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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벚꽃 / 한경희

에세이향기 2024. 5. 5. 09:02

붉은 벚꽃 / 한경희

 

 

되돌아보면 할머니는 그때 할머니가 아니었다. 쉰을 갓 넘긴 아줌마였다. 열아홉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스물셋에 나를 낳았으니 고작 마흔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도 맨발로 비 오는 거리를 첨벙거리던 때가 있었고, 좋아하는 동네 오빠를 보면 골목 모퉁이로 숨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좀 더 늦게 그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손님이 뜸한 비 오는 날 오후가 되면 할머니의 모자점은 동네 사랑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설탕을 넣고 끓인 막걸리를 양은 주전자에 내오고 고추장떡을 지졌다. 알코올기가 날아간 그 막걸리를 '모주'라고 불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있었지만 나는 내가 어리다고 의식하지 못했다. 나에게도 모주 사발이 돌려졌고 어른들은 특별히 말을 가려 하지도 않았다. 당신들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던 모양이다.

모주는 달달하면서도 구수했다. 그날은 알코올기가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아 목 안이 쏴 하며 기분이 들떴다. 술기운 탓이었는지 어른들은 첫사랑을 추억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나 물었다.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럼, 아직도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

할머니는 모주를 한 잔 더 마시고는 상기된 얼굴로 이야기를 풀었다. 소녀는 열세 살에 엄마를 잃었다. 그날로 동생 다섯을 건사하고 살림을 도맡았다. 관공서에 다니는 아버지는 유난히 소녀를 귀애했다. 첫정이기도 했지만 손에 물 마를 새 없는 어린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 컸으리라. 소녀도 아버지를 잘 따랐다. 아버지가 새 장가드는 게 싫어 엄마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혈기왕성한 나이에 짝을 잃은 남자의 외로움을 어린아이가 어찌 이해했겠는가. 젊은 홀아비는 결국 일 년을 버티지 못했다. 새엄마를 맞은 후 소녀는 부엌살림에서 벗어났지만 눈물바람인 날이 더 많아졌다.

소녀가 열여섯 되던 해였다. 해마다 보던 꽃들이 예사로 안 보이고 이유 없이 서글퍼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즈음 가까워진 옆 동네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들어서는데 마당 한쪽에 키가 훤칠하고 귀티가 나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창백하리만치 뽀얀 얼굴이었다. 서울에서 휴학하고 내려온 친구 오빠였다.

소녀는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고 섬세한 눈이었다. 소녀는 왠지 부끄러워져 친구에게 볼 일을 잊었다 말하고는 집으로 내달렸다. 심장이 쿵쿵거리는 건 뛰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소녀는 오빠의 모든 것이 좋았다. 특히나 짧게 자른 뒤통수를 보면 어찌나 마음이 설레던지 그 푸르스름하고 까슬한 머리를 한 번만 쓸어보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웃을 때마다 오빠의 하얀 목덜미에 새파란 힘줄이 핏줄이 비쳐 오르면 심장이 뜨거워졌다.

친구네 집에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오빠를 보면 볼수록 소녀는 더 애가 탔다.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오빠를 떠올리고 낮에 봤던 모습을 그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여름에도 몸이 두둥실 떠다니는 봄날 같았고 겨울에도 바람이 시리지 않았다.

오빠도 소녀가 싫지 않았던지 귀엽다며 방싯 웃어주기도 하고 가끔 제 동생과 앉혀 놓고 대학 생활도 말해줬다.

"넌 웃을 때 잇속이 참 예쁘다."

소녀를 빤히 쳐다보던 오빠는,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는 소녀에게 코를 찡긋해 보이고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흩트렸다. 그날 밤 소녀는 머리를 쓸고 간 그 부드러운 손의 감촉을 되새기느라 꼬박 날을 밝혔다.

일 년 남짓 고향에 머물던 오빠는 다시 서울로 갔다. 그새 소녀는 누가 요술이라도 부린 양 훌쩍 자라 있었다.

열여덟이 되던 해, 자신의 몸이 얼마나 예뻐졌는지 자각할 새도 없이 혼담이 오갔다. 새어머니가 결혼을 서둘렀다. 상대는 한국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스무 살 재일 교포 청년이었다. 남몰래 신랑 될 사람을 보러 간 소녀는 그를 보자마자 얄궂게도 오빠가 떠올랐다. 갑자가 가슴 한복판이 시큰해지며 뜨거운 물이 고였다. 소녀는 무작정 친구네로 향했다.

언제 내려왔는지 거짓말처럼 오빠는 처음 모습 그대로 마당에 서 있었다. 소녀는 반가우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사모하는 이를 두거 딴 맘을 먹었던 것마냥 느껴지기도 하고, 혼삿말이 오가는 자신이 순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소녀는 그날 이후 친구네 집에 발길을 끊었다.

혼사가 성사되고 결혼 준비로 분주할 때였다. 불현듯 소녀는 오빠를 꼭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혔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벚꽃이 하르르 지던 날이었다. 그새 서울로 갔으면 어쩌나 조급증이 인 소녀는 한달음에 친구네에 도착했다. 마당가 벚나무에서 꽃잎이 날아와 소녀의 발 앞에 떨어졌다. 대문 사이로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오빠가 보였다. 갑자기 그 모습이 꿈결같이 아슴푸레해서 차마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담 모퉁이에 얼마나 서 있었을까.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워 주저앉고만 싶었다. 소녀가 용기를 내어 마당으로 한 발 들이밀던 순간, 오빠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매섭게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소녀의 눈에는 오빠의 입술 주위로 떨어지는 게 붉게 물든 벚꽃잎으로 보였다. 빠알간 꽃잎이 두 손에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 소녀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빠의 길고 긴 각혈이 끝났을 때 소녀는 고개를 돌려 집으로 뛰었다. 처음 오빠를 봤던 그날처럼.

"벚꽃이 얼마나 이쁘게 지던지…. 집으로 가는 내내 어찌나 서럽게 지던지…. 근디 말여. 그때 내가 뒤도 안 보고 나온 일이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겄어."

모주를 한 잔 더 마신 할머니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할머니, 그 오빠는 어떻게 됐어? 죽었어?"

첫아이 산후조리가 끝난 후, 할머니는 식구들 몰래 그 집에 한 번 가보았다고 한다.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고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거로 봐서 오래전에 이사한 것 같더란다. 물어물어 소식을 알 수도 있었지만 부러 그러지 않았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가슴에 붉은 사랑을 찍어두고 벚꽃이 필 때마다 펴 보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다음에 할머니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지금도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나온 게 잘한 일이라 여기는지, 아닌지. 그럼 할머니는 모주를 마시던 그때처럼 다시 얼굴을 붉히려나. 진짜 할머니가 된 지금도 다시 여자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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