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 최 민 자
‘밤을 깐다’라고 썼다가 ‘밤 껍질을 벗긴다’라고 고친다. ‘깐다’라는 말이 주는 동물적 어감이 낯설어서다. 이 쓸 데 없는 까탈. 요즘의 나는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소소한 것들에 민감해 있다. 생체리듬이 저조해졌는지 행동은 게을러지고 생각은 과민해졌다. 내밀한 침묵으로 골똘하게 돌아앉은 바가지 안의 저 밤톨들처럼.
복숭아나 사과 같은 과일은 향기와 빛깔로 사람을 유혹하고 상큼한 속살을 베어 먹히면서까지 씨를 퍼뜨리는 전략을 쓴다. 알밤은 아니다. 열매이면서 씨앗인 그들은 먹혔다 하면 끝장이어서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내어 줄 여지가 없다. 그 절박함이 자기보호 의지 같은, 견고한 고독을 강요하는가. 야물고 또랑또랑한 이 결실들은 헤프게 농익어 향기를 발산하지도, 풍만한 살빛으로 식탐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밤 뿐 아니라 호두나 잣, 은행 같은 견과들이 다 그렇다. 바늘 같은 가시로 제 몸을 에워싸 애써 고립을 자초하거나 고약한 냄새를 풍겨 스스로 기피대상이 되도록 한다. 소심하고 비사교적인데다 나름의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내향적인 친구 같다고 할까. 매끈한 가죽옷 차림으로 제각기 데굴거리는 밤톨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귀에 익은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아무렴. 하늘 아래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있을라고. 사람도 밤톨도 하루살이도 목숨은 제각각 하나뿐인 걸.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인간이건, 인간에게 먹히는 밤톨이건, 밤톨을 갉아먹는 애벌레건 간에, 알고 보면 등가(等價)의 목숨붙이다. 조금 더 덩치가 크고 더 오래 햇살 아래 머물다간다 하여, 사막과 바다와 무지개를 알고 더 멀리 건너다니며 살아본다 하여, 목숨 줄이 여러 개는 아니라는 말이다. 물려받은 불씨를 소중히 지켜 대대로 전해야하는 가문의 아녀자처럼, 생명의 기를 꺼뜨리지 않고 후대에 물려야 하는 엄숙한 책무 앞에서, 저나 내나 공평한 유전자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도끼 앞이라고 나무마다 다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듯, 칼날 앞이라고 열매들이 쉬 맨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무쇠칼 앞에서는 배통만한 수박보다 손톱만한 쥐밤의 의지가 더 단호해 보인다. 쇠망치로 얻어맞아 으스러지고 깨져도 함부로 속옷을 벗지 않는 호두나, 뜨거운 불판 위에서 살갗이 타들어가야 푸르게 멍든 몸을 마지못해 보시하는 은행알만큼이나 알밤 또한 당차고 결연한 데가 있다. 만만히 얕잡아보고 달려들었다가는 손가락을 다치거나 앞니가 부러져나갈지 모른다.
밤톨 한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깎아 놓은 알밤 같다’는 말이 있지만 깎아 놓지 않아도 알밤은 예쁘다. 밤 까는 도구 같은 것을 달리 예비해 놓았을 리 없는 엉터리 살림꾼의 주방 서랍에서 최 고참격인 맥가이버 주머니칼을 조심스럽게 뽑아 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지언정 쉽게 굴복하지 않는 것들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거든 머리통부터 한 대 쥐어박아야 한다. 왼손 장지를 받침대 삼아 엄지와 검지로 단단하게 결박한 뒤 정수리쯤 되는 곳에 칼끝을 슬쩍 들이대었다가 날렵하게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바슬바슬한 두피에 칼끝이 꽂힐 때 손마디에 걸리는 미미한 쾌감. 그러고 보니 나는 사과 껍질을 돌려 벗길 때에도 일단 탁! 하고 어깨 먼저 내려치는 습성이 있다. 공격의 강도를 미리 암시하여 기부터 꺾어놓으려는 계산은 아니어도 가학적인 데가 있기는 하다. 수렵시대 집단무의식의 원형적 발현인가. 아무튼 나는 순정하게 앵돌아진 저것들의 옷을 단번에 벗기지는 않을 작정이다. 칼끝에서 전해오는 긴장감을 즐기며 겉옷부터 찬찬히 끌어내릴 터이다.
말쑥한 방수복 아래 드러나는 거칠거칠한 비늘옷. 이름하여 보늬다. 귀에는 설어도 아름다운 이 말의 어원이 본의(本衣)에서 왔다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어느 사이 속살에 눌어붙어 일체가 되어버린 자존의 속싸개, 그 속옷이이야말로 본의 즉 ‘진짜 옷’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옷인지 살인지 분간할 수 없는, 내 안에도 비슷한 꺼풀이 있다. 한 껍질만 벗고 다가앉으면 살가운 온기를 나눌 수 있으련만 마지막 한 켜를 벗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옹송그리며 산다.
내복 바람의 밤톨들이 양푼 안에 오소롯이 모여 앉아있다. 다 같은 속내의 차림이라도 그다지 다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하긴, 가시궁전 한가운데 들어앉아 있던 한 울안 형제끼리조차 그리 돈독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속의 연(緣)에 정붙이지 말자고,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라고, 다짐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둥지 밖 하늘을 꿈꾸는 새끼제비들처럼,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튕겨져 나갈 날만 은밀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정머리 없는 제조상궁이 어린 나인의 옷을 벗기듯, 칼자루를 바투 쥔 나는 속곳차림의 밤톨들을 앞뒤좌우로 돌려 세우며 마지막 자존심마저 깨끗하게 벗겨낸다. 보늬를 벗고 각을 세운 알밤들의 상아빛 살결이 단아하다. 조금 있으면 뜨거운 열탕지옥으로 가차 없이 내던져야 할 알몸뚱이들을 한 주먹 가득 집어 올려 본다. 물푸레나무 이파리에 어룽거리던 햇살과, 어둠을 헹가래치던 개울물 소리와, 때죽나무 꽃그늘에 쉬어가던 어린 박새의 노래는 다 어디에 스며 있는가.
희고 단단한 쇄신사리들이 맨몸으로 뒹굴며 털어놓는 마지막 말을 나는 이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줄의 절명시처럼 스쳐버린 별똥별과, 은죽(銀竹)으로 내려 꽂히던 여름 한낮의 소낙비와, 갓 깨어난 거위벌레가 졸참나무 이파리를 사각사각 재단하는 숲 속의 소리들이 다 어디에 숨어들었는지를. 살아 숨쉬는 것들의 여린 속살을 뚫고 들어가 알알이 응결되고 흩어져 도는, 흘러버린 시간의 비밀스런 거처를. 시간과 정면으로 마주 선 목숨만이 켜켜이 그러안은 그리운 기억들로 향기로운 알집파일을 공글린다는 것을.
생밤 한 알을 오도독 깨문다. 고소하고 다달하다. 고독한 실존은 온데간데없고 소리조차 맛있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늘 天 / 김응숙 (0) | 2021.06.14 |
---|---|
어떤 표정/배종팔 (0) | 2021.06.11 |
돌매/류영택 (0) | 2021.06.09 |
또랑광대 / 김순경 (0) | 2021.06.08 |
송이의 사랑 / 박월수 (0) | 2021.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