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7

흉터/최윤정

흉터 /최윤정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머리에 버짐이 번져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는 걸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오던 길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들르는 마을버스는 일찍 끊겨 버렸고, 눈보라를 맞으며 한 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집에 갈 수가 있었다. “춥제?”하고 자꾸만 물어보시던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도 못하고 눈보라와 씨름하던 그때,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걸음을 걷는 다리조차 감각을 느끼지 못할 만큼 온 몸이 꽁꽁 얼어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집이 깜깜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찬바람이 확 덮쳐왔다. 아버지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불을 켜자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방안에 서있으려니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나는 어..

좋은 수필 2021.05.20

가장 낮은 궁핍/마경덕

가장 낮은 궁핍/마경덕 텅 빈 잔고를 보듯 쓸쓸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만지면 까맣게 묻어나는 내 삶의 그을음이었다. 바닥 중에도 가장 낮은 밑바닥이 있듯이 궁핍 중에서도 가장 낮은 궁핍이었다. 가난에 익숙했으므로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늘 만나는 저녁노을 같은 것이었다.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가난, 철없어서 오히려 가벼웠던 가난, 하지만 잠시 사라진 가난은 노을처럼 다시 찾아왔다. 침몰하는 하루, 추락이 빤한 내일, 노을의 끝은 어둠이었다. 그 막막한 시간을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자식들, 끼니마다 아귀처럼 먹어치우던 그 식욕을 어머니가 다 감당하셨다. 상자에 보관한 고구마가 싹을 내밀었다. 참을 수 있는 시간은 다 써버린 것이다. 자줏빛 잎은 고사리처럼 말..

좋은 수필 2021.05.18

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마경덕

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다 늦은 저녁답에 새 한 마리가 캄캄한 하늘을 날아가는 걸 보면 울컥, 슬픔이 치민다. 모르겠다. 왜 그리 가슴이 아리는지 모르겠다. 깃들 곳이 없는지. 짝을 잃었는지 새는 혼자고. 날은 저물었고 새의 날갯짓이 무척 지쳐 보인다. 걱정을 하는 사이 새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서러움만 남는다. 내 슬픔은 대개 이런 식이다.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쓸데없이 심각하고 정작 걱정해야 할 일은 한없이 관대하고 게으르다. 내 가슴을 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 두 달 전,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의정부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의자에 앉아있는 어느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행색이 초라한 늙은 남자였다. 까만 윗도리를 걸쳐 입은 그 남자의 어깨에 비듬이 허옇게 떨어져 있었..

좋은 수필 2021.05.18

요양원 가는 길/허정진

요양원 가는 길/ 허정진 도심지를 벗어나 늦가을 들녘을 가로지른다. 분주함 속에 풍요가 거쳐 간 논밭에는 허허로움과 적막으로 가득하다. 그루갈이를 하려는지 곱게 가다룬 논이랑이 소멸과 생성의 끝없는 순환 고리를 엮어내고 있다. 갈잎 같은 작은 새떼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지나간다. 길섶에 열병처럼 늘어선 풀꽃들이 새삼 알짝지근하다. 세상 밖이어서인지 친숙한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산중 작은 요양원이다. 2층의 단아한 주택에 넓은 정원을 가졌다. 각종 꽃나무들이 앞뜰을 이루고 뒤뜰에는 여러 유실수들이 실하게 열매를 맺었다. 시득부득 말라가는 꽃잎마다 지난밤 청아하게 빛나던 달빛냄새가 스며들었다. 바닥에 수북한 낙엽들이 흙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굴리며 오체투지 중이다...

좋은 수필 2021.05.18

도래샘 / 윤희순

도래샘 / 윤희순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이 있다 거친 흙길을 돌아 돌아서 물길을 놓치지 않고 샘이라는 이름을 얻어낸 도래샘,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온전히 길을 찾아낸 작은 샘은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모진 과정을 겪고 새로 태어난 샘의 안정된 모습은 얼굴을 들이대지 않아도 물 내음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며 샘의 모습만 감상했던 나였다. 언제부터 샘이 이루어진 과정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해탈의 과정을 겪은 듯하다. 안온한 얼굴에 깊숙이 자애로운 웃음 짓고 있던 그녀가 떠오른다. 돌고 돌아서 맑은 물줄기 샘솟는 도래샘 같은 모습으로 평온한 웃음을 전하던 그녀의 정연한 움직임을 기억하게 된다. 낮은 계곡 물 소리가 안내해주는 산길에 들어섰다. 처음 그 길을 들어섰을 때와는 사..

