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1098

창 / 김이랑

창 / 김이랑 그놈 참 똑똑하다. 아무 때나 손가락만 까딱하면 바깥세상을 내다보고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는다. 멀리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널리 나를 알릴 수도 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 부리는 요술은 상상을 넘어선다. 옛집에도 조그마한 창이 있었다. 창호지를 손바닥만큼 뜯어내고 유리를 붙이면 뙤창문이 되었다. 인기척이 들리거나 바깥이 궁금하면 눈을 갖다대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밖이 희미하게 보일 때, 입김을 호호 불어 먼지를 닦아내면 깨끗하게 보였다. ​ 뙤창문으로는 마당만 보일 뿐, 산 너머 세상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오는 건 활자와 소리였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느라 신문도 하루 늦게 오는 하늘아래 첫 동네에는 전파도 숨을 헐떡거리며 왔다. 지지직대는 소리를 잡으러 귀를 기울이..

좋은 수필 2021.05.10

이별 / 김경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

좋은 수필 2021.05.10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며 김순희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 달래야 할 것은 카펫만이 아니다. 요즘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오래 접혔던 카펫을 펼친 것처럼, 아무리 혼자 삭히려 해도..

좋은 수필 2021.05.10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게시글 본문내용 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닫혀있는 문이다. 아니,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산다. 소통이 없는 문의 안과 밖은 다른 세계, 너와 나,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없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아파트 현관문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막고 있어서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자기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문이다. 통로가 되어야 할 문이 움직이지 않는 경계가 되어버렸다. 시골에 거주할 때였다.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음에 든 집이 그랬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큰길 쪽은 아래채가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문은 일부러 숨겨둔 것처럼 좁다란 골목 안쪽에 나 있었다. 집 내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연 들여다보이지 않고 집안에서도 바깥이 전연 보이지 않아 남을..

좋은 수필 2021.05.10

왕뚜껑전/김지영

왕뚜껑전/김지영 나하고 같은 교무실을 쓰는 종익이 형은 별명이 왕뚜껑이다. 그는 키가 160센티를 겨우 넘고, 머리는 반쯤 벗겨졌는데, 그나마 남은 머리털마저도 희끗희끗하다. 배는 볼록 튀어나오고, 눈은 왕방울처럼 크고 부리부리하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기의 얼굴을 내 얼굴에 맞닿을 듯 대고 심각한 말이라도 하듯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에 침이 튀어 죽을 맛이다. 말을 할 때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침까지 튀겨,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듣는데도 그는 내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할말을 다한다. 그가 왕뚜껑이란 별명이 붙은 것은 느닷없이 화를 잘 내기 때문인데 한 번 화를 내면 아무도 못 말린다. 언젠간 수업을 하다가 문이 부서져라. 열고, 복도로 달려 나와 씩씩거렸다. 마침 나는..

좋은 수필 2021.05.08

주먹/정진희

주먹 정진희 손목뼈에 금이 가 한 달 넘게 석고붕대를 하고 나니 손가락이 굳었다. “이러다간 평생 주먹을 못 쥐어요.” 의사가 으름장을 놓는다. 물리치료와 운동을 한 지 석 달 째인데도 여전히 주먹은 쥘 수가 없다. 손가락 끝이 손바닥에 닿지 않는 것이다. 뼈는 천천히 붙어도 되지만 빠른 시일 내에 손을 못 쥐면 영영 주먹을 쥘 수가 없다고 한다. 잠시라도 손을 펴고 있으면 편대로, 쥐고 있으면 쥔대로 굳어져 움직일 때 마다 뼈 마다마디와 근육이 아프다. 손가락 접기와 펴기 운동을 하다가 안 다친 오른 쪽 손으로 주먹을 쥐어 봤다. 날렵하고 가뿐히 손바닥에 손가락 끝이 파묻히도록 쥐어 진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뭘 했을까를 생각하니 기억나는 것이 가위바위보 놀이 밖에 없다. 더구나 왼 손으로 한 일은 하..

좋은 수필 2021.05.08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나약한 제 모습 보는 게 두려워 참았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양동이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참고 참아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면 속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견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본능적 속심이 이성적인 현실을 이길 경우, 꼼짝 없이 봇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볼까 민망하여, 아니 누구에게 못난 모습 들키기 싫어 빈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 한쪽 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목을 놓았습니다. 제3자가 말릴 엄두를 못 내게끔 이불자락으로 온몸을 돌돌 싸서 틀어쥐고 앙금이 죄다 토해지도록 용을 썼습니다. 울 장소..

