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은어밥 / 안도현

은어밥 / 안도현 아직 한 번도 맛보지 못했지만 내심 벼르고 있는 음식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은어밥’이다. 지금은 독일에 가 있는 하수정 시인이 20년 전쯤에 예찬하던 맛. 은어는 수박 향이 나는 물고기예요. 그녀의 말을 듣던 우리가 귀가 단번에 길쭉해졌다. 후각은 원초적인 감각을 증폭시키는 힘이 있다. 그녀의 고향인 경남 진주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하다가 은어밥 이야기가 나왔다. 남강에서 아버지가 은어를 잡아왔어요. 여름밤 모래사장 위에 불을 피워 은어밥을 지어 먹었죠. 밥물을 평소보다 낙낙하게 잡아야 해요. 은어는 배를 따서 손질해두고요. 냄비 속의 쌀이 한소끔 끓어 익을 때쯤 뚜껑을 열고 재빨리 은어를 넣어야 해요. 밥물이 걸쭉해질 때쯤이죠. 그때 은어를 밥 속에 한 마리씩 수직으로 박아 넣는..

좋은 수필 2021.07.13

바다의 기별/김훈

바다의 기별 / 김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내가 사는 마을의 곡릉천(曲陵川)은 파주평야를 구불구불 흘러서 한강 하구에 닿는다. 여름내 그 물가에 나와서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생각했다. 마침내 와서 닿는 것들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것들을 생각했다. 생각의 나라에는 길이 없어서 생각은 겉돌고 헤매었다. 생각은 생각되어지지 않았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생각은 아프고 슬펐다. ​ 바다는 멀리서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기별이 그 물가에 와 닫는다. 김..

좋은 수필 2021.07.13

별을 세다/김아인

별을 세다 김아인 무거운 소식일수록 빠르게 날아온다. 어제 저녁설거지를 하다가 사촌동서의 별세를 받았다. 지난 삼복더위에 문병을 다녀왔으니 그리 황망한 일은 아니다. 나는 별세란 말을 들으면 별을 세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명백한 내 잘못이지만 내 잘못이 아닌 것이 엄마가 죽은 밤에 막내고모가 나를 업고 자꾸 별을 세라 했다. 자다 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물우물 별을 셌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말랑해지도록 열심히 셌다. 하지만 내 불안은 처마 끝 고드름으로 자라고 너덜거리는 문풍지 위로 울음이 번식을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놓친 엄마의 숨결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이 번식된 울음은 소리로 완성되고 있었다. 소리는 차츰 제 몸피를 키워 ..

좋은 수필 2021.07.12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문태준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 문태준 오늘 한낮에는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행복합니다. 저녁답에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올려 보았습니다. 가을도 아주 깊은 가을입니다. 가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의 마음과 손이 닿아 있습니다. 밤에 촛불을 켜면서 경허스님의 게송을 생각했습니다. 정청어독월靜聽漁讀月. 사방이 고요해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조차 들을만합니다. 찬방에 앉으니 방에 가득 내가 들어찼습니다. 마치 항아리 하나에 물이 들어와 물만으로 항아리를 가득 채우듯이. 덜어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좋은 수필 2021.07.09

무언가를 새롭게 기다리는 손/문태준

무언가를 새롭게 기다리는 손 문태준 이 저녁에 나는 내 무릎 위에 가만히 올라앉아 있는 손을 바라봅니다. 손은 지금 잠시 쉬고 있습니다. 곧 다시 움직일 테지만, 이 손은 매일매일 누군가를 만나면 그이의 손을 덥석 붙잡던 손입니다. 손은 가장 바깥에 있습니다. 화초의 제일 바깥에 꽃이 있듯이. 손은 몸 가운데서 가장 바깥으로 가서 세상을 쥐고, 흔들고, 만지고, 당기고, 들어올리고, 내려놓고, 뿌리칩니다. 오늘 나의 손은 세상에 가서 토닥이는 일을 했습니다. 토닥인다는 것은 집작이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배어든다는 뜻입니다. 이 저녁이 뒤에 오는 밤에게 배어들듯이. 처진 어깨를 토닥여주는 손은 초승달처럼 곱고 환합니다. 토닥여주는 손은 당신의 부름에 내가 응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검은 구름에게 ..