좋은 수필 2021.05.18

환하면 끝이라더니 / 황미연

환하면 끝이라더니 / 황미연 적막한 빈 집에 석류꽃이 피었다. 주인이 없으니 햇볕을 받아 안을 힘조차 없어졌는지 지붕 한 귀퉁이가 내려앉았다.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며 혼자 살던 할머니를 기억이나 하듯 마루에 방치된 자그마한 냉장고를 본다. 잡초만 무성한 마당을 지나 한 열댓 걸음 걸어가면 별채에 달린 작은 방이 나온다. 그 방안에는 주인이 보다만 책들이 널브러졌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한번은 꼭 온다던 노모의 마음이 담긴 방이다. 낮게 쌓아놓은 담장 곁에 오래된 석류나무가 유난히 붉은 꽃등을 내걸었다. 고요하던 몸이 뜨겁게 들끓는다. 아무리 뜨거운 음식을 먹어도 땀을 흘리지 않던 몸인데 갑자기 더워지면서 목덜미가 흥건해진다. 남들은 추운데 나는 덥고, 남들이 더울 땐 또 춥다...

좋은 수필 2021.05.18

비의 발자국/마경덕

비의 발자국 마경덕 밤새 창문으로 스미는 빗소리, 깊은 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비를 소리로 읽는다. 홀로 내리는 비의 발자국소리. 지금쯤 옥상에 심은 토마토의 발목이 흠뻑 젖고 노랗게 익어가는 살구도 자다 깨어 빗물에 얼굴을 닦고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 까마득한 허공에서 낙하를 결심하기까지 몇 번을 망설였을까? 투둑투둑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혀 비의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 뒤란 차양에서 빗물 튀는 소리, 빈틈없이 포장된 도시로 속수무책 뛰어내리는 저 빗소리를 나는 비명으로 읽는다. 비명… 그러니까, 나는 지금 간절한 울음을 듣고 있다. 거대한 콘크리트城인 도시로 내리는 비는 목이 꺾이고 팔이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고…… 여리고성처럼 단단한 문명 앞에 비는 지금 산산이 흩어진다. 언젠가 비 ..

좋은 수필 2021.05.17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조선 개똥이 / 이난호 언제부터인가 일상용어 속에서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어 자취를 감춘 단어 중에 '조선'이란 말이 있다. 어떤 단어 앞에 이 '조선'이란 말이 붙으면, 마냥 소박한 것, 가장 우리 것다운 것으로 쑥 다가왔고 얼마쯤은 진국이라는 다소 예스런 의미의 어떤 향수까지 묻혀와 단박 유년기 저쪽을 기웃거릴 수 있었는데, 가령 '조선 참외' 하면 개구리참외나 작고 동글반반하고 샛노란 참외를, '조선무' 하면 짤막하고 통통하고 속이 단단해서 날것으로 먹기는 맵고 빡빡하지만 일단 김치류로 갈무리되면 긴 겨울을 나고도 다음해 한여름까지 생생하니 든든한 밑반찬으로 버텨주는 무를 일컬었던 것이다. 조선간장은 어떤가. 햇콩을 오래 삶아 빚어 띄운 메주로 역시 제 입맛에 간 맞춰 담근 재래식 장, 이곳에 '조선..

좋은 수필 2021.05.17

젓갈 예찬 / 정호경

젓갈 예찬 / 정호경 ‘젖’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애가 꼬막손으로 미래의 꿈을 주무르며 빨아먹는 사랑의 밥인가 하면, ‘젓’은 나이가 든 어른들이 밥숟가락에 얹거나 걸쳐서 먹는, 짜고 고소한 감동의 반찬이다. 이와 같이 ‘젖’과 ‘젓’은 맞춤법과 뜻과 정서가 각각 다른데도 우리는 일상의 글에서 우리말을 조심성 없이 붓 가는 대로 마구 써버리니 글의 문의파악에 잠깐이나마 혼동이 일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젖’이나 ‘젓’이나 둘 다 눈을 지그시 감고 먹는 얼굴표정은 비슷하지만, 각각 맛의 깊이와 색깔이 다르니 하는 말이다. 속담사전에 보면 ‘젓갈가게에 중이라’,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는다’,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는 등 젓갈에 관계되는 속담이 더러 올라 있는..

