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적(軌跡) /윤남석
오동나무 줄기는 뒷날개 보호망 아래쪽에서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관통되었다. 굵은 줄기는 전․후망 고정 장치를 사정없이 찢었고, 보호망의 외주연테는 표피에 잔인한 궤적을 퍼렇게 그리고 있다. 마치 오동나무 토막이 유선형의 날개를 꿀꺽 삼켜버린 듯하다. 축받이에 달려있는 날개는 강하게 회전하며 찰나적으로 예리하게 후벼 판 듯 박혀 있다. 전동기가 회전축에 붙은 날개를 힘껏 돌리려했지만, 오동나무는 몸통이 심하게 베이면서도 악물스럽게 날개의 회전을 막아선 것처럼 보인다. 오동나무는 복부에 박힌 그 플라스틱 날개 때문에 여태껏 겨워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전․후망 고정 장치가 터지면서 질긴 스테인리스 재질의 외주연테가 오동나무 줄기를 심하게 옭아매고 있다. 통고痛苦의 여파가 얼마나 컸으면,
넉 달 전에 베었다는데도 진한 수액을 각혈하듯 뱉어낸다. 부름켜를 쥐어짜는 고통의 몸부림이 얼마나 컸으면 아직도 저렇게 진물을 쏟아내는 걸까. 외주연테가 부름켜와 체관까지 꽉 움트러 쥐어 혈액순환 부족으로 혈징血癥이 생기고, 그 여파로 인한 부종때문인지 도톰한 마디처럼 부풀어 올라 있다. 그 아물지 않은 생채기에서 속살을 뭉그러뜨렸던 아픔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깊숙이 팬 상처 자국에는 고름이 곪았다가 말라붙고 다시 진물이 배어나왔던지 엉버틈한 딱지가 겹겹이, 부스럼처럼 돋아 있다.
뒤쪽 전동기 부분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지만, 요동장치는 안타깝게도 부러지고 없다. 목놀림 부분엔 노랑, 파랑, 빨강의 잘린 전선이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던 지주支柱를 그만, 허무하게 놓아버린 책망에 사로잡혀서인지 풀 죽은 채 쳐져 있다. 그 몇 가닥 전선은 참수당한 목덜미에서 삐져나온 핏줄처럼 음침스럽게
나탈댄다. 이 오동나무는 사십 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춘천 시내에 있는 한 폐가에서 베어온 것이다. 홀로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굳게 쇄문鏁門되었다가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비로소, 짜든 대문의 잠금장치가 풀려지게 되었다. 여름이면 모터의 돌대에 달린 날개가 바람을 일구어 할머니 이마에 송골송골 돋은 땀을 식혀주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만 고장이 났던 지, 뜰아래채 한 쪽에 버려졌다. 탈이 나는 바람에 안방에서 귀염 받던 가재기물이 졸지에 변소 옆에 나뒹굴게 된 것이다. 선풍기는 신일산업에서 초창기에 생산하던 모델로 당시 아주 귀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회전축에 붙은 날개가 돌지 않자 쓸모없는 고물로 낙인 찍혀 쫓겨나고 만 것이다. 선풍기는 끝내 고물장사에게 건네지지 못하고, 뜰을 발밤발밤 거닐던 할머니의 걸음도 사라진 빈 집 잡풀 속에서 풀빛에 물들여지고 있었다.
