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 44

햇과부/ 한인자

햇과부/ 한인자 "햇과부, 어서 오셔.""??"황당한 호칭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못 알아들은 줄 알고 거듭 말한다."햇과부, 어서 오시라고.""햇과부요?""그렇지. 너는 햇과부, 우리는 묵은과부."남편이 떠나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가까운 두 선배가 맛있는 밥 먹자며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는 럭셔리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한껏 멋을 낸 선배들이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축 늘어져 들어오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큰소리로 해맑게 "햇과부'라고 불렀다. 선배들의 진정한 위로에 울컥했다.​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를까 겁나는 이름 '과부'를 두 선배는 거침없이 막 부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를 웃기겠다고 민망한 이름을 들석이며 고육지책을 쓰는 선배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나도 모르게..

좋은 수필 2024.05.31

가난한 벽/ 전미란

가난한 벽/ 전미란 벽은 소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섬마을 학교사택은 여러 개의 방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었다. 슬래브 지붕에 구멍 숭숭 뚫린 벽돌로 칸만 쳐져있었는데 칸칸이 나누어진 허름한 벽은 많은 말을 해주었다. ​소리는 밤이 깊을수록 커졌고 나는 예민해져갔다. 밤마다 부르릉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옆방 남자의 코 고는 소리, 기침소리, 방귀소리 할 것 없이 벽을 넘나들었다. 심지어는 몇 시에 일어나는지, 티브이 드라마는 뭘 보는지, 잠들기까지 무엇을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사택은 보일러실을 부엌으로 썼다. 헐거운 문틈으로 들쥐가 드나들고,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교실 헌 책상을 붙여 그릇을 올리고 빨간 고무통에 물을 받아 바가지로 떠서 설거지를 했다. 벌 받듯이 쪼..

좋은 수필 2024.05.31

막차/허정진

막차/허정진 직장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는 늦은 밤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회사 일이 늦거나, 동료와 술 한잔하느라 부랴부랴 막차를 타곤 했다. 막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어딘가 서로 닮아있었다. 고개를 숙였거나 초점 없는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거나, 하나같이 피로에 지치고 어딘지 모르게 삶의 쓸쓸함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막차라는 심리적 배경이 밥벌이의 고단함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보다 막차를 타야만 하는 생에 대한 애환과 번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속울음을 삼키며 누군가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삶을 알려면 막차를 타보라는 말도 그래서일 것이다.​‘막차를 탄다.’라는 말이 있다. 뒤늦게 뛰어들거나..

좋은 수필 2024.05.30

냉이 대첩 / 이현영

냉이 대첩 / 이현영 ​ 이월이 다가올 즈음 냉이 생각이 자꾸 났다. 한적한 들판에서 냉이를 실컷 캐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일었다. 어디에나 있는 듯해도 막상 찾으려면 좀처럼 안 보이는 게 쑥이나 냉이 같은 푸성귀다. 도시 외곽에 사는 지인에게 냉이가 올라오냐고 물었더니 반응이 시큰둥했다. 농사짓는 이웃 쪽 상황도 비슷했다. 냉이 캐기는 꽃대가 올라오면 끝난다. 몇 해 전, 모처럼 찾아간 들판은 절반 넘게 냉이꽃으로 바뀐 터라 재미를 못 보고 돌아왔었다.​ 이월로 접어든 첫 휴일 오후, 남편은 연일 냉이 타령인 아내 입을 막으려는 속셈인지 냉이를 캐러 가자고 먼저 말을 붙였다. 집에 있으니 갑갑한 마음에 바람 쐬러 가자는 말이겠지 싶어 따라나섰다. 그러면서 칼이며 큰 봉지까지 챙겨 든 마음은 뭘까. 운..

좋은 수필 2024.05.28

바림, 스며들다 / 김정화

바림, 스며들다 / 김정화 ​ 양홍에 수감을 섞어 붓끝에 찍는다. 소복한 꽃잎 안쪽, 검붉은 물감이 미리 내놓은 물길을 따라 번진다. 적당한 수분을 머금은 바림붓이 부드럽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물감의 번짐을 돕는다. 서서히 농도를 달리한 색들이 꽃잎에 스민다. 온 세상을 집어삼킨 코로나바이러스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면회가 금지되고 주말마다 찾아오던 자식들을 보지 못하게 되자 시름시름 앓다 급기야 식사를 거부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고 스스로 요양병원 입원을 결정할 정도로 강단 있던 분이었다. 영양주사를 투여하며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면회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마당으로 나뒹굴어 다쳤다는 연락이 왔다. 얼굴이 긁히고, 정..

