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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 김경

에세이향기 2021. 5. 10. 09:17

이별 / 김경

 

 

 

밖이 잠잠하다. 이른 아침부터 그렇게도 요란하더니 어느새 정적이 감돈다. 아무것도 손에 잡지 못하고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던 터다. 목을 빼고 내다보니 우리 집 창문 위로 뻗어있던 고가 사다리가 없다. 이제 정말로 간 건가. 애써 담담했던 마음이 무너진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입주를 해서 여태 살았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 그녀와 친구로 지냈다.

며칠 전 이별주를 나누면서 밤이 늦도록 이 식당 저 카페를 전전했다. 우리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에 부슬비 내리는 밤길을 우산도 없이 걸어 집으로 왔다. 어른이 되어 만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였던 그녀가 갑작스런 이유로 가게 된 사실에 적응되지 않기는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삼십대의 끝에서 우리는 처음엔 데면데면 지나쳤다. 조금은 차갑게 생긴 외모의 그녀와 말을 턴 것은 아이들이 한 반이 되면서부터였다. 보기와 달리 그녀는 상냥하고 친절했다. 동갑내기이면서도 한참이나 어른 같다가 또 어떨 땐 천진난만한 소녀로 보이기도 하는 카멜레온 같은 여자였다. 인연이 될 사람은 알게 모르게 상대의 인생 속으로 스며드는 모양이다. 비슷한 일상과 육아를 공유하며 우리는 차츰 서로에게 친숙해져갔다.

함께 산을 오르고, 수영을 배우고, 문화센터를 들락거렸다. 그녀가 제빵사 자격증을 얻어 신나게 빵을 구워오면 나는 부침개를 만들어 날랐다. 어느 날엔 손수 만든 헝겁인형이, 다른 날엔 고운 꽃무늬 앞치마가 우편함에 들어있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은 채 우리는 우언가를 자연스럽게 나누길 좋아했다.

그녀는 속상한 일이 생기면 스스럼없이 울었고 술을 마시자했다. 술을 못하는 나는 그녀가 취할 때까지 기다렸고 속내를 받아주었다. 때로 반대일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비밀이 없게 되었는데 차마 말하지 못할 사연까지 말하고 들어주었다. 남편과의 갈등을 속 시원히 털어놓았으며 서로의 자식을 응원했다. 신뢰가 쌓이면 아무리 부끄러워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우리는 단 한 번도 서운해 하거나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삶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그녀를 보면 나의 속물근성이 저절로 꼬리를 감추었다. 남편을 도와 부지런히 사업장을 들락거리면서도 자투리 시간을 배움으로 할애하는 부지런함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상대의 행복지수를 올려주는 이상한 매력을 가진 그녀는 인생의 모범 답안 같은 존재였다.

이제 더 이상 엘리베이터에서나, 시장가는 길에서 그녀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시골에서 가져온 채소가 아무리 남아돌아도 위층 현관 앞에 가져다 놓을 수도, 해마다 봄이면 우유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그녀 남편의 명필 ‘입춘대길’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밥이 모자란다고 빈 그릇을 들고 오르내리는 일도, 야심한 밤에 넋두리를 들어달라고 아파트 마당으로 불러내는 일도 이제는 없을 터이다. 밥맛도 잃고 창밖만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문자 하나가 날아든다.

‘친구야 이제 간다. 잘 살아. 얼굴 보면 울 것 같아서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떠난다.’

서로를 안다는 것은 이처럼 불편하고 어렵다. 몇 계단이면 불 수 있는 거리에서 똑 같은 심정으로 우리는 그렇게 작별하고 말았다. 상대방을 위해, 아니 자신을 위해 둘 다 그리했다. 영원히 못 보는 것도 아니련만 여느 연인의 이별 못지않은 것은 그 동안의 정리(情理)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새로운 터전에서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기꺼이 자기 앞의 생을 보듬는 성정이 낯선 곳이라고 다르지 않을 게다.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가며 자신을 담금질했던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차마 잊지 못할 거라던 말이 생생하다. 크거나 소소한 이별이 수도 없이 찾아오는 인생, 오늘만큼은 한량없는 허전함 속에 나를 내버려 두어야 할 것 같다.

낯선 감정은 해가 질 때까지 내 야윈 영혼을 흔들 것이다. 막 과거가 되기 시작한 오늘은 무심한 이별 앞에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한 날로 기억되리라. 떠난 여인은 이따금 안부를 전해 올 것이고, 남은 여자는 오며가며 습관처럼 그 집을 올려다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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