쀼죽한 돗바늘 같은 풀숲에 파묻혀 할근거릴지라도 풀벌레의 속삭임과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로 갈강대는 목을 축이며 악물고 버티었다. 퍼붓는 억수에 모터가 잠겨 뇌관이 서서히 녹슬고, 매서운 삭풍에 혼신이 얼찌근해도 몇 십 년을 참고 배겼다. 달보드레한 달빛이 처진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따사로운 볕에 눅눅한 몸을 말리면서도, 담벼락 너머에서 들리는 웅성대는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자전거 페달 밟는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아이들 숨바꼭질하는 소리, 취흥에 젖어 부르는 구슬픈 유행가 소리에 올랑거리는 가슴을 다독이기도 했다. 빨판이 붙어 있는 덩굴손으로 담장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담장 너머의 바깥세상을 보고픈 마음에 홀쭉해진 몸을 추슬렀다. 동체는 점차 녹이 나서 실마리가 헝클어지고 꽁지깃 빠진 새처럼 몰골사나워도, 마음은 청올치(칡의 속껍질로 꼰 노)처럼 꼬장꼬장했다. 그 애절하고 간곡한 마음을 헤아렸던지
씨눈胚 하나, 가 발아했다. 싹은 뒷날개 보호망을 곰질거리며 망얽이 사이로 터서 스크루 모양의 날개 앞에서 비트적거리더니 앞날개 보호망 위쪽으로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오동나무의 속성을 보호망의 촘촘한 살이 빗장처럼 조이고 있었다. 금속 뼈대는 오동나무의 어린줄기를 단단히 살결박하고 있었다. 오동나무는 새끼손이 겨우 들어갈 만한 너비의 살창을 벌리려고, 간힘을 아랫배에 모으고 가쁜 숨을 참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선풍기는 선풍기 대로, 머리털을 쥐어뜯으면서 턱뼈가 궤열되는 아픔을 견딜 뿐이었다. 오동나무에 불그죽죽한 핏발이 불뚝심지처럼 솟고 단장斷腸의 괴로움을 움켜쥐는 참상이 핑핑하게 이어진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참렬함으로 얼룩졌다.
에르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템페라화「절규絶叫. The Scream」가 순간 오버랩 된다. 인간의 내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으로 현대인의 공포심과 광기를 표현한 걸작이다. 전율하며, 손으로 귀를 막은 것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극도의 불안 상태를 의미한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 가는 것 같았다, 는 뭉크의 표현처럼 암청색의 도시와 거리에 비명의 음파가 산란하게 흩어진다. 절망적인 심리 상태를 표현한 색채. 오동나무와 선풍기가 내질렀던 비명은, 뭉크가 드러내고자 했던 현대인의 잠재된 발작과 어쩌면 지독히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로부터 오동나무는 봉황이 깃드는 나무라하여 상서롭게 여겼다. 봉황이 찾아들어 청아하게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즐겨 심던 수종이다. 또 시원스럽게 넓은 잎이 선비의 절개를 상징한다 하여 서당이나 정각 주변에 많이 심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에라
작자 미상의 시조가 있다. 봉황은 차마 아니 올지언정 가지에 휘영청 가월佳月만 걸려있어도 좋으련만, 오동나무는 무슨 팔자가 그리 모질었던지 거추장스런 선풍기를 얽동이고 있어야했다. 무지몰각한 쇠테의 압박에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참한 심경을 누가 알까. 물관과 체관이 찌그러지도록 갈비뼈 깊숙이 파고든 날개 때문에 뿌리털을 통해 뽑아 올린 물 한 모금을 들이키려면, 마치 목에 대추 가시가 박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다갈색 털이 돋은 잎 뒷면의 숨구멍으로 간간히 호흡에 필요한 산소를 들이킬 뿐이다. 낡은 선풍기를 걸쳐 메고 있는 형상은,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 바위산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모습처럼 보였을 게다.
석상동石上桐, 이라는 게 있다. 거문고 동재桐材로서 산중의 폭포바위 위에서 자란 오동나무로 재질이 강유剛柔를 겸전하고 가벼워 으뜸으로 친다. 우레와 같은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단단한 돌 사이에 굳건히 뿌리를 튼 나무이기에 그렇게 매겨지겠지만, 사시장철 피비린내 나는 고통을 속으로 속으로만 삼킨 이 오동나무도 거문고의 울림통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비통한 음을 한껏 지르며 자란 이 오동나무야말로 한恨 맺힌 정서를, 가슴 쥐어뜯을 만큼 기막힌 여운으로 울려줄 것 같기 때문이다.
거문고 大絃올려 한 棵 밖을 짚었으니
얼음에 막힌 물 여울에서 우니는 듯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를 좇아 마추나니
거문고 줄이 울리니 빗소리도 장단을 맞췄다는 고산孤山의 시조다. 가뜬한 거문고 가락이 자연이 빚은 심사를 진정 우럭우럭 붙당겨줄 만한 품위를 지닌 것으로 대두되어 있다. 바로 이 오동나무야말로 그 예민한 감각을 스르르 끌어내기에 안성맞춤이지 않겠는가. 현絃이 떨릴 때 울림통도 같이 떨려야 공명 현상이 극대화되는데, 안으로 쌓인 처절한 멍울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과 피눈물 흘릴 곡조마저도 애절하게 그려내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는가.
