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에 대한 묵념 / 최장순
귀에 쏙쏙 박힌다. 유쾌하고 익살스러운 노랫말이 아침에 뜬 북엇국이 따끈따끈 입맛을 쏘아 올린다. 가사처럼,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약이 되고 안주가 되는” 명태다. 강산에의 노래가 울려 퍼진 평양의 극장, 표정 없던 얼굴 몇에도 미소가 스친다. 경계 없는 바다, 명태가 마음을 여는 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함경도 명천明天에서 태太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잡았다 하여 이름 지은 명태다. 열 개도 넘는 개명改名은 유명세라기보다 검은 물살을 해쳐 나온 뒤 겪어야만 하는 시련이다. 추위에 얼었다가 녹았다가 혹독함을 껴안은 뒤에야 얻은 이름 황태는 귀족이다. 냉동시킨 동태, 생물인 생태, 건조한 코다리, 내장을 모두 비워 말린 북어, 잊은 뒤에야 얻어지는 신분이다.
검푸른 바다를 떼 지어 가르던 명태가 덕장에 매달린다. 한 치라도 미련을 남기면 안 되지, 내장이 털리고 수분이 다 빠져나간다. 속없는 그는 더 이상 명태가 아니다. 환골탈태라지만, 개명허가도 받지 않고 말라 비틀린 북어는 할 말 많았던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꼬챙이에 꿰인다. 인격권이나 행복추구권은 애초에 없어 보인다. 북어는 살이 굳어 뼈가 되는 고통의 이름값이다.
“내가 명태였지, 명태였지….”
쓰린 속을 달래주는 해장 한 그릇으로 거듭날 때, 먼 바다의 이름 명태를 추억한다. 북엇국은 두들겨 맞고 찢긴 명태의 단단한 사상을 여과 없이 풀어놓는다. 누가 그 단단한 몸에서 그리 구수하고 뒷맛까지 개운한 해장을 줄 수 있는가. 침묵 속 고이 간직했던 생각을 맛깔나게 풀어놓을 수 있는가.
청명한 소리로 일깨워주는 법당 처마의 풍경風磬은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깨어있으라는 뜻이란다. 명주실에 묶어 출입문에 매달린 북어는 어떤가. 가볍디가벼워진 몸은 비록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보초병처럼 눈을 뜬 채 집안을 경계한다.
“빌어먹을 놈들….”
석화처럼 미라처럼 굳어가며 북어는 세상을 원망했을까. 나의 뜻과 다르다고 이 탁한 급류를 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그러나 운명을 어쩔 수 없다고 자학했을까. “운명이다”라며 모든 책임을 껴안고 홀로 떠난 이와, “내 탓이 아니다”라며 세상에 책임을 떠넘긴 이. 다 용서하고 수호신으로 부활한 북어는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상실에 대한 저항과 공포도 없던 내가 아는 그 사람과 닮았다.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머리는 육수로, 껍데기는 튀김으로, 머리에서 꼬리까지 다 내준 보살. 손 없는 날, 신차를 출고한 차주는 자동차 위에 북어를 올려놓고 빈다. 또한 절을 올린다. 네 바퀴에 막걸리를 부으며 무사고를 빈다. 또한 개업 때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자손들에게 복을 달라고 고사를 지낼 때 북어는 빨질 수 없다.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민간신앙, 출입할 때마다 문지방이 닳도록 간절한 소망을 올리는 것은 소박한 기도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일상의 간구다. 예수가 없는 교회, 부처가 없는 사찰의 신도처럼 오늘날 그저 종교의 노예가 된 자들보다 얼마나 경건하고 겸손한가.
죽어 얻은 이름, 북어. 나는 북어에게서 어느 먼 시대를 살다 간 이들을 떠올린다. 그들의 이름은 다 기억하지 못해도, 훗날에야 기억되는 길이다. 죽은 뒤에야 진가를 알아본 이들에게서 불리어지는 명예. 그들은 모두 한 마리의 북어처럼 살다 갔다. 말 대신 행동으로 앞장선 선구자다.
두드려 패야 제맛이라는 속된 농담도 북어를 폄훼한 말. 할 말 삭이고 인내하고 단단히 굳어간 그 속에 우리가 모르는 지혜와 사상이 가득 들어있다는 걸 아는가. 한 그릇의 북엇국에 숙연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