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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에세이향기 2021. 5. 1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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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問), 문(門)을 열다 / 허 석

 

 

닫혀있는 문이다. 아니, 열리지 않는 문 속에 산다. 소통이 없는 문의 안과 밖은 다른 세계, 너와 나, 관계의 단절로 이어져 서로가 서로를 들여다볼 수 없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거나 아파트 현관문처럼 견고한 벽으로 가로막고 있어서 허락 없이는 한 발자국도 자기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문이다. 통로가 되어야 할 문이 움직이지 않는 경계가 되어버렸다.

시골에 거주할 때였다.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음에 든 집이 그랬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큰길 쪽은 아래채가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고 대문은 일부러 숨겨둔 것처럼 좁다란 골목 안쪽에 나 있었다. 집 내부가 다른 사람에게 전연 들여다보이지 않고 집안에서도 바깥이 전연 보이지 않아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구조였다. 주변에서는 아래채를 허물고 길 방향으로 나지막한 담과 대문을 내라고 권유하지만 집이 남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그 자체,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공간, 사실은 그렇게 은폐된 집이 좋았다.

혼자서만 잘살면 되는 줄 알았다. 수혈도, 헌혈도 없이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 가는 길인데, 내 삶을 누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닌데 남과의 친숙한 어울림이 뭐가 그리 필요하겠느냐고 따졌다. 가능하면 남에게 의지하거나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독자이며 독립자로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꿈꾸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한 적도 없고, 슬퍼도 슬프다고 내색한 적이 없었다.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적빈한 삶은 고통과 상처도 혼자서 삭여내는 데 익숙해져 갔다.

세상도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방관자였지 참여자는 아니었다. 어쩌면 유아기적 낯가림이나 소아병적 자존감의 한계를 아직 청산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벽과 최고이고자 하는 욕심에 남의 평가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흉이나 흠이 될지 모르는 위험부담은 차라리 피하는 게 나았다.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무대 위의 주인공과는 다른 것이었다.

박정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었다. 남의 이해와 관심을 위탁하지 않은 만큼 남에 대한 배려와 호의를 베푸는 데도 인색했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보아도, 외로운 속마음을 드러내고 달래주기를 바라도 제 스스로 이겨내고 감당해야 할 문제라며 무덤덤하기만 했다. 빚진 일도 없는데 남의 그것을 알아주어야 할 이유와 까닭이 없다는 식이었다.

많은 사람과 가까이 지내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편이 좋았다. 고독은 자유처럼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차치하고라도 서로의 생활환경이나 정서, 가치관이 다른데 굳이 자리를 함께할 필요가 없지 않나 싶었다. 누군가에 의해 흔들리기보다는 차라리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나만의 세계에 오롯이 있고 싶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평가받는 것이 불편했다. 블로그는 있었지만 읽기 전용만 허용했을 뿐이지 댓글 달기는 차단했다.

은폐는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 아니었을까. 자기가 세운 삶의 기준과 방향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고집, 자신의 이데아를 꿈꾸는,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이 집단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자신의 성역을 지키고자 하는 비밀스러운 선택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 공간에 나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과 위무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지만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감과 같은 것이었다.

현실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두고자 하는 내 삶의 본질은 나와 맞지 않는 세상의 회피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어리석음을 닮은 단순함, 현실 감각이 결여된 무모함, 둔감함에 더 가까워 보이는 초연함이었다, 용기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는 모호함과 어중간함에서 오는 패배 의식이거나, 가난하다거나 출세하지 못한 자책감이나 열등감은 혹시 아니었을까. 지혜보다는 지략으로 살아야 하는 삶에 익숙하지도 못하고, 살아내기 위해 때로는 작위적이고 가식적인 상황에 순치적이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식의 과도한 자주성이 의존성의 뒷면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 역시 내면에는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억압되어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교감을 나눌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자신의 성채 속에 갇혀 스스로 만족한다는 역설적 자유는 어쩌면 세상 속으로 편입되고픈 갈망의 다른 표현이거나 욕구의 반작용일 수도 있었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달라고 자신의 문 앞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닫혀있는 문은 남이 쌓아놓은 경계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의 벽이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나와 문화와 정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치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이 다르다는 이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상대방의 온전함을 강요하는 것도 물색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같은 문법, 같은 온도를 가진 사람을 찾느라 세상 모든 일에 편견과 선입견만 앞세운 꼴이 아니었을까.

문을 열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가도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면 황급히 닫았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강한 척을 하려고만 했지 외롭고 힘에 겨운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훈련은 하지 못했다. 내 안의 불편한 감정은 남의 위로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관계’밖에서 혼자만 편해지려는 습관에 너무나 익숙해진 결과였다.

열리지 않는 문은 인간 사이의 간극을 말함이 아닐까. ‘나’와 ‘너’의 관계가 ‘우리’가 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나와 세상과의 소통이 되고, ‘나누어짐’을 통해 비로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서로 관계 맺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홀로 났다가 홀로 떠나지만 살아 숨 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줌의 관심과 위로를 갈구하는 나약한 존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빗장을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을 열어야겠다. 죽을 때까지도 깨우치지 못하는 깨달음보다 덜 숙성하고 덜 알더라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생의 중심, 세계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일임을 알아야겠다. 봄을 맞으러 창문을 열 듯, 경계를 지우는 스푸마토 기법처럼 그동안 꽁꽁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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