좋은 수필 2021.05.17

길/김아인

-길/김아인- 평사리 문학대상 요즈음 내 취미는 산을 오르는 일이다. 생각이 많을 때나 온몸으로 나이를 느낄 때 즐겨 찾는 길이 있다. 길 위에서 땀범벅이 되다 보면 속에 있던 잡생각 뭉치들이 빠져나간 듯이 홀가분해진다. 언젠가부터 남녀노소 없이 걷는 게 유행처럼 됐다. 수직상승을 향해 달려온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수평적 삶의 안정을 누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한다. 그에 발맞추듯 올레길, 둘레길, 슬로길 하면서 새 이름의 길들이 많이 조성됐다. 그렇다 보니 걷기에 편안한 기능성 신발이나 등산용품이 인기인데 가격대가 천차만별이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홈쇼핑에서도 등산복 판매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무이자 할부 조건이 솔깃해서 몇 벌 샀다. 고가품 못지않게 ..

좋은 수필 2021.05.17

아버지를 팔다 / 김아인

아버지를 팔다 / 김아인 가수 유지나 씨와 MC 겸 코미디언인 송해 씨가 노래를 부른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제목이다. 처음 듣는데도 리듬을 만난 가사가 찡한 울림을 준다. 여기서 훌쩍, 저기서 훌쩍, 아침부터 방청객들이 눈물바람을 한다.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배운 이름 아버지 가끔씩은 잊었다가 찾는 그 이름 우리 엄마 가슴을 아프게도 한 이름…” 대중가요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일까? 노랫말을 들을수록 마치 내 사연을 모델 삼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진짜 부녀지간보다 더 살갑고 다정해 보인다. 세상에 엄마를 주제 삼은 노래는 많아도 아버지를 주제 삼은 노래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만들었다는 유지나 씨의 부연설명이 명치끝에 와서 머문다. 본인도 녹음할 때 눈물이 하도 흘러서 중간에 몇 차례나 쉬..

좋은 수필 2021.05.17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먼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만의 시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

좋은 수필 2021.05.17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남편 길들이기 - 유 영 자 나는 처녀 적에 마음이 여리고 곱다는 소리를 들었다. 상스런 소리도 할 줄 몰랐고 거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볼 때 보호해주고 싶은 그런 모습으로 몸도 왜소하고 연약했다. 키 158센티에 몸무게 45킬로그램으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남자는 다름 아닌 나의 남편이었다. 뱃살이 디룩디룩 붙으면서 그 뱃살만큼 뱃장이 두둑해지고 강심장이 된 것도 물론 남편 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의 공을 치하하자면 끝이 없다. 어쩌면 남편은 나를 새로운 여성으로 이 세상에 재탄생시켜준 은인이라고나 할까. 나를 낳은 분은 생모였고 나를 키운 분은 고모였지만, 나를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사람은 남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서..

좋은 수필 2021.05.17

스물과 쉰/장 영 희

스물과 쉰/장 영 희 오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때는 인정받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친구는 오륙 년 전에 소위 '명퇴'를 당하고 그냥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아직도 일하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디 가나 무용지물에 퇴물 취급이나....봉사 나가는 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살아서 모를 꺼야. 난 젊은애들 앞에서 주눅 들어"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얘, 주눅은 무슨 주눅! 죽자 사자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 지었어?" 친구가 간 후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배가 고파지자 식품 매장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층을 가로질러 가는데 얼핏 화장품 진열대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좋은 수필 2021.05.17

단어의 무게 / 민명자

단어의 무게 / 민명자 # 고프다 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주었지만, 음식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 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명..

좋은 수필 2021.05.17

커튼콜 / 김희정

커튼콜 / 김희정 “소나기,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시처럼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 남의 얘기 말고 너를 말해 봐/ 급한 간결체 말고 지루한 만연체로 자세히 말해 봐” -소나기에게- ​ 번개가 기척하며 갈라진 천장이 급한 물줄기를 쏟는다. 프롤로그다. 하늘이 온통 세로 줄무늬다. 소나기다. 비에 긁힌 허공 가득 느낌표다. 비의 언어기호는 말줄임표다. 단락을 끊을 수 없는 연속 문장이다. 간격은 불문율에 부친다. 화면은 세로로 장치된다. 비 오는 풍경을 가로로 자르면 한 폭 그림이 되지 않는다. 비의 간격마다 세로로 잘려야 풍경이 된다. 그래서 다음 장면을 보려면 옆으로 넘기지 않고 위아래로 넘긴다. 비의 온도는 계절마다 달라서 체온으로 느낀다. 비의 정서는 넘치게 미학적이다. 테마는 판타지다..

