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묵인(黙認) / 정재순

에세이향기 2021. 5. 5. 20:57

묵인(黙認) / 정재순

 

 

 

 

자정이 넘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으나 역시 묵묵부답이라 재차 발신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 저쪽은 적막강산처럼 고요했다. 곧 도착한다며 서둘러 끊으려는 찰라,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 한 시쯤 현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술을 마셨다고 하기엔 그다지 취한 기색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 확 밀려왔다. 스무 일곱 해를 동거하면서 이런 묘한 기분은 처음이다. 색안경을 끼고 봐서일까,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했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때면 남자의 버릇은 아이들 방부터 찾았다. 곤히 잠든 애들을 껴안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골목이 들썩거렸다. 뿐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달랐다. 집에 오자마자 이내 곯아떨어졌다. 그 옆에 누운 여자는 밤을 꼬박 새웠다.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떴다. 그녀는 애들이 밖으로 나가고 없자 남자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엄포를 놓듯 한마디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기분이 개운치 않다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어서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했다. 하지만 비집고 나오려는 속내는 드러내지 못했다. 섣불리 뱉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부간에 믿음이 없어진다면 그다음은 불을 보듯 한 일이다.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여자는 이때껏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괜스레 그렇게 믿어졌다. 집에 있을 땐 내 꺼, 집을 나서면 남의 편이라는 우스갯소리에 관심이 없었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마냥 믿어온 사람인데 그날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굴까, 그 늦은 시간에 함께 있었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자의 육감이 아는 체하며 심장에 대고 수군거렸다. 이런저런 추측에 상상까지 보태어졌다. 불쑥불쑥 화가 났다. 신중해 보이던 두꺼운 입술이 고집스럽고 미련해 보였다. 순수하게 다가오던 남자의 얼굴이 좁아진 그녀의 소가지를 비틀었다.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안방 벽에 걸린 액자 속 두 사람은 여전히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기억이 하얘졌으면 싶었다. 낯선 여자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른 척 지켜보는 게 옳은지 헷갈렸다. 긁어 부스럼이 되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그냥 두었다 엎지른 물이 될까 염려되었다.

지루한 일주일이 지나갔다. 퇴근 후 곧장 들어온 남자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여자의 머릿속이 복닥거렸다. 무슨 말부터,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만이 꽉 들어찼다. 과일을 깎다가 왈칵, 부아가 치밀어 부엌으로 나와 버렸다. 진열장 안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술의 힘을 빌려볼까. 워낙 독해서 쳐다보지도 않던 술병을 꺼내 냉큼 뚜껑을 땄다.

한 잔 따라서 야무지게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어찌나 독한지 목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기필코 오늘은 무엇이라도 터트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연거푸 넉 잔을 들이붓다시피 했다. 몽롱해졌다. 단단히 무장된 마음이 안방 문을 냅다 밀었다. 리모컨을 거머쥔 남자가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너무나 태연한 그의 자세부터 눈엣가시였다. 누군 속이 타서 죽을 지경인데 태평스럽게 ‘동물의 왕국’에 빠져 있다니, 티브이를 끄고 이불을 확 걷어 제쳤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 방을 나갔나 싶었던 아내가 득달같이 달려드니 놀란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캄캄했다.

여자가 눈 떴을 땐 다음 날 아침이었다. 몸뚱이는 침대 밑 방바닥에 있고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젖은 수건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뭔 일이 났을 법한데 입은 옷과 얼굴은 말끔했다. 어젯밤을 더듬어 보았다. 속이 메슥거려 구역질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남자가 속은 괜찮은지 물었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하게 응했다. 그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왜 마시냐며 한숨 섞인 쓴 소리를 해댔다. 밤새도록 속을 비웠던가 보았다. 여자는 온몸으로 게워냈을 것이다. 헝클어진 마음 밑바닥까지 싹 비우고 싶었으리라.

새우잠을 자고 일어난 그를 보며 여자는 짐작했다. 토악물이 얼룩진 머리칼과 얼굴을 닦아내고 또 닦아냈을 게다. 둥글게 말린 혀로 시비를 걸었을 터, 불만이 있으면 말하라고 남자의 가슴을 툭툭 치지 않았을까. 무엇이든 다 쏟아내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방문을 빼꼼 열고 놀리듯 웃었다.

여자는 하루 종일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마음을 텅 비운 채. 마치 강렬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억눌렀던 것들이 쑥 빠져나간 그런 느낌이었다. 까짓, 한 번 더 믿어보자.

그날 저녁, 속 풀이를 하재서 같이 복어 집으로 갔다. 양복 차림의 초췌한 남자와 벙거지를 눌러 쓴 눈이 퀭한 여자가 마주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던 여자가 실없는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그녀의 손이 슬며시 폰을 집었다.

‘내 좋아하나.’

별안간 날아든 문자를 열어 본 남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폰이 기척을 냈다.

‘겁나게 좋아 헌다.’

두 사람의 입 꼬리가 동시에 올라갔다. 뜨끈하고 시원한 복어 탕이 빈속을 풀어주고 있었다. 뜨뜻한 온기는 차차 심장으로도 스며들었다. 설핏 여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웠다. 남자는 한 그릇을 더 청해 그녀에게 반을 덜어줬다.

여자의 시선이 그의 희끗한 머리에 멈춘다. 갱년기에 접어든 삶이 허무하고 쓸쓸하기는 남자나 여자나 다르지 않으리. 완연한 중년인 그도 소용돌이치는 서글픔을 앓고 있을 것이다.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지금까지 이루어낸 것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을 터이다.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간다. 눈앞에 놓인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하기에도 벅차다.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는 먼 훗날 풀어야 할 숙제로 미루어 두련다.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눈 감아 주는 게 사랑이 아닐까.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타표 문화연필/정희승  (0) 2021.05.06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0) 2021.05.06
새우젓/이방주  (0) 2021.05.04
새우눈/한경선  (0) 2021.05.04
새우젓/조성희  (0)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