좋은 수필 2021.07.09

그림자 집/김응숙

그림자 집 / 김응숙 전등을 끄자 집은 삽시간에 그림자로 가득 찬다. 화선지가 된 식탁 옆 벽면에 날렵한 가지 몇 개가 난을 친다. 갓 싹을 틔운 작은 잎사귀가 가지 끝에 돋아나 있다. 흰 벽면에 간결하게 그려진 수묵화는 간간이 바람에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한 마리 새가 날아와 가지에 앉고 잎사귀 옆에 매화를 닮은 꽃이라도 피어 화조도를 완성할 것처럼 보인다. 안방 문틀과 문으로 굴곡을 이루며 그림자 그림은 이어진다. 좀 더 많은 가지와 잎들이 더 큰 그림을 만든다. 창밖 산사나무뿐만이 아니라 생강나무 그림자도 섬세한 필치를 더한다. 거실 소파 뒤 벽면은 배롱나무 그림자로 출렁인다. 마치 집 전체가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 속에서 수초들이 일렁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 하나 걸지 않고 하얗게 비워둔..

좋은 수필 2021.07.09

껍데기 / 조정은

껍데기 / 조정은 어느 휴일 P선생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선생은 오랜만에 나타난 내 몰골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무엇보다 화장을 싹 지운 나의 맨얼굴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쯤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 나의 파산과 그후 어느 날 새벽의 기묘한 희열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선생의 사무실 앞, 바로 지하철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 선생은 사무실로 들어가고 나는 지하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바빠서 언제 다시 찾아뵙게 될지 기약할 수 없었다. 평소 무뚝뚝한 선생이 웬일로 그날따라 내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셨고 덕분에 난 참으로 오랜만에 속에 있는 말들을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헤어지기가 영 섭섭했다. 컴컴한 지하철로 들어서면 또다시 나락일 것만 같은 안타까운 순간에 애매한 표정으로 선생을 올려..

좋은 수필 2021.07.09

북어에 대한 묵념 / 최장순

북어에 대한 묵념 / 최장순 귀에 쏙쏙 박힌다.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노랫말이 아침에 뜬 북엇국이 따끈따끈 입맛을 쏘아 올린다. 가사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약이 되고 안주가 되는” 명태다. 강산에의 노래가 울려 퍼진 평양의 극장, 표정 없던 얼굴 몇에도 미소가 스친다. 경계 없는 바다, 명태가 마음을 여는 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함경도 명천明天에서 태太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잡았다 하여 이름 지은 명태다. 열 개도 넘는 개명改名은 유명세라기보다 검은 물살을 해쳐 나온 뒤 겪어야만 하는 시련이다. 추위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혹독함을 껴안은 뒤에야 얻은 이름 황태는 귀족이다. 냉동시킨 동태, 생물인 생태, 건조한 코다리, 내장을 모두 비워 말린 북어, 잊은 뒤에야 얻어지는 신분이다. 검푸른 바다를 ..

좋은 수필 2021.07.08

콩 / 김산옥

콩 / 김산옥 나는 순덕이 아줌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양구 대암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두타연 일급수를 먹고, 부지런한 농부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키가 큰다. 때때로 찾아와 보듬어주는 넉넉한 순덕이 아줌마 사랑을 먹으면 한여름 불볕더위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대암산이 붉게 물들 즈음, 순덕이 아줌마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내 작은 몸은 땅의 온기와, 햇빛과 달빛, 산소와 비, 바람과 농부의 땀으로 완성된다. 온 우주가 담겨진다. 대암산 아래 넓은 벌판에 희끗희끗 서리꽃이 피면, 나는 순덕이 아줌마 곡간에 둥지를 튼다. 봄, 여름, 가을이 총총히 내 곁을 지나가는 동안, 나도 분주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제때 열매 맺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고단함을 내려..

좋은 수필 2021.07.08

마늘종/안도현

마늘종 / 안도현 봄에 마늘종을 뽑아본 적이 있는가? 까딱 잘못하면 끊어지기 때문에 순식간에 적당한 힘을 가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마늘종이 올라온 뒤 보름 전도 되면 서둘러 뽑아줘야 한다. 규모가 큰 마늘밭에서는 노동력 절감을 위해 일일이 뽑는 것보다 아예 자른다고 한다. 그래야 땅속의 마늘 알이 탱탱하게 굵어지는 것이다. 마늘종을 뽑으면 뾱 하는 아주 특별한 소리가 난다. 뾱, 뾱, 뾱 하는 그 소리…. 햇볕이 따끈따끈해지는 5월의 마늘밭에서 듣는 소리…. 식물의 살과 살이 분리될 때 나는 그 소리가 가히 중독성이 있다. 어릴 적에 마늘종은 한 웅큼 뽑아오라는 심부름은 그래서 신이 났다. 사실 마늘종은 마늘의 꽃줄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개화를 꿈꾸며 마늘이 땅속에서 허공으로 애써 줄기를 밀어올린 것이다..