좋은 수필 2024.05.28

외딴집 / 조현미

외딴집 / 조현미  호박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그 집이 있던 자리에, 노을이 짙게 비낀 꽃은 붉다. 꼭 조등弔燈 같다.천생이 직립과는 먼 넝쿨에게 콘크리트 담벼락은 숙주가 되기엔 여러모로 옹색해 보인다. 어쩌다 수라修羅같은 콘크리트 틈새에 뿌리를 내렸을까. 갈지자로 굽은 그루가 영락없는 골절의 흔적인데 크낙한 잎사귀 사이 애호박을 조랑조랑 달고 있다.넝쿨의 여정 말미엔 넝쿨손이 바랑 하나 걸머메고 있다. 한 모금의 햇살과 바람, 한 치의 행로를 향한 저 가없는 탁발, 빈손이 못내 안쓰럽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식물에게나 삶은 어차피 구도求道의 연장선상이 아니겠는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으나 늘 위태위태한 넝쿨의 처소를 보면 운명이란 신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지 싶다.그 집을 처음 본 건 십여 년 전 ..

좋은 수필 2024.05.27

복어​/ 박은영

복어​/ 박은영        독종 소리를 들었다​   너 죽고 나 죽자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죽지 않았다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려져도 꾹꾹 울음을 참고 몸뚱이를 굴러먹었다   왜 사니?   독한 말을 씹어 넘길 때면 헛배가 불렀다   슬픔을 가리는 위장술,   내성과 독성의 굴레에서 독한 년, 욕을 배불리 먹고 천하게 굴러다녔다   돌아서면 잊어버릴 만큼   나는 독기를 빼면 시체였다  투구꽃과 청산가리보다 한 수 위인 선대의 독 가哥들이 그랬듯   이를 악물고 살았다   살다 보니  그 많은 천적이 멸종되고 없었다

좋은 시 2024.05.27

문명 / 박일만

문명 / 박일만  아파트 창문 너머 하늘이 사라졌다공간을 채우며 빌딩이 점령했다콘크리트로 덮이고 구름은 더 높은 곳을 찾아 떠났다언뜻 보이던 햇빛도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저 높은 건물 속에서사람들은 공중 부양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틈새에 끼인 키 낮은 초등학교가 숨을 헐떡인다아이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콩나물처럼 자라 이 나라의 일꾼으로 나아갈 것이므로 어른들은 서슴없이 광장을 메꿨다메꿔진 하늘새 한 마리 날지 못하고 매미 한 마리 찾아오지 않는 마천루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지은 날개를 차려 입고가끔은 새처럼, 가끔은 매미처럼엘리베이터에 붙어 소리 지를 것이다인간의 세상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몸집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나타난 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치부되었을 뿐오고갈 길이 막힌 바람이벽에 부딪치며 세찬 소리로 ..

좋은 시 2024.05.26

바겐세일 / 박일만

바겐세일 / 박일만  서둘러 챙겨 입고 첫차에 오른다모닥불이 혓바닥을 날름대는 곳추레한 행색으로 빙 둘러 도열한다그 거리의 모퉁이드럼통을 달군 불이 얼굴을 익힌다큰 과일, 작은 과일, 건장한 과일풋과일, 익은 과일, 삭아가는 과일저마다 모양새를 조건삼아 진열된다최선을 다해 단내를 풍겨야 선택되는 생들봉고차가 다가와 손가락 호명하는 잠깐 사이동으로, 서으로, 남으로, 북으로일당 몇 만원! 중식제공! 줄 맞춰 저렴하게 몸 팔러 간다그들이 사라진 후 덩그러니 남은 잔챙이들서리 맞은 낙과처럼 추락을 맛본다그마저도 허기가 진다북새통이 지나가고 바람만 휘도는 거리 모퉁이선택받지 못한 생들은 또다시 쪽방으로 처박힐 것이다뒤늦게 도착한 생들 저희끼리 모여온기 사그라드는 드럼통을 껴안고두 손을 함께 구워 먹는다

좋은 시 2024.05.26

고자바리 / 최원현

고자바리 / 최원현   할머니는 늘 왼손을 허리 뒤춤에 댄 체 오른손만 저으며 걷곤 하셨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앉았다 일어나려면 ‘아고고고’ 하시며 허리가 아픈 증상을 아주 많이 호소하셨고 길을 가다가도 한참씩 걸음을 멈추곤 허리를 펴며 받치고 있던 왼손으로 허리를 툭툭 치다가 다시 가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의 허리가 언제부턴가 조금씩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바라보는 어린 내 마음은 더욱 편치 않았다.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으로 늙음이 나타났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허리가 굽어지는 걸로 나타났다. 기역자처럼 거의 직각으로 굽어진 허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서글퍼지고 안타깝고 민망했다.오랜만에 뒷산엘 올랐다. 그새 나무계단이 하나 더 생겼고 오르는..

