼저다. 둘의 애정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수십 년을 달리 살았으므로, 나와 다르다는 것부터 인정해야만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주고도 또 주고픈 연심을 품어 부디 서로를 웃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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