좋은 수필 2021.05.08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매실의 초례청 / 류창희 춘설 분분한 가운데 연분홍빛 소녀의 얼굴로 은은한 향을 풍기던 매화. 어느덧 매실이 되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매실을 준비하는데, 오래 전 초례청에 들어서던 동갑내기 우리 부부를 보는 듯 마음이 설렌다. 배가 볼록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고, 마지막 절차는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혹, 불길한 기운이라도 스밀세라, 한지로 항아리 아가리를 딱 붙였다. 신방인 셈이다. 목화솜처럼 뽀얀 새 이부자리 위에 축사로 매화송이를 그릴까 하다가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었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창에 기..

좋은 수필 2021.05.08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콩 팔러 간다/ 이고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평범한 작물, 콩은 참으로 절실한 곡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위대한 생각으로 보면 궁전이지만 별것 아닌 삶으로 보면 하나의 꼬투리, 콩깍지 같은 데서 태어나 콩콩 뛰놀다가, 비바람에 콩 이파리로 퍼렇게 뒤집어지며 쓰러지고 마는 것 아닌가. 몸이 작아서 콩각시 같았다는 할머니가 콩 팔러 가시는 바람에, 열두 살 비릿하게 자라던 아버지는 콩꽃이 이우는 밭두렁을 안고 앵댕그라지며 울었다고 한다. 주야장천 콩밭 매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며 아버지도 별 수 없이 콩 농사를 지었다. 콕, 콕, 콕, 이랑을 점찍어 콩씨를 넣고 김을 매고, 잎에 노랑단풍이 들고 꼬투리가 벌어져 튀기 시작하면 거두어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그것으로 해마다 메주 쑤고 간장을 담궈 ..

좋은 수필 2021.05.08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단추를 달며 / 정해경 벌써 며칠 째, 옷걸이에 걸린 와이셔츠가 문틀에 매달려 드나들 때마다 춤추듯 흔들거린다. 진즉에 말랐으니 다림질 후 장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단추 하나가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원상복구만을 기다리고 있다. 단추를 단 다음 다시 빨아야 될 것 같다. 괜한 내 눈총에 더러움이 더 묻어난 것 같아서다. 갈아입는 셔츠 대열에서 이탈한 채 방치되고 있는 옷이 딱해 옷걸이를 빼내고 반짇고리를 가져왔다. 별것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해 남편과 관련된 건 가급적 눈길을 피했다. 그 와중에 와이셔츠의 단추가 실이 풀려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셔츠는 영문도 모른 채 한참동안 문틀에 걸려 벌을 섰다. 그러고 보니 까닭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솔기가 벌어진 것을 보고도 그냥..

좋은 수필 2021.05.08

손빨래하기 / 정해경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

좋은 수필 2021.05.08

연 필/ 모임득

연 필/ 모임득 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보자기 둘러메고 십 리 길 뛰어 학교에 가다 보면 필통 안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나곤 했었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연필도 요즘은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뜨면 들로 산으로 다니시며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밭 갈고 쟁기질하던 거친 손으로 입학하는 딸을 위해 연필을 깎아주셨던 아버지.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 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

좋은 수필 2021.05.07

낙타표 문화연필/정희승

낙타표 문화연필 Ⅰ.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 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버린 부질없는 독백과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

좋은 수필 2021.05.06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지금은 봄이다. 대지는 신생하는 것들의 기운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땐 강가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랑져 흐르는 물결 위로 굴절하는 빛의 눈부심, 볼에 와 닿는 상큼한 바람결이 다함없다. 강변에 깔린 마름 갈대들의 음률도 들을만하다. 그 어떤 악기가 겨우내 살을 깎아내고 육탈한 뼈들끼리 서로를 껴안고 부르는 조곡弔哭을 연주 할 수 있었던가. 강물이 뒤척이는 에로틱한 신음까지를. 청둥오리와 도요새들이 끼리끼리 모여 부리로 제 깃을 다듬는다. 더러는 머리를 날개 죽지에 파묻고 조는 놈도 있다. 이제 저 새들은 곧 남한강을 떠날 것이다. 나는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눈을 감는다. 그러면 강변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는 내가 보인다. 자신을 자연 속에 밀어..

좋은 수필 2021.05.06

묵인(黙認) / 정재순

묵인(黙認) / 정재순 자정이 넘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으나 역시 묵묵부답이라 재차 발신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 저쪽은 적막강산처럼 고요했다. 곧 도착한다며 서둘러 끊으려는 찰라,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 시쯤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술을 마셨다고 하기엔 그다지 취한 기색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 확 밀려왔다. 스무 일곱 해를 동거하면서 이런 묘한 기분은 처음이다. 색안경을 끼고 봐서일까,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남자의 버릇은 아이들 방부터 찾았다. 곤히 잠든 애들을 껴안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골목이 들썩거렸다. 뿐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달랐다. 집에 오..

