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팔러 간다/ 이고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평범한 작물, 콩은 참으로 절실한 곡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위대한 생각으로 보면 궁전이지만 별것 아닌 삶으로 보면 하나의 꼬투리, 콩깍지 같은 데서 태어나 콩콩 뛰놀다가, 비바람에 콩 이파리로 퍼렇게 뒤집어지며 쓰러지고 마는 것 아닌가.
몸이 작아서 콩각시 같았다는 할머니가 콩 팔러 가시는 바람에, 열두 살 비릿하게 자라던 아버지는 콩꽃이 이우는 밭두렁을 안고 앵댕그라지며 울었다고 한다. 주야장천 콩밭 매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며 아버지도 별 수 없이 콩 농사를 지었다. 콕, 콕, 콕, 이랑을 점찍어 콩씨를 넣고 김을 매고, 잎에 노랑단풍이 들고 꼬투리가 벌어져 튀기 시작하면 거두어 도리깨로 타작을 했다. 그것으로 해마다 메주 쑤고 간장을 담궈 식구들을 건사했다.
어린 내 생각에, 젊어서 혼자이신 할아버지가 이상했다.
“할아버지, 우린 왜 할머니가 없어요?”
물으면, 할아버지는 큰 대접의 농주 잔을 단숨에 드시고는 약간의 미안함에 설풋한 시선을 하늘 저쪽으로 던지면서 ‘모올라~’ 남의 일처럼 대답하셨다. 그 궁금증에 아쉬움이 더한 그리움으로 범벅되어 나를 따라다녔는데, 어느 날 골목에서 누가 할머니 안부를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웃으면서 “안식구? 버얼써, 콩 팔러 간지가 오래라네.” 하셨다.
원래 약골이었던 할머니는 서른 중반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좋다는 첩약을 쉼 없이 지어 나르고 약탕기에 부채질을 해가며 살리려 했으나 할아버지는 서른 후반에 그만 홀로 되셨다.
‘콩 팔러 갔다?’
나는 그 말을 새김질하면 할수록 점점 사실로 믿어져서 희망이란 느낌 하나가 작은 것 중의 작은 콩알의 배아줄기세포 같은 한 가닥이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어 못 오는 것이지 언제 와도 오긴 오실 거라고 우리 형제들은 서로 위안하면서 할아버지의 지친 다리를 밟아 드리곤 했다.
도대체 그 콩을 파는 저자는 어딜까? 거기로 간 사람들은 왜 여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세상의 콩들이 다 몰려드는 곳. 좋은 것을 고르느라 세월을 보내고 있을까. 아니면 귀한 콩이 귀해서? 서로 사겠다고 흥정하고 있을까? 어쩌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북적거려 길이 막히고 복잡해서 우왕좌왕 회로를 못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허공으로 멍~, 사라지기도 했다. 근 오십 년을 기다리다 할아버지는 지치셨는지 ‘이제 나도 그만 갈란다’ 하시고는 그 길로 가셨다.
그때 나는 첫 산월이 임박하던 때라 할아버지 가시는 모습을 못 뵈었다. 달을 넘긴 후, 흙내만 자욱한 텅 빈 할아버지 방안을 만져보며 울먹일 때 어머니는 치맛귀를 뒤집어 콧물을 닦으면서 ‘할머니 따라 가셨다’고 했다.
이십 년 후, 장독 안에 찔레꽃이 하얗게 한창일 때, 아버지도 느닷없이 그리로 떠나셨다. 누가 아버지 안부를 물으면 예전에 할아버지 대답처럼 어머니도 먼 산등으로 선웃음을 물기로 버무리시곤 한다. “좋은 데로 먼저 갔소. 거가 그리 좋은지….”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허무를 지켜본 뒤에야 비로소 콩 저자에 대한 의문은 풀렸으나 콩에 대한 생각은 더욱 신성해져만 갔다. 이제 어머니 몸은 고목처럼 굽고 틀어지면서 점점 콩처럼 동그라져 간다. 그런 몸으로도 여전히 콩은 심고 기른다. 마치 콩 팔러 가는 예행연습인양. 그러면? 인류의 조상은 콩? 내 조상도 콩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나를 엉뚱한 상상의 기둥에 붙들어 맸다. 어머니도 그리로 갈 것이며 나도 결국에는 그리로 갈 것 아닌가. 내 후대들도…….
제사가 다가오면 미리 일정심 하여서 가장 공력을 높이 들이는 것이 콩지름 놓기다. 한 달 전쯤부터 소반 위에 콩을 눈높이로 얹어놓고 낱낱을 고른다. 덜 여문 것, 색이 다른 것, 벌레 먹고 쪼그라진 가투들을 다 골라낸다. 그만큼 콩은 상처가 없이 온전해야 한다.
맑은물에 불린 콩을 시루에 앉히고 깨끗한 댓잎이나 짚 또아리를 왕관으로 얹는다. 검은 보자기를 덮어 안정시킨다. 물 담은 자배기에 부메랑 같은 쳇다리를 걸치고 시루를 얹어 물을 자주 끼얹어 준다. 깨끗한 손으로 깨끗한 물을 자주 주어야 잔발 없이 잘 자란다.
어머니는 밤중에도 일어나서 몇 번이나 물을 주곤 하셨는데, 주루룩 또~오옥~ 똑, 마지막 한 방울의 긴 여운, 느낌세포 꼬리에 붙은 텔로미어(telomere)가 방안을 한 바퀴 돌아 청아하게 사라지면서 내 선잠을 다시 꿈결로 데려갔다. 보이지 않는 덩굴손이 허공에 사다리를 놓는지, 어느새 시루운두를 넘어 수둑히 올라서는 콩지름은 짚낱을 이어 동이고 동이고 하면서도 언감생심, 한줌도 뽑지 않는다. 그렇게 백 년을 목욕재계 하면서 머리에 썼던 허물을 스스로 벗겨내고 깨끗한 알몸이 되고서야 제사에 오른다.
집안 대소가의 여인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한줌씩 뽑아 발을 딸 때면 어린 나도 거들었다. 잘 키운 비결과 실패담과 지혜가 오고 간다. 오뉴월 제삿날은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하고 까끌한 베적삼에서 솔솔 풍기는 여인들의 더운 살내음이 콩의 비린내에 섞이면서 피붙이의 운김에 향이 핀다. 생명이란 늘 이런 비릿함에서 오나니.
사람과 뿌리혹을 가진 콩의 생물학적 인접성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생명체 그 이전의 생명력을 제공한 허공의 질소라는 물질, 그 친화적 유전요소를 곰곰 따라 간다. 아래로는 물을 향해 뿌리 내리고, 보이지 않는 물질을 향해 위로 꼿꼿하게 올라오는 그 생명력이 한 말씀 이르신다.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며, 다투지 말고 한 동아리로 뭉쳐야 한다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올라오면서 나를 굽어보고 있다.
어느 날 홀연히 떠나신 어른들이 팔러 간다는 콩, 그 저자는 멀고도 멀어서 돌아오는데 시간이 까마득히 걸릴 것이다. 참으로 까마득히…. 손닿을 수 없는 먼 조상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셔 와서 먼저 간 영혼들을 뵙는 일일진대, 제사는 그 후손들 훈훈하게 모여 빛을 가린 어둠 안에서 순백의 혼들을 경전(慶典)하는 가슴 겨운 묵언이다.
오늘, 혼자 콩지름을 다듬으면서 사람의 뿌리를 생각해 본다. *
*경전(慶典): 경사를 축하하는 식전.
*콩지름: 콩나물을 경상도 사투리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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