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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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7일 동안/최지안

에세이향기 2021. 5. 4. 12:28

 

사진<네이버 포토갤러리>southeast131(southeast131)님

 

 

7일 동안

 

최지안

 

 

월요일. 대롱 하나가 목에 꽂혀 있는 것처럼 뻑뻑했다. 몸은 전보다 다른 느낌을 전해왔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버텼다.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몸이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예고였다.

화요일. 기온이 뚝 떨어지던 날이었다. 예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이 얼고 칼로 내리치듯 한기가 등으로 꽂혔다. 예감이 적중했다. 저녁부터 몸 여기저기에 전운이 감지되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비껴가지 않는 것인지.

수요일. 면역체계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백혈구가 전열을 가다듬는 듯 했다. 액체가 기울어지듯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피도 그쪽으로 몰렸다. 기침이 날 때마다 체액이 쏟아질 듯 했다. 그때까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오판이었다. 얕잡아본 상대에 코가 눌리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들었다.

목요일. 세상이 흔들렸다. 아니, 우주가 흔들렸다. 나갈 일이 있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두통이 오자 눈이 통증을 호소했다. 근육도 모두 들고 일어나 데모를 하는 듯 했다. 피부는 미세한 접촉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기침을 하려면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두 손으로 감싸야 했다. 미처 휴지를 준비하기도 전에 콧물이 제 맘대로 흘렀다. 왼쪽으로 누우면 왼쪽 코가 막혔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오른쪽이 막혔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인민군이라는 말처럼 좌우로 쏠리는 몸이었다. 나도 모르게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내 의지로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고통의 영역과 강도는 꽤나 넓고 단계적이었다. 그렇게 다양하고 번잡스럽게 아플 줄이야. 얼마나 아픈지를 1에서부터 10으로 등급을 놓고 느껴보기로 했다. 절반을 넘긴 6이나 7같았다. 10까지 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프고도 아프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침묵하는 지성이 비난받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죽은 지성은 존재 이유가 없으니까.

금요일. 열이 났다. 전세는 매우 불리했다. 열은 내 몸을 바삭하게 태워버릴 기세였다. 아군과 적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그 동안 이렇게 무거운 머리를 몸의 가장 윗부분에 얹어놓고 다녔구나 싶었다. 얼굴도 예외는 아니어서 눈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책 한 페이지, 한 줄도 읽을 수 없었다. 무게가 느껴졌다.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우면 눈이 쇠구슬로 변해 피부 안쪽으로 들어가 박히는 것 같은 압력을 전달했다.

그 압통을 느끼지 않으려면 의자를 뒤로 눕히고 발을 올려 수직과 수평의 중간 지점에 몸을 뉘어야 했다. 나는 정비례 그래프처럼 의자에 의지하여 바닥과 허공의 어느 지점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자전축이 적당한 기울기로 있어야 계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듯 균형도 중요해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있어야 했다.

이 경험은 꽤나 특이한 느낌을 주었다. 적당한 지점에서, 적당한 온도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 기울기가 점점 바닥으로 기울어져 평평해질 때 비로소 내 모든 일정도 끝난다는 것을 감기를 앓으며 깨닫다니. 다짐했다. 적당한 기울기로 살아가자고, 그리고 적당히 아프자고. 제발.

토요일.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려고 했다. 전세가 불리하면 주변국에 지원병을 요청하는 법. 이비인후과에 가면 의사가 내 몸에 보낼 용병들을 물색해서 처방해주거나 필요하면 주사기로 발 빠른 특수요원을 투입해주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새벽까지 눈이 무거웠는데 다행히도 아침이 되니 훨씬 부드러웠다. 여전히 머리가 울렸지만 눈을 뜨고 책을 볼 정도는 되었다. 전시작전권을 의사에게 넘겨주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적의 퇴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몸살이 조금씩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잠을 깨우는 느낌이 좋았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눈부셨다. 식구들의 말소리는 정겹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도 경쾌했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소리도 전혀 시끄럽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 것, 풍성한 머리카락이 두피를 감싸고 있다는 것, 하다못해 문자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누를 수 있는 손가락이 열 개나 된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일요일. 적의 패잔병들이 약간 남아있었지만 전세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바이러스는 내 몸을 그렇게 분탕질을 하고 이레 만에 물러갔다. 열을 지피던 몸은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되었다. 눈 밑은 그림자가 들이치고 볼은 움푹 패고 피부는 다 들떴다. 코 밑은 헐었고 입술도 갈라졌다. 며칠 운동을 못했다고 근육도 축 처졌다.

집안도 전쟁을 치른 듯했다. 콩켸팥켸 분리 안 된 세탁물, 라면봉지가 굴러다니는 부엌, 거실은 청소를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났다. 재건하고 정비하는데 하루에서 이틀정도 걸렸다. 감기 덕분에 사십대의 어느 마지막 7일을 코 푼 휴지와 함께 침대에서 보냈다. 그래도 좋았다. 새해 첫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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