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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에세이향기 2021. 5. 20. 10:37

꽃구경에도 윤리가 있다/김서령

20년 넘게 내가 사는 뜰에는 목련이 피었다. 해마다 꽃 피는 전과정을 지켜봤다. 책상 앞 바로 눈높이에 목련이 있어 눈을 들면 절로 목련과 마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울이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차츰 볕이 달궈지는 어느 날, 가슴 안쪽에서 문득 수상한 동계가 감지되는 어느 날, 목련의 첫 꽃은 툭 소리를 내며 터진다. 나는 흥분해서 4월 3일 혹은 4월 6일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날을 기록했다.​

20대엔 그저 좋기만 했다. 잎 없는 가지에서 커다란 목련을 불러내는 주체가 뭔지도 몰랐다. 무뚝뚝한 회색 가지 안에서 무심코 꽃이 툭 튀어 나오는 줄만 알았다. 내 기분이 좋으면 팝콘처럼 즐겁게 터지는군 싶었고, 내 심사가 사나우면 뭐가 좋은 세상이라고 철없이도 피어대는군 싶었다. ​
내 아니 스물여섯에서 서른여섯에서 마흔여섯이 됐다. 목련은 해마다 피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열매가 아니라 꽃만 피우면 임무 끝이니 게으름을 피울 핑계가 없었을까. 그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고 죽은 강아지를 나무 아래 묻었다. 그래 그런지 꽃은 밥사발보다 커졌다. 요즘 밥 먹는 아잘찮은 밥공기가 아니라 내 어린 날 일꾼 밥을 퍼주던 두터운 사기사발보다 더 컸다는 말이다.
​ 해마다 꽃을 내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개화의 순간을 싱겁거나 실없다고 여기는 마음은 상대적으로 줄어 갔다. 그러다 알게 됐다. 목련은 내가 기록하는 그날이 아니라 석 달 전부터 아니 여섯 달 전부터 이미 꽃을 배고 있었다는 걸. 꽃피는 날은 그 밴 꽃을 날마다 조금씩 키워 드디어 해산하는 날이란 걸. 4월이 아니라 3월 초부터 목련은 매일 기쁨과 고통을 반복하며 제가 만든 세상을 조금씩 들이미는 진통을 시작한다는 것을.​
꽃피는 순간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까. 그토록 무표정하고 고집스럽게 추위 속에서 꽃의 아기를 보호하던 겨울 눈, 추하다고 할 만하게 털이 숭숭하고 거칠고 딱딱하던 그 회색껍질이 맨 처음 땅에 툭 떨어지는 소리를 나는 봄마다 책상 앞에 앉아 듣는다. 때로 우박처럼 한꺼번에 두두둑 떨어지기도 한다. 봄밤의 장엄하고 흐드러진 음향이다. 흐드러진 생명의 음향이되 죽음의 음향이다.​
생살을 찢으며 아이를 낳아본 어미인 내게, 명백히 이제 죽는구나 싶은 순간을 맛보았던 내게, 양다리 사이로 물컹하며 바닷물 같은 핏덩어리가 빠져나가던 절대 시간을 경험했던 내게 그 소리는 물질이 다른 물질에 부딪치는 객관음향일 수가 없다. 공포와 환희의 그보다 큰 무상감이 둥그렇게 구름 이루던 시간, 그 둥그런 감각이 목련의 겨울눈 깍지가 마당 위로 탁탁 떨어지는 봄날 새벽 내게 서늘하게 다시 찾아온다. 소리 안에 담긴 꽃피우는 놈의 불안과 공포와 환희를 낱낱이 헤아려낼 듯 나는 책상 앞에 곧추 앉아 있다. 우주가 둥그렇게 나와 목련 주변을 성근 원으로 감싼다. ​
저 목련의 거무튀튀한 겨울눈이 정반대의 빛깔을 제 껍질 안에 숨겨 두고 있다는 것. 그것은 해마다 확인해도 번번이 경악할 만한 반전이다. 설계자의 각본엔 봄이 세상의 명도를 갑자기 높이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꽃잎의 환한 우윳빛이 칙칙하고 지루한 회색을 흔들어 떨구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게 우연일 리 없다. 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기획한 의도가 뭘까. 나를 비롯한 목련을 바라보는 모든 생명, 그들의 가슴을 더 세차게 흔들어 놓기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해석한다. 흔들어서 뭣하냐고? 각자 제 생명을 충분히 만끽하고 땅 위에 넘치도록 번성하라는 것일테지….​
봄날의 햇볕과 바람엔, 움직일 줄 아는 길짐승과 날짐승과 곤충들까지 모조리 화들짝 놀라게 하고 싶은 신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각자 제 핏줄 속에 소스라쳐 흐르기 시작하는 피톨들의 잉잉대는 소리를 들어보라 세상 꽃들이 모조리 작당을 하는 거다.​
아직 실내는 어둡다. 그러나 바깥엔 저만치 봄이 오고 있다. 곧 꽃들이 필 것이다. 아이에게 맨 처음 새 이빨이 돋듯, 잇몸 위에 발갛게 피가 맺히듯, 모든 꽃의 끄트머리엔 조금씩 핏물이 돈다. 꽃은 결국 제 어미나무의 실핏줄을 터뜨리며 핀다. 벌써 아래쪽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다.​
둔감을 위장하고 있는 저 겨울눈의 깍지는 제 안에 환한 생명을 감춘 채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1월에도 이미 입술 그리는 모필보다야 훨씬 컸던 저것이 어느새 우리 아버지 어릴 적 <동몽선습>을 베껴 썼다는 붓만 하게 변했다. 3월이 이윽하면 그중 장한 놈은 추사가 귀양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써서 걸었다는 무량수전을 쓴 모필만 하게 자랄 거다. 이제 나의 봄은 머리 위로 흔들리는 수백 송이 꽃송이 안에만 있지는 않다. 목련나무 아래 가득 널브러진 수천 조각 겨울눈의 누추한 깍지들 속에도 있다.​
겨울눈이 움쑥움쑥 자라고 있다. 곧 3월이 오리라. 날마다 커가는 겨울눈을 들여다본 눈이라야 목련의 개화를 즐길 자격이 있다. 흰 타월을 던지듯 뚝뚝 떨어지는 그놈의 처절한 낙화, 그 순간까지 실컷 음미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저 겨울눈과 친해져야 한다. 적어도 그게 꽃구경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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