몽 사나운 습성을 부린 탓에 선풍기는 담장 너머를 내어다볼 수 있는 높이까지 당겨 올라올 수 있었다. 마뜩치 않으나 묵묵히 그 투정을 들어준 오동나무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솔깃했던 바깥세상은 선풍기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강직성 경련으로 뼈마디가 벋버스름해지고 차돌같이 굳은 관절로 고통 받으면서 바라본 세상은 어떠했을까. 새골창처럼 가지런했던 안면이 제멋대로 일그러진 만신창이가 되어, 사십 년 만에 접한 세상은 그토록 염원하던 넉넉한 풍경이었을까.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세상을 느즈러진 피부로 체감하면서 혹여 자신의 몰골을 궁상스럽게 느끼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오랜만에 본 인간에게서는 다정다감했던 이전보다 황폐한 인정미를 접하고는,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하고 눈알을 오히려, 홉뜨지 않았을까.
사십 년 넘게 세파와 부딪친 나도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종종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사십 년 만에 세간世間을 바라보고서 얼마나 오죽잖았을까. 모든 것이 초름했지만 푸근하기만 했던 예전의 정이 애틋하게 그리워지지는 않았을까. 자학과 그 고통을 감내하며 이룬 성과가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져 허무하지 않았을까. 어렵사리 성취했을 때 젖어야 할 포만감이 결코 아닌, 허망스러움으로 피부에 와 닿으면 서운한 감정이 물기 빨아들이는 티슈처럼 빠르게 들어차는 걸 때로 경험한다. 무작정 높은 곳만을 오르려는 심리는 뒤돌아볼 틈도 주질 않고 우리를 검질기게 강요할 때가 있다. 막상 그 자리를 꿰찬 후에 지나온 뒤를 돌아보며 느끼는 환멸감을 선풍기는 속절없이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바깥세상에 대한 들뜬 기대가 와르르, 어이없이 무너지던 여음이 여태껏 주위에 무겁게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맹렬히 나부댔지만, 이제는 박제가 되어 공방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원망하면서도 사모한다는 원모怨慕, 라는 낱말이 오동나무와 선풍기에게 어울릴 것 같다. 영 곰살갑지 않음에도 위아랫물지지 않고 부둥켜안고 지내온 풍상이 주마등처럼 까물거린다.
창을 통해 들어온 서녘햇살이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양쪽으로 삐져나온 날개 보호망이 두 손 모으기 위해 구부린 팔꿈치 같다. 그림자는, 돌아앉아 손을 모으고 기도드리는 형상을 자아낸다. 그림자에서는 완벽하게 융합된 모습이 그려진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마치, 모든 갈등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 같다. 중화된 이 침정沈靜이 오래도록 깨뜨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며, 블랙홀Black Hole의 구렁텅이에서 탈출하듯 공방을 빠져나온다. 순간, 나선형의 강력한 맴돌이가 휘감는 듯 현기증이 인다. 하늘이 샛노래진다. 뭉크의「절규」에서 본 공황恐慌이 용올림 치는 듯하다.
오동나무와 선풍기처럼 우리 인생도 수많은 감정의 굴절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 굴절된 단면을 들여다보면 경이驚異와 해이解弛, 수치羞恥와 회의懷疑 등이 함축되어 흐무러져 있을 것이다. 선풍기가 느꼈을 삶의 부질없음도 체감하고, 오동나무처럼 무연한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자랄 수도 있다. 인생은 그렇게 체념적일 때도 있지만, 또 나름대로 뼈저린 고통을 감내하면서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보면, 현세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하려는 몸짓이 바로 삶이란 걸 깨닫게 되지 않을까.
공지천에 아름다운 꽃노을이 수놓기 시작한다.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불타는 노을무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한 마리 나비의 생애도 고생에서 고생으로 점철된다.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키위해서는 초주검이 될 정도로 질긴 고치를 힘겹게 찢어야 한다. 한 곤충학자가 안타까운 심정에 칼로 고치를 살짝 찢어주었더니, 그 나비는 며칠 살지 못했다고 한다. 고苦는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바로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명제가 되는 행고行苦(생멸의 변화로 받는 괴로움)는 현상세계, 그 자체가 고苦라는 뜻이다. 생生은 진정, 그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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