좋은 수필 2021.07.08

봄편지/전경린

봄편지/전경린 정인들이 서로 오래 살아라 하는 뜻을 올봄에는 알 것도 같습니다. 마음만 흘러갈 뿐, 가엾고 방법이 없어. 세울에 기대자고 하는 일인 것을요. 다행이 영 어긋나지는 않고 한 철의 끝이라도 붙들고 피어 짧은 한때나마 손 붙들어보고 관절을 부딪치고 얼굴을 익히고 지는 온갖 봄꽃들... 이리 무거운 얼굴을 이고 비에 젖고 햇볕에 타고 바람에 흔들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잎이 지니, 고마워요. 사람 사라진 자리의 어둠, 꽃 진 자리의 어둠, 이 창자 속 같은 봄밤의 어둠... 내 분별의 모서리로 잘못 건드리면 먹물이아프게 터질 것만 같아 난 혀를 숨기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어요.

좋은 수필 2021.07.07

끝순이/정재순

끝순이 / 정재순 세상에 모든 것에는 이름이 딸려 있다. 참하게 핀다고 진달래, 쓰디쓰다고 씀바귀, 상처를 내면 애기 똥처럼 노란 유액이 난다고 애기똥풀이다. 구석진 길모퉁이에 아무렇게 돋아난 작은 풀꽃도 이름을 가지면 하나의 의미가 된다. 끝순이는 내가 꼬맹이 때 이름이다. 형제들이 나를 놀려먹고 싶을 때면 끝순이라 불렀다. 어감부터 왠지 부끄러움을 일으켰다. 옥편을 찾아보고 뜻을 음미해봤는데, 성의도 없이 막 지은 것 같았다. 살아가는데 장애라도 되는 양 여겼다. 단 한 번도 툭 터놓고 말하지 않았으니 비밀이라 해도 될 성싶다. 호적에 올리는 이름과 불러주는 이름이 다른 아이가 꽤 있었다. 딸을 줄지어 낳은 경우 ‘딸 막이 이름’을 불러주면 후에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이름값을 톡톡히 했는지 남동생..

좋은 수필 2021.07.07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정희승

대구탕을 끓이는 시간 정희승 회사일로 가족과 떨어져 지방에서 장기체류하던 때가 있었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주중에는 회사에서 마련해준 변두리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퍽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 그때만큼 가족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불 꺼진 썰렁한 방이었다. 괴괴한 어둠 속에 꼭 닫혀 있는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왜 그렇게 낯설고 외롭게 느껴졌는지. 시한을 맞추기 위해 하루 종일 바동거리다 온 날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 또는 어쩔 수 없이 양심을 져버리면서까지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이면 더욱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마다 가정이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늘 용서해주고 ..

좋은 수필 2021.07.04

긴 방황 / 전혜린

긴 방황 / 전혜린 금빛 햇빛이 가득 쪼이는 건조하고 맑디 맑은 한국의 가을 속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나에게 미칠 듯한 환희의 느낌을 준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전에는 욕망도 많았다. 중학교 때, 죽어도 평범한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껏 어느 마녀의 저주같이 따라다니고 있다. 나를 그렇게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소망은 얼마나 오만과 무지를 나타내고 있는가? 너무나 순수하게도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악의 없는 그러나 연민 섞인 미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보와 같은 어린 시절, 그리고 청춘 시절 ― 지금 나는 ‘서야 한다’는 ― 자기 자신을 사회 내에서 존재케 해야 한다는 나이에 들어섰다...

좋은 수필 2021.07.02

오래 사슈 / 임만빈

오래 사슈 / 임만빈 외래를 보다가 오래 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치료해주었던 할머니들로부터다. 오래 사는 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든다. “선상님이 오래 사셔야 돼. 선상님이 안 계시면 누가 내 병든 몸을 돌봐주지?” 여든을 훨씬 넘긴 할머니의 이야기다. 뇌동맥류를 수술 받은 환자인데 자식들은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자기는 절대로 자식들 신세를 지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지금 혼자 산다고 한다. “지금 여기가 아파. 괜찮을까? 겁이 나지. 자식들도 같이 살지 않는데 갑자기 죽으면 어떻게 해. 선상님이 책임을 저야 혀. 죽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살아갈 동안 선상님은 살아 있어야 혀.” 그래, 할머니가 다른 병으로 돌아가시는 거야 어쩔 수 없지..