좋은 수필 2021.05.05

새우젓/이방주

새우젓 이방주 금년에는 강경이나 광천에서 성황을 이룬다는 새우젓 축제에 꼭 한 번 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또 가지 못했다. 내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다른 해에 비해 꼭 가야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축제구경을 하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새우젓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당분간을 가지 못할 것 같다. 아직도 몇 년을 먹을 만치 새우젓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들은 새우젓을 좋아한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새우젓 없이 진지를 드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도, 공연히 젓가락을 들고 방향을 잡지 못하실 때가 많다. 노인들은 짜고 매운맛이 있어야 입안에 침이 고이고, 침이 생겨야 목이 부드러워지시는 모양이다. 새우젓은 알이 굵은 것보다는 알이 잔듯하면서도 오동통하고, 배때기가 아주 희고 깨끗..

좋은 수필 2021.05.04

새우눈/한경선

새우눈/한경선 바다는 손을 헹구지 못한 채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면서 손님을 맞았다. 무쇠 솥에 불을 때다가 부지깽이 던져두고 뛰어나와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보이던 언니를 닮았다. 갯벌 가까이 있는 바다는 그랬다. 흙과 바람 속에서 뚜벅뚜벅 걷는 사람처럼 꾸밈이 없고 투박했다. 비릿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밴 물이랑을 일궜다. 바다는 온갖 목숨들을 거두느라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것들을 부추기고 쓰다듬고 다독이느라 분주하다. 인적 드문 산골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엮어내는 언니는 때 묻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그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다. 누구를 그립다고 한 적도 없고 삶이 외롭다고 툭 내뱉은 적도 없다. 올망졸망한 아이들 품고 눈 끔벅거리는 일 소 한 마리 먹이는 것이 사는 일의 전부인 줄 아는 듯..

좋은 수필 2021.05.04

새우젓/조성희

새우젓 조 성 희 구수한 냄새를 내며 가을이 익어간다. 다소곳한 바람이 어디선가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를 풀어 놓고 휙 지나간다. 할머니 땀 같은 비릿한 냄새가 저 만치서 손을 흔든다. 구수한 밥을 지어 놓고 사립문 밖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를 볼 때처럼 얼굴에 함박꽃 웃음이 피어난다. 상인들의 외쳐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앉을 자리를 찾는 고추잠자리 떼처럼 빨갛다. 북적이는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다. 참빗으로 머리 빗고 뽀얀 흰 고무신 신고 장에 가는 할머니같이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있다. 가지런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생선들이 정갈하다. 옆집 아주머니와 김장철에 쓸 젓갈을 사러 소래포구에 왔다. 젓갈은 어패류의 육, 내장을 식염으로 절여서 부패를 막고 원료를 적당히 분해시켜 특..

좋은 수필 2021.05.04

반쪽 지구본/안은숙

반쪽 지구본/안은숙 거리를 배회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느리게 아주 천천히 걸었다. 저녁 어스름에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어쩌면 참 다행이라 여겨졌다. ​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누군가 내다버린 반쪽의 지구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우묵하게 파인 반쪽의 지구본, 마치 분화구 같기도 하다. 그 안엔 반나절 동안 내린 빗물이 얌전하게 고여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지구본 속엔 온갖 난파된 배와 격렬한 해전들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듯 고요했다. ​ 내가 알고 있거나 다녀온 나라들은 없었다. 모국을 찾아보려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나머지 반쪽의 지구본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인 빗물은 쏟아버리고 나는 반쪽의 지구본을 품에 안았다. 집으로 가져왔다. 기울여도 기울여..

좋은 수필 2021.05.04

7일 동안/최지안

사진southeast131(southeast131)님 7일 동안 최지안 월요일. 대롱 하나가 목에 꽂혀 있는 것처럼 뻑뻑했다. 몸은 전보다 다른 느낌을 전해왔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버텼다.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몸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예고였다. 화요일. 기온이 뚝 떨어지던 날이었다. 예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고 칼로 내리치듯 한기가 등으로 꽂혔다. 예감이 적중했다. 저녁부터 몸 여기저기에 전운이 감지되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 않는 것인지. 수요일. 면역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백혈구가 전열을 가다듬는 듯 했다. 액체가 기울어지듯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피도 그쪽으로 몰렸다. 기침이 날 때마다 체액이 쏟아질 듯 했다. 그때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

좋은 수필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