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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무릇, 똥 / 문경희

에세이향기 2021. 8. 3. 10:44

무릇, 똥 / 문경희

 

길이 아니라 아예 똥밭이다. 대충만 쓸어 담아도 한 자루는 족히 되겠다. 이렇게 많은 똥을, 하필이면 길목을 따라 싸질러 놓다니. 매너 한 번 똥 같다.

춥다는 핑계로 한동안을 칩거하다 뒷산을 오르는 중이다. 걸음걸음 똥이 밟힌다. 서리태처럼 까맣고 단단한 똥. 똥. 똥. 간만의 산보에 황감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똥세례에 발밑이 조심스럽다.

임자 없는 똥은 없을지니, 겨울의 적막강산을 헤집고 어느 목숨 하나가 이 길 위에서 부단히 근심을 풀어解憂내었던가 보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족적으로 보건데, 밤만 되면 집 근처로 내려와 그악스럽게 어둠을 찢어발기던 고라니의 소행이 분명하다. 인도의 정치가 간디는 '독립보다 화장실이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는데, 고라니들에게도 화장실 한 칸 마련해 주어야 하나 싶어질 정도다.

늘씬한 몸매에 촉촉한 눈망울, 각선미를 자랑하는 네 다리까지, 단아한 발자국만 남기고 사는 듯 보였던 녀석도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똥,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을 떨어내느라 겅중거렸을 녀석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범인은 반드시 범죄의 현장에 다시 나타나려니. 속 시원 했을 방사의 현장을 짚어가며 녀석의 기척을 탐문해보지만, 마치 교란작전이라도 펼치듯, 어디선가 산꿩 두어 마리만 요란스레 날아오른다.

똥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제 방귀소리에도 놀라 달아난다는 극 소심주의자인 고라니지만 나름 신간은 쾌나 편안했던가보다. 막 빵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동글동글 참하게도 똥을 빚어놓았다. 작고 앙증맞은 그것들에게서는 똥이라는 단어가 품은 불결의 뉘앙스마저 전해지지 않는다. 유년의 한때를 사로잡던 공깃돌처럼 호주머니가 불룩해지도록 챙겨 넣고 싶은 충동까지 생긴다.

시골로 터를 옮기고부터 나는 똥에 상당히 관대해졌다. 아니, 관대해질 수밖에 없었다. 소똥, 닭똥, 개똥, 고양이똥, 하다못해 파리똥에 배추벌레똥까지, 수많은 배설의 흔적들이 무시로 일상을 범람한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한, 똥을 안 보고 살 수는 없다. 애초부터 퀴퀴한 두엄냄새가 시골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각오하고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똥의 난장에도 면역이 생기는지. 오늘처럼 불시에 만나지는 똥 앞에서도 필요이상의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되었다. 눈살을 찌푸리거나 코를 거머쥐는 오버 액션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생명체가 잠시 머물렀던 흔적쯤으로 데면데면 읽어내는 것. 그것이 시골아낙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내가 찾아낸 똥의 해법이었다.

지난 가을, 대대적인 마늘 파종을 앞두고 마을 안팎으로 똥내가 진동을 했다. 벼를 수확한 논에 땅심을 돋우기 위해 거름이 동원된 탓이었다. 산 아래 한갓진 곳에 적치물처럼 방치되어 있던 우분牛糞이 오랜 결가부좌를 푸는 의식이었다. 고독하게 발효의 시간을 거친 우분이 뿌려지자 똥이 냄새를 앞세워 자신을 선언하고 나섰다. 지상을 큼큼하게 적어나가는 똥의 화법이 마뜩찮아 나는 문을 꼭꼭 닫아거는 것으로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우분이야말로 최상의 거름이란다. 마늘뿐만 아니라 김장배추도 우분을 거름 삼으면 얼마나 '꼬소'한지 모른다고, 동네사람들은 입을 모아 똥 예찬론을 펼쳤다. 그렇다면, 뿌리에서부터 줄기, 잎까지, 내 밥상에서 똥과 무관한 먹거리가 별반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들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나는 똥이 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만 내내 께름칙했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할 터. 나도 꾸덕꾸덕해진 소똥을 주무르며 무와 배추, 쪽파 등속을 심었다. 실하게 자란 그것들로 갖가지 김치를 담갔다. 사람들이 말한 '꼬순' 맛을 느끼기 위해 이따금 밥상머리에서 남몰래 똥을 떠올리기도 했다. 밥이 그러하듯, 똥 또한 나를 일으키는 밥이 되어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먹는 자 배설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을 것이다. 천하의 양귀비인들 남몰래 치러야 하는 뒤 구린 의식을 건너 뛸 수 있었으랴. 내 몸 밖으로 밀어내는 순간 결코 내 것이 아니었던 듯 고개를 돌려버리지만, 삶을 단순화시키다 보면 결국 먹고 싸는 일로 귀결이 되지 않는가.

내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똥이며, 똥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단다. 먹거리가 과했거나 부실했거나, 근심걱정에 휘둘렀거나 자기 관리에 소홀했거나, 상황 여하에 따라 똥의 양상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500원을 삼키고 500원짜리 음료수를 쏟아내는 자판기처럼, 우리의 육신도 하루하루 자신의 행위에 합당한 똥을 만들어내는 기계와 다를 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똥이라는 성적표로 그날그날의 삶을 역산逆算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먹는 것input과 싸는 것output 사이에 삶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매사 원인이 있어 결과가 생겨나고, 그 결과가 원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도출하고, 삶 자체가 뫼비우스의 띠를 걷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결국 언젠가 나라는 존재도 세상 밖으로 배설되어질 것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몸과 명료하지 못한 정신, 고갱이가 소진되어버린 껍데기처럼 쓸모를 잃은 채 맞이하는 끝이라 하여도 그 끝이 영원한 끝은 아닐지도 모른다. 굳이 윤회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동원하랴. 허망하게 사라지는 듯 보여도,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는 분명 내 몸을 자양분 삼아 꽃이 피고 나무가 뿌리를 굳힐 것이다. 찌꺼기의 배출이라 하여 하찮게 치부되어야 마땅한 똥은 아니라고, 불쑥 똥을 변호하고 싶어진다.

똥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선다. 콩알만 한 배설물에서 똥의 거룩한 부활을 생각하는 하루. 태고 이후 무수한 똥이 키워 놓은 숲의 가랑이 사이로 소생의 봄이 푸릇푸릇 일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