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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새우젓/조성희

에세이향기 2021. 5. 4. 15:23

새우젓

 

조 성 희

 

 

 

 

 

구수한 냄새를 내며 가을이 익어간다.

 

다소곳한 바람이 어디선가 비릿하고 짭짤한 냄새를 풀어 놓고 휙 지나간다. 할머니 땀 같은 비릿한 냄새가 저 만치서 손을 흔든다. 구수한 밥을 지어 놓고 사립문 밖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를 볼 때처럼 얼굴에 함박꽃 웃음이 피어난다.

 

상인들의 외쳐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닌다. 앉을 자리를 찾는 고추잠자리 떼처럼 빨갛다. 북적이는 사람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다. 참빗으로 머리 빗고 뽀얀 흰 고무신 신고 장에 가는 할머니같이 깨끗이 몸단장을 하고 있다. 가지런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생선들이 정갈하다. 옆집 아주머니와 김장철에 쓸 젓갈을 사러 소래포구에 왔다.

 

젓갈은 어패류의 육, 내장을 식염으로 절여서 부패를 막고 원료를 적당히 분해시켜 특유의 감칠맛을 내는 것을 말한다. 화학조미료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조미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치 담글 때는 조기젓, 새우젓, 황석어젓, 멸치젓, 까나리젓을 많이 사용한다. 국이나 찌개의 간을 맞출 때는 새우젓이 유용하게 쓰인다. 어리굴젓, 오징어젓, 새우젓, 명란젓은 주로 상에 올려 깔깔한 입맛을 살려준다.

 

비릿한 냄새에 홀린 듯 따라간 곳, 젓갈가게 앞에서 멈춘다. 빨간 원피스를 차려 입고 정 다방 마담처럼 다소곳이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오징어젓을 보자 침이 고인다. 이쑤시개로 한 점 집어 올려 입속에 넣어본다. 매콤하고 짭짤한 맛이 가득 퍼지자 입안이 출렁거린다. 황석어젓은 세수도 안한 게으름뱅이처럼 거무티티해 눈길이 가지 않는다. 성숙한 여인의 속살처럼 뽀얗게 분칠한 새우젓에게 마음을 열고 바다 냄새를 품는다.

 

새우젓은 잡는 시기에 따라서 각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풋젓은 정월에서 사월에 잡는 새우로 담는 것을 말하고, 오젓은 오월에 잡는 것으로 주로 반찬에 사용한다. 육젓은 유월 산란기의 새우로 담그며 가장 좋은 상품이다. 주로 김장에 사용되며 고소한 맛이 난다. 추젓은 가을에 자잘한 새우로 담그며 각종 음식 간을 맞출 때 사용된다. 동젓은 십일월에 수확한 새우로 잡어가 섞어있어 붉은빛이 돈다.

 

먼 길 떠난 낭군 기다리듯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모습을 간직하며 외로움, 두려움 모두 참아낸 대갓집 규수 같은 새우젓이다. 새우젓 뿐 아니라 모든 젓갈은 참고 기다려야 하는 숙성시간이 필요하다. 어둠속에서 살이 찢기는 듯한 짠 고통을 견디며 익어가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는 수도승처럼 모든 것 참고 기다려야만 본연의 감칠맛을 낼 수 있다. 기다리고 참아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명성을 얻지 않았을까. 왜 나만 참아야 하느냐고 힘들다고 답답하다고 아우성 친 내 모습이 불현 듯 떠올라 오징어젓갈처럼 얼굴이 빨개진다.

 

중국고서에도 젓갈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한나라 무제가 오랑캐 뒤를 쫒다가 어디선가 좋은 냄새가 나서 가보았더니 어부들이 물고기와 창자에 소금을 뿌려 놓은 항아리에서 나는 냄새였다고 한다. 곰삭은 맛이 얼마나 입맛을 돌게 했으면 장수까지 반하게 했을까.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고택처럼 연륜이 느껴지는 깊은 맛이다. 짧은 기간에 좋은 기록을 낼 수 없는 선수와도 닮았다. 또한 새우젓에는 고소하면서 단맛이 난다. 어패류에서 단맛이 난다는 것은 결코 짧은 시간에는 낼 수 없다. 미생물이 발효되어 나는 맛이기 때문에 기다림이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고 무엇이든 다 품어주고 늘 내 편이 되어주던 할머니 같은 깊은 정을 품은 맛이다. 그래서 감칠맛이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새우의 간을 빼 먹겠다는 속담이 있다. 노력하기 보다는 탐욕을 위해서는 아주작고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많은 욕심을 부렸던가. 새우젓도 오랜 기간 고통을 참고 묵묵히 기다렸기에 사람들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사람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어려움도 겪어보고, 참아보고, 기다려보고, 노력이라는 양념도 더해져야 인간미라는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자기만의 향기도 품을 수 있으리라.

 

신라시대에 납폐품목으로 장과 젓갈을 지정했다. 오래전부터 우리 밥상에서 꼭 필요하고 귀한 대접을 받았다. 옛날 산촌에 새우젓 장수가 오면 처녀는 중신아비 만나는 것보다 더 반갑고, 서방님은 장모님 오신 것 보다 더 반갑다는 속담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즘에는 보기 힘들지만 옛날에는 새우젓을 지고 다니며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새우젓 장수는 항상 두 개의 통을 지고 다녔다. 하나는 상품의 새우젓이 담겨있는 ‘알통’이고 또 하나는 ‘덤통’이라 불린 질이 떨어진 새우를 담아서 덤으로 주는 통이다. 새우젓처럼 사람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 시간을 이겨냈느냐에 따라서 알통, 덤통으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노력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숙성이란 시간을 잘 활용한 자만이 사람냄새를 풍기며 감칠맛 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젓갈뿐 아니라 밥도 불을 끄고 뜸을 들인 후에 먹어야 윤기 나고 맛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자에게 필요한 뜸들일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 시간에 큰 성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던가. 힘들지만 한 계단 한 계단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래야만 비릿하면서도 구수하고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그런 곰삭은 맛을 낼 것이다.

 

김장용 새우젓을 양 손 가득 사 들고 옛 철길을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온 몸 가득 비릿한 냄새를 등에 업고 집으로 향한다. 살이 통통 오른 가을바람이 곰삭은 새우젓 냄새를 싣고 앞서 달려간다.

 

저녁상에 풋고추 송송 썰어 쪄낸 새우젓을 올렸다. 아들 녀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가재미눈을 하고는 냄새도 싫다며 손사래까지 친다. 그래 이 맛을 알 리가 없지. 어느 배우의 대사처럼 ‘니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는 구수한 말이 생각나 한마디 하려다 속으로 또 삭인다.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얕은 말들을 누름돌로 지그시 눌러 앉힌다. 좀 더 기다려 주리라. 아들도 언젠가 새우젓처럼 숙성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람의 입맛을 살리는 감칠맛을 내겠지. 집안 가득 달짝지근 짭조름한 맛있는 향기가 가득 번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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