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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문태준

에세이향기 2021. 7. 9. 11:24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를 듣다

 

문태준

 

 

오늘 한낮에는 덩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입이 뾰족한 들쥐가 마른 덩굴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잎들은 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늘은 일기日記에 기록할 것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헐거워지는 일로 하루를 살았습니다. 행복합니다. 저녁답에는 식은 재를 손바닥 가득 들어올려 보았습니다.

가을도 아주 깊은 가을입니다. 가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나의 마음과 손이 닿아 있습니다. 밤에 촛불을 켜면서 경허스님의 게송을 생각했습니다. 정청어독월靜聽漁讀月. 사방이 고요해 물고기가 달을 읽는 소리조차 들을만합니다. 찬방에 앉으니 방에 가득 내가 들어찼습니다. 마치 항아리 하나에 물이 들어와 물만으로 항아리를 가득 채우듯이.

덜어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도 소식小食이 필요합니다. 덜어내는 것이 가장 번창하는 일입니다. 입에서 말을 덜어내면 허물이 적어집니다. 덜어내는 일이 보태는 일보다 어렵지만, 덜어내는 일이 나중을 위하는 일입니다.

늦가을은 이렇게 가장 많이 덜어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빈손을 보여줍니다. 현암스님도 "돌아보면 저에게 남은 것은 방 안에 걸어둔 붓 한 자루와 낡은 서책 몇 권, 그리고 내 몸을 근질근질하게 하는 쥐벼룩 몇 마리가 전부"라고 했으니, 그분은 얼마나 부러운 마음의 재산가입니까? 그나마 이 가을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느 때에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소욕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까.

잔잎사귀들이 낙엽이 되어 뜰에 소복이 쌓이고 있습니다. 소엽掃葉. 소엽은 낙엽을 쓸어내는 일입니다. 저 깊은 산막에서는 종일 낙엽을 쓸어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낙엽을 쓸어내는 일도 큰 공부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둔하기로 유명했던 주리반특가도 마당을 비질하는 일로써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들 마음에서 생겨나는 혼동과 혼란을 쓸어내어야 합니다. 저 깊은 산막에서 종일 비질하는 일로 소일하는 그가 부럽습니다.

밤이 깊어 조용해지니 더욱 행복합니다. 밤이 깊어 흐르는 달을 보니 행복합니다. 달의 서책을 읽을만합니다. 가을이라는 방에 빈 책상을 하나 놓아둘만합니다. 공부에도 큰 진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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