좋은 수필 2021.07.02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전혜린

회색의 포도와 레몬빛 가스등/전혜린 -영원한 물음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에서 도망하고 싶었다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밝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의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척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림(Riem)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뮌헨하면 그 이후 내 머리에는 회색과 안개로 가득 차게 된 것도 그의 독특한 나쁜 날씨보다도 내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던 그날 오후의 첫 인상과 나의 걷잡을 수 없었던 외로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트렁크를 들고 비행장행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

좋은 수필 2021.06.29

연근조림/전경린

연근조림/전경린 고등학교 3학년에 오르던 해였으니 대입시험 준비로 마음이 비장했던 때였다. 대문의 하숙생 구함이라는, 종이를 코팅한 푯말을 읽고 살짝 쪽문을 밀었더니, 뜻밖에 햇살이 깊게 고인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흙담을 따라 커다란 호두나무들이 서 있고, 그 안으로는 온통 동백나무들과 키 작은 철쭉이 심어져 있었는데 일월 마지막 주에 벌써 동백꽃이 희고 붉게 피어 있었다. 햇볕이 환한 마당 가운데는 우물과 수도 물탱크가 있는 세면장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쪽문으로 들어설 때, 왜간장을 졸이는 희미한 냄새가 났다. 육십 줄에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 골격이 큰 할머니가 옛날식 부엌문 앞에 놓인 화덕 곁에 앉아 들어서는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어쩐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할머니도 기별이라도 넣은 사람..

좋은 수필 2021.06.29

달챙이 숟가락 / 정성수

달챙이 숟가락 / 정성수 어머니의 기일이다. 아내가 제사상을 차렸다. 제사상이라고 해야 제수진설법에 의해 차린 것이 아니다. 소반 위에 영정을 모셔놓고 양쪽으로 촛불을 켜 놓았다. 영정 앞에는 꽃바구니가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장미와 안개꽃을 장식한 꽃바구니다. 살아생전에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였다. 추석 성묘나 어머니의 묘소에 갈 일이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국화가 아닌 꽃다발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제사상에 놓은 가지가지 꽃들을 섞어 만든 꽃바구니를 내려다보는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웃으시며 걸어 나올 것 같다. 꽃바구니 앞, 하얀 접시에 놓은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어머니의 달챙이 숟가락이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울컥하더니 목구멍을 막았다. 오늘 낮에 찬장 속을 정리하다가 눈에 띄..

좋은 수필 2021.06.29

무화과가 익는 밤/박금아

무화과가 익는 밤 박금아 가을에 들면 달빛은 마방(馬房)에 들어와 앉았다. 어린 말이 벌레를 쫓느라 꼬리로 제 몸을 치는 소리가 적막하기만 하다. 잔등을 쓰다듬을 때면 말은 어미를 부르듯 큰 눈망울을 들어 저편 하늘로 “히힝!” 소리를 날려 보냈다. 그곳 말 울음소리가 닿는 곳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서면 푸르레한 공기 속으로 철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밤하늘을 날았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오래도록 울음이 남았다. 그 소리가 밤의 젖줄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유선(乳腺)이 탱탱해진 밤은 유두를 열었다. 태어나서부터 젖이 고팠다. 어머니는 집안일에 밭일에 어장까지 돌보느라 젖먹이에게 젖 물릴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다. 고픈 젖을 쌀죽과 원기소로 채우며 자랐다고 했다. 아기 입에는 증조할..

좋은 수필 2021.06.28

적자嫡子 /박금아

적자嫡子 박금아 아버지가 배 문서를 들고 집으로 오던 날의 기억이 선하다. 집안의 여인네들이 방 안 가득 어머니 곁에 둘러앉아 머릿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모습도 떠오른다. 문서가 담긴 싯누런 봉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어흥 11호’는 아버지가 물려받은 유일한 유산이었다. 할아버지가 소유한 십여 척의 배 가운데 제일 낡고 작은 배였다. 아버지는 서자(庶子)였다. 아들을 얻지 못한 할아버지가 씨받이로 맞아들인 여인의 몸에서 얻은 첫아들이었다. 아버지를 낳은 후, 생모는 강보에 싸인 아들을 행랑채에 남겨 두고 새벽달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친할머니는 딸 하나를 더 낳았고, 이어 아들 형제를 내리 낳았다.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였다. 두 분 작은아버지가 서울 어느 대학에서, ..

좋은 수필 202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