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수필

손빨래하기 / 정해경 

에세이향기 2021. 5. 8. 10:32

손빨래하기 / 정해경 

 

빨래거리가 욕실 앞에 쌓여있다. 세탁기에 넣을까 손세탁을 할까.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세탁기로 빨려면 같은 색깔끼리 분리해야 하고 양이 웬만큼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손으로 빨면 귀찮고 물 낭비가 심할 텐데, 어떻게 할까. 세탁물들은 현장에서 잡힌 죄인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며 묻혀 들인 더러움이 어찌 눈에 뵈는 것뿐이랴. 죄인을 닦달하여 자백을 직접 받아내는 것도 짜릿하지 않을까. 힘 뒀다 뭐하나. 그래, 손으로 반 번 빨아보자.

 

피의자들의 행태도 가지가지다.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후줄근해져 기가 꺾이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청바지처럼 뻣뻣하게 오히려 심이 박히는 놈들도 있다. 더러는 아예 풀이 죽어버려 한 손안에 쥘 정도로 존재감이 작아지는 것도 있다.

 

일단 물에 흠뻑 젖은 놈 하나를 건져든다. 점퍼로 얼굴을 가린 죄인처럼 멱살을 잡힌 채 축 늘어져 있는 꼴이 조금은 볼썽사납다. 그것을 빨래판에 인정사정 없이 패대기를 친다. 철퍼덕, 떨어지는 소리는 죄수 하나를 심문하기 위해 취조실로 불러들인 다음 힘껏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린다. 널브러진 빨랫감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가며 속속들이 비누칠을 한다. 악명이 드러난 고문 기술자처럼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내고야 말겠다는 듯, 치대는 손길이 비장하다. 비눗물이 스민다. 노련한 수사관은 죄질이 고약할수록 매끄럽고 부드럽게 다룰 줄을 안다.

‘불어 봐. 불면 다 용서해줄게’

드디어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된다. 조금씩 자신을 녹여가며 달콤하게 다가가는 비누 거품 속에서 더러운 때는 더는 숨을 곳이 없다. 한 손으로는 빨랫감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쪽 끝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반대편 끝을 움켜쥐고 치대기 시작한다. 숨어 있는 때를 향한 집중공격이다. 그 어디쯤에 내 안의 스트레스도 덤으로 넣어 팍팍 치댄다.

 

거품이 인다. 거품이야말로 빨래의 자백이다. 한숨이고 기도며 눈물이다. 크고 작은 거품이 일면서 옷감 속의 찌든 때가 줄줄이 불려 나온다. 거품에 묻어 나오는 거무죽죽한 땟물. 더욱 다그치듯이 옷가지를 비빈다. 줄때가 묻어 있는 칼라나 소매 깃 따위는 양손에 모아 쥐고 손톱까지 세워가며 총력전을 펼친다. 이런 취조에 어지간한 죄수는 맥을 못 추고 투항한다.

 

헹궈내는 일은 한층 격을 높인 여죄 추궁이다. 이제 더러움은 조금의 남김도 없이 옷에서 떨어져 나와야한다. 흔들고 비비고 두드려가며 비누든 때든 찌꺼기도 남지 말고 어서 나오라고 채근한다. 받아 놓은 맑은 물과 헹궈 낸 물이 별반 다르지 않을 때까지 취조는 계속된다. 연이은 시달림에 지칠 대로 지친 옷가지들이 널려져 있다. 헹궈내는 일이 어지간히 끝났다 싶으면 양손에 나누어 쥐고 힘을 다해 비틀어 짠다. 남아 있는 물기까지 털어내는 마지막 순서다. 이제부터는 건조다. 때가 찌들기 전, 결백한 몸으로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욕실에서 물기를 뺀 후 건조대에 줄을 세울 때마다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루 종일 햇볕이 드는 넓은 집에서 마당을 가로질러 든든한 빨랫줄을 매고 꺽다리 바지랑대 하나 세웠으면 더없이 흡족할 텐데. 그리고 양쪽 어깨를 집게로 집어 투명인간에게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빨래를 널고 싶다. 바람 부는 대로 몸을 흔들며 팔을 휘저어 물기를 날려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신이 날까. 빨랫줄로 허리띠를 맨 채 건들거리는 다리들. 쏟아지는 햇볕 아래 맘껏 춤을 추며 심신을 위로 받는다면 옷가지인들 어찌 좋아하지 않을까. 빛이 겨우 스며드는 베란다에서 좁아터진 건조대에 매달려 얼차려 자세로 사열 받듯 말라가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리.

 

옥문이 열리듯, 이제 빨래는 집게에서 풀려난다. 고된 일을 마치고 난 후처럼 뻣뻣하게 굳은 빨래가 두서없이 쌓여진다. 다소 흐트러진 모양을 바로잡고 접힌 채로 마른 부분을 반듯하게 펴서 차곡차곡 갠다. 하나하나 옷 모양이 정돈되고 자잘한 솜털까지도 한 방향으로 줄지어 눕는다. 세탁 전의 헐렁했던 올과 올 사이가 좁혀져서인지 다소 줄어든 듯 조이는 느낌이 좋다.

 

물 냄새가 날 듯 말 듯한 깨끗하고 단정한 옷. 세탁 후 새로워진 옷에 팔을 밀어 넣고 풀어진 단추를 채우면 몸 에 착 붙는 착용감. 그리고 잠시라도 산뜻한 긴장감이 돈다. 이제껏 내가 기다린 것은 이런 기분 아니었을까.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세상에 오염되고 속속들이 때가 찌든다.
나도 가끔은 빨래가 되고 싶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콩 팔러 간다/ 이고운  (0) 2021.05.08
단추를 달며 / 정해경  (0) 2021.05.08
연 필/ 모임득  (0) 2021.05.07
낙타표 문화연필/정희승  (0) 2021.05.06
내가 하나의 풍경이 되려면 / 김애자  (0) 202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