좋은 수필 2024.05.26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학이 비상하는 소리였을까달빛 머금은 검은 돌들이밤새 달빛을 토해내는 소리였을까숨 넘어가도록 차오르는 파도는물거품 부글거리는 생의 내륙까지막무가내 제 속내를 들이미는 중이다달빛을 베고 날아올는 학은몽글몽글 돌 부딪는 소리를 물어나르며멀고 먼 시간 속을 항해하는 지도 모른다태초 이래 두근거리며 열고 닫힌 해안선간밤에도 젖은 눈을 감았다 치켜뜨는지무수한 물방울이 튕겨오르고밤이면 수천 개의 별들이멀리 은하까지 해안선의 표정을 타전한다흑진주 몽돌은 수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흔적이다깊어진 연륜을 다독이며젖은 날개를 터는 학 한 마리마침내 눈부신 비상을 시작한다.​​​​ 멸치들의 반가사유상 / 이서​​여기는 외포항, 작고 비린 것들이 밝고 명랑하다살아서는 줄줄이 달고, 죽어서는 외려 고..

좋은 시 2024.05.25

부표의 승천 / 문성해

부표의 승천 / 문성해  줄이 끊긴 스티로폼 부표들이 하얗게 떠밀려 왔다.아이들은 이 뒤웅박 팔자를 공처럼 발로 찼다멀리 가지도 못하고 자잘한 스티로폼 알갱이들이산란하듯 모래밭 위를 슬렸다 무리짓듯몇 개의 흰 부표들이소박맞고 돌아온 동네 누이들처럼 늘어났다. 태풍이 유난스럽던 늦여름 철이었다 배고프고심심한 아이들은 바다의 박을 타듯때 절은 부표들을 손으로 갈라냈다.박속처럼 새하얗기만 부표들, 먹을 수 없는궁기의 나날들이 철지난 바닷가에 모여졌다떠도는 환멸처럼 모지라진 뒤웅박들 모여서한때는 바다를 등질 담벼락을 쌓을 수 있을까 굴러온, 떠밀려온 바다의 수박처럼 든든했으나더없이 가벼운 몸들은 그대로 잘게 부서지는 일뿐녹지 않는 눈송이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바다를 떠나자, 잘디잔 알갱으로 저질러만 졌으니가벼운 ..

좋은 시 2024.05.25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해도에도 없는 바다의 언덕들이 뜬금없이 일어서는여름에도 해 떨어지면 손 시려 조막손 되는사할린 섬 북동쪽 오호츠크 해가 북양명태의 안방이다.무식이 때로는 유식을 제압하고주먹이 법을 다스릴 때도 있어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바람이 다스리는 무법의 세상,천식 앓는 700마력 심장이 터질 듯 벌떡거린다어부의 삶이란 어차피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전속 항진, 월경越境의 깃발을 꽂는다만선의 바다의 정복자만이 누리는 영광이다

좋은 시 2024.05.25

나비물 / 유종인

나비물 / 유종인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 수도가 박힌 마당은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콸콸콸 물의 박수를 쳐준다꾸지람을 듣고 온 날에도 그늘이 없는 박수소리에손을 담그고 저녁별을 바라는 일은 늡늡했다그런 천연의 박수가 담긴 대얏물에 아버지가 세수를 하면살비듬이 뜬 그 물에 할머니가 발을 닦으셨다발등의 저승꽃에도 물을 줘야지그런 발 닦은 물조차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한 번 박수를 부은 물의 기운을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눈치 보는 바랭이풀 잡초까지 물너울을 씌워주고도박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쯤을 남긴세숫대야 물을 내게 들려 손님을 맞듯 대문을 여신다뿌리거라, 길이 팍팍해서야 되겠냐흙꽃*에게도 물을 줘야지최대한 물의 보자기를 펼치듯 헹가래를 치는 물마지막 박수는 이렇게 들뜬 흙먼지를 넓게 가라앉히는 일,수도꼭지가..

