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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마경덕

에세이향기 2021. 5. 18. 12:17

나는 점점 울보가 되어 간다

 

다 늦은 저녁답에 새 한 마리가 캄캄한 하늘을 날아가는 걸 보면 울컥, 슬픔이 치민다. 모르겠다. 왜 그리 가슴이 아리는지 모르겠다.
깃들 곳이 없는지. 짝을 잃었는지 새는 혼자고. 날은 저물었고 새의 날갯짓이 무척 지쳐 보인다. 걱정을 하는 사이 새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서러움만 남는다.

 

내 슬픔은 대개 이런 식이다.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쓸데없이 심각하고 정작 걱정해야 할 일은 한없이 관대하고 게으르다. 내 가슴을 치는 것은 지극히 사소한 일.

 

두 달 전,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의정부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의자에 앉아있는 어느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행색이 초라한 늙은 남자였다. 까만 윗도리를 걸쳐 입은 그 남자의 어깨에 비듬이 허옇게 떨어져 있었다.

한때는 그 초라한 어깨에 기대고 살던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을 것. 그 여자는 남자에게 아침마다 머리 감을 물을 데워 바치고 비누 냄새를 풍기며 출근하는 남편의 등에 살포시 기대기도 했으리. 떨어진 비듬을 손으로 털며 환하게 웃기도 했으리.
사내는 양처럼 순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씩씩하게 집을 나섰을 것이고.....힘찬 구둣발 소리로 골목이 환했으리라. 사랑하는 여자의 손길이 스친 그 어깨는 얼마나 의기양양했을 것인가.

 

하지만 이제 사내의 어깨는 늙고 지쳤다.
그 야위고 초라한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줄. 사랑하는 아내는 없다. 살갑게 등을 털어주고 옷에 묻은 머리칼이나 실오라기를 다정하게 떼어줄 아내는 없다.
나는 안다. 세상의 아내들은 안다. 아이를 낳고 똥기저귀를 빨아본 엄마들은 안다. 그 비듬이 가족을 위한 남편의 땀이요 눈물인 걸 안다.

그때 내 손은 낯선 그 남자의 비듬을 얼마나 털어 주고 싶었던가?

 

뭐... 뭐라고? 더럽다고. 지저분하다고?

 

그래, 이제 나는 깔끔을 떨 나이는 지났다. 그 지저분한 것 마저 사랑하고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출처] 그리움, 그리고 나이...(다시 보기)|작성자 마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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