좋은 수필 2021.05.17

나는 도리깨질에 길들여진 멍석이요/이영미

나는 도리깨질에 길들여진 멍석이요 / 이영미 “훠이 훠이” 아침부터 경을 친다. 마흔이 넘어 붙어버린 게으름 탓에 간밤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부엌의 싱크대에 남아있던 유리 컵 위에 해바라기 하듯 붙어 있는 도마뱀 한 마리, 어미 품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연한 회색 몸뚱이는 사람과 섞여 산 지 얼마 안 돼 눈치도 없다. 저를 해할 가능성이 있는 무리 중 가장 조심해야 할 인간을 알아보지 못 한다. 기어이 행주에 한 대 맞고야 벽 타기를 시도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작은 생물을 잡을 생각은 없다. 서투른 몸짓의 도마뱀과 아직 곤히 자고 있는 네 살 된 둘째와 오버랩 되는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 땅에 나보다 아니, 이 적도의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뎠을, 한국인보다..

좋은 수필 2021.05.17

콩나물 촌감(寸感) /허석

콩나물 촌감(寸感) /허석 ​ 말아 쥔 악보 속에 높은 음표들이 유희한다. 슬픔을 날것 그대로 토해내는 비탈리 ‘샤콘느’의 음계며 선율일까. 의뭉스러운 삶의 비정을 맛본 느낌표와 의문형의 기호들이 세상 앞에 단독자처럼 버티고 있다. 아니다. 잎도 없이 연둣빛 꽃망울을 머리에 이고 올라온 석산 꽃대공들이다. 미끈하고 탄력적이며 날렵한 몸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그대로이다. 건강에 좋다며 지인이 재배한 까만 쥐눈이콩을 선물 받았다. 크기는 좁쌀만 하지만 오동통하고 앙증맞은 모습이다. 콩나물 기르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혼자만의 살림에 항아리 들여놓기도 부담스러워 투명한 페트병을 이용해 조그만 시루 두 개를 만들었다. 성장기는 일여드레, 일차를 두고 기르면 사나흘에 한 번꼴로 콩나..

좋은 수필 2021.05.15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내 생의 은밀한 파수꾼 / 최영애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유한 형태나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새벽은 어둠의 커튼을 올리며 서서히 다가오고, 시간의 전령을 마다 않던 닭도 붉은 벼슬을 세우고 새벽을 향해 목청을 높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러나 존재감이 없는 것들은 숨어 소리를 키운다. 유년의 내 옷 속에서도 그것은 필수적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밀한 위치에 숨어 자기의 기능을 다한다. 산소 방울로 올라오는 투명한 기포처럼 빛나다 사라지는 기억의 그물 안에서 건져내는 은빛 갈치의 눈알처럼 동그랗게 빛나던 존재. '꽃마리' 처럼 작은 그 존재의 언어. 그것은 마치 '똑', 한 발짝 딛고 기우뚱하다가 내딛는 첫돌배기의 서툰 한 박자의 걸음처럼, 한 템포 쉬고 잠시 머뭇거리다 '딱'으로 되돌아온다. ..

좋은 수필 2021.05.15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멸치 똥을 따며 / 심선경 나이 오십이 넘어 소주 맛을 알게 되었다. 새벽녘에 내린 소낙비에 잠이 깨어 아무리 뒤척여도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부엌에 나와 냉장고에 든 소주 한 병을 꺼낸다. 기껏해야 마른 멸치 한 줌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안주의 전부지만, 이제 안주 없이도 술맛이 쓸 때와 달 때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멸치 대가리를 떼어내고 새까만 똥을 빼낸다. 멸치 똥을 쉽게 빼내려면 아가미 쪽에 이쑤시개를 넣고 아랫배 부분을 들어 올리듯 하면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멸치 똥만 제거할 수 있다. 이 방법을 몰랐을 땐 멸치를 반으로 쪼개어 속에 든 새까만 똥을 긁어내느라 멸치 몸통이 부스러진 게 태반이었고 깔아놓은 신문지엔 멸치가루가 수북했다. 멸치의 어원은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데..

좋은 수필 2021.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