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령 / 윤남석
【듬성듬성 돋은】 그령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긴다.
잔디 마당에 바소 모양 잎사귀가 어지간히 거슬리게 한다. 몇 번이고 뽑고 호미로 뿌리까지 캐냈지만, 잠자리 눈곱만 실뿌리라도 남아있으면 어김없이 살아나 성가시게 한다. 마당에는 그령뿐 아니라 질경이, 토끼풀, 새포아풀, 피막이풀, 바랭이 등이 여간 자드락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 잡초와의 긴 싸움에서 치러야만 잔디밭을 지켜낼 수 있다. 잡풀의 질긴 근성은 마치 불겅거리는
쇠심떠깨(힘줄이 섞여 있어 질긴 쇠고기)
같다. 화사하거나 우아하지도 못해 눈 밖에 난 찬밥 신세지만, 은근히 시선 잡아끌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이음달아 줄기를 키워내는 왕성함에 눈길이 온통 잡풀로 쏠리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그중에서도 질경이와 토끼풀, 그리고 그령의 참을성과 번식력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령은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풀을 묶어 은혜 갚았다는, 고사 성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바로 그 풀이다. 그러나 유년 시절을더듬으면, 그령은 보은報恩과는 거리가 먼 짓궂은 장난질에 이용된 적이 많았다. 매어 놓은 그령 줄기에 그만 엎어지기 일쑤였다. 새참 들고 그령이 빼곡한 농로를 걷다가 걸려 넘어진 적도 있었다. 주전자 뚜껑은 튕겨지고, 미숫가루 타 놓은 시원한 물을 그령이 홀랑 뒤집어쓰고 멋쩍어하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민다래끼가 생기면 돌멩이를 한뎃솥처럼 걸어 놓고 다래끼가 난 쪽의 속눈썹을 뽑아 그 위에 올려놓고 다래끼 파는 풍습이 있었다. 그 다래끼 팔 욕심에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령 사이에 돌로 솥단지처럼 꾸며 놓은 것을 무심코 걷어차기도 했다. 그 쌓아 놓은 돌을 걷어차서 다래끼가 옮은 일은 없었던 것 같으나, 재수 옴 붙은 것 같은 기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농로를 걷다 보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널려 있는 그령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이다. 발길에 채고 차와 경운기 바퀴에 밟혀, 보통 얼갈이배추처럼 포기를 펼치고 있는 편이다. 가장자리에 자라는 그령은 수난을 피한 탓인지 줄모양의 잎을 꼿꼿이 세우고 나팔대지만, 그령 줄기는 대체로 질긴 편이어서 소도 잘 먹지 않는다.
양질의 토지에 자라는 풀이나, 척박한 길가에 가까스로 뿌리 내린 한 포기 풀의 의지는 같을 것이다. 그러나 조건상 애로점이 없이 자라는 풀보다는, 거칠고 메마른 땅에 돋은 풀의 의지가 더 대견할 때가 있다. 그령은 적응성이 큰 편이어서 투박한 땅에도 수염뿌리를 두둑이 내린다. 그래서 허술한 논둑이 터지거나 하면 농로에 있는 그령을 삽으로 떠서 터진 자리에 옮겨심기도 한다. 그령이 땅을 여무지게 포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에만 자라는 식물이 바로 그령, 질경이, 토끼풀 등이다. 차나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키 큰 잡초에게 밀려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일 게다. 달갑잖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농로를 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운명도 참 얄궂다. 길가에서 버티려면, 차바퀴의 육중한 무게와 발길에 자근자근 밟혀야 하는 설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리저리 채고 바퀴에 짓눌려도 견뎌야 하는 것이 숙명이라면, 너무 모진 생각일까. 질경이는 수레바퀴에 밟혀도 살아남는 풀이라 하여 차전초車前草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오죽하면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까.
어렸을 때, 보리 싹이 움트면 보리밟기를 했었다. 보리를 잘금잘금 밟아 줌으로써 웃자람을 막고, 내한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다. 밟아준 보리는 건생적 생육과 세포액의 농도 상승으로 뿌리의 수 및 양을 증가시킨다. 그렇기에 보리를 고루 밟아 만만하게 할 필요가 다분했다. 하지만 그령, 질경이, 토끼풀 등은 농로에서 사시장철 엄청난 답압踏壓 스트레스를 견뎌야 한다. 밟히면서 자라는 가탈 많은 팔자다.
혹독한 운명은 강한 [맷집]을 보유하게 만들었다.
한방에서는 그령을 지풍초知風草라 부르며, 뿌리 윗부분을 동통疼通 등에 사용했다고 한다. 밟히고 채었던 뿌리 윗부분을 통증을 완화하는데 사용했다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속으로 삭이며 시나브로 트인, 억세고 질긴 그령만의 집념이 응축되어서일까. 밟혀 본 사람만이 그 심정을 안다고, 밟히면서 크는 그령이 그 아픈 심정을 헤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다시 마당에 돋은 그령의 줄기를 힘껏 쥐어뜯는다. 뽑히지 않으려고 뻗정다리를 한다. 이제껏 밟히면서 쌓인 오기에 이골이 났을 법도 하다. 그렇게 쉽사리 뽑힐 것 같았으면 지독한 답압에 진작 몸서리쳤을지도 모른다. 잔디 마당에 돋은 그령을 뽑아내는 이유는 잡풀이기 때문이다. 일삼아 굳이 심지도 않았을 뿐더러, 잔디의 생장에 방해가 되므로 어쩔 수 없이 제초해야만 한다. 원치 않는 장소에 스스로 발을 디뎠으니 적당히 제어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작물이든 뭐든 상황에 따라 잡풀이 되기도 하고, 작물로 남기도 한다. 그 선택은 오직 인간이 결정한다. 원치 않는다면 곧바로 잡풀로 분류된다. 그령이 강둑이나 농로에서 자라고 있다면 어땠을까. 인간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데 굳이 잡풀로 규정했을까.
그령은 요란하지도 않다. 그저 주어진 땅에서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크고 싶어 할 뿐이지만, 인간의 소견 좁은 기준에 어느 정도 가합하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그 고상한 인간의 심기에는 더 많은 잡풀이 자라고 있다. 이기심, 시기, 질투, 이간, 험담, 탐심, 교만 등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어떤 것은 그령만큼이나 억세고 질겨서 쉽게 뽑아내기도 힘들다. 어지간해서는, 인간 속내에 가득 찬 잡풀의 완전 제초가 불가능하다. 마음속에
그들먹한
잡풀도 제대로 못 뽑으면서 마당에 돋은 풀 한 포기에 집착하는 꼴답잖은 짓을 하고 있다. 눈에 좀 거슬린다고 잡풀이라 규정짓고, 곧바로 응징을 가하는 성마름이 쑥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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