좋은 시 2024.05.25

물집 / 김미향

물집 / 김미향​​전못 하나 박지 않고 주먹장이음 공법으로만 지은물결과 윤슬로 빚은 물의 집,물의 골재를 채굴하려면 수심 몇 길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까​물은 목제나 철제보다 강해 녹슬거나 부러질 리가 없어집을 짓는데 긴요히 쓰이는 건축기법이다​설계도를 펼치면다양한 물의 부재들이 빼곡하게 설계되어 있다물의 집 한 채 짓기 위해물의 사유는 얼마나 깎이고 버려지고 다듬어져야 했을까​이글루 공법으로 쌓아 올린 물방울 집은 입구가 없다빛이 관통하는 모든 곳이 출구라 물의 집은 사방이 문,물집의 건축술에는 사유의 조감도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삼보일배의 고통, 장고의 시간, 노독의 궤적까지​수위가 깊은 문장은 물집의 집대성인가퉁퉁 부르튼 발은 건축의 바탕, 속여*였다가 잠길여**였다가몸의 가장 바깥 궤도를 공전하고..

좋은 시 2024.05.25

실비집 / 윤계순

실비집 / 윤계순​​어떤 말끝에실비집이라는 말이 튀어나와인터넷 검색을 하니, 그곳에 아버지가참 난처하게 앉아 내리는 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실비, 곤궁한 주머니 사정을 곤궁한값으로 쳐서 받겠다는 뜻 같은데나는 왜 실비집을 가늘게 내리는그 실비로 생각했을까실비, 노천의 막일에 이처럼 어정쩡한 판단이 또 있을까일을 하자니 자재資材들이 젖고말자니 한 겹 주머니가 젖을 터그 두 가지 사정엔 미루어지는 공기工期와공치는 일당이 있다허름한 일진日辰이 축축해져,실비 오는 듯 집을 나섰는데덕지덕지 바른 신문지 벽에 등을 기댄양철 지붕 처마 끝, 흘러내리는 빗소리에서둘러 천막 덮어놓고홑겹 사정들도 꾹꾹 덮어놓고이 핑계 저 핑계가 아니라모처럼 한 핑계로 둘러앉는 실비집,실비는 계속 내리고 노래들은 점점 삐뚤어지고찌그러진 양..

좋은 시 2024.05.25

그분이라면 생각해 볼게요/ 유병숙

그분이라면     생각해 볼게요/    유병숙    “당신, 점심은 드셨어요?”     아버님을 향해 묻는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방금 두 분이 마주앉아 드셨으면서 그새 잊으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도돌이표처럼 말씀을 반복하신다. 답답해진 내가 “어머니, 좀 전에도 아버님께 여쭤 보셨잖아요.” 하니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가 바보라서 그래. 바보가 다 됐어.” 하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당황한 내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다. 허나, 울고 싶은 사람은 정작 나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시아버님이 나를 부르셨다. 아버님은 내 눈을 피해 허공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네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다. 그냥 건망증이 심하게 왔을 뿐이야. 그렇게 알거라.”    이 무슨 말씀이신..

좋은 수필 2024.05.24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코 / 곽흥렬

눈과 귀와 입 그리고 코 / 곽흥렬 오래전부터 알아 온 스님이 있다. 적막이 밤안개처럼 내려 깔리는 깊디깊은 산속에, 토굴을 파고 수십 년 세월을 참선으로 정진하던 눈 밝은 수행승이었다. 이름 모를 산새며 풀벌레들만이 스님의 벗이었다. 문명과 철저히 담을 쌓고 정진한 수도修道 생활은 영혼을 맑히고, 영혼이 맑으니 자연 마음의 눈으로 앞날을 내다보는 천리안이 생겨나게 되었던 게다. 이따금 도회의 시멘트 가루 묻힌 중생들이 찾아가 세상살이에서 입은 내면의 상처로 응어리진 가슴의 답답증을 하소연하면, 스님은 그때마다 시원스럽게 운세 풀이를 한 뒤 적절한 처방을 내려 주곤 했었다.그랬던 스님이, 무슨 인연에서였던지 산속 생활을 접고 북적거리는 대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생활은 자판기처럼 편리해지고 육신은 양털방석..

좋은 수필 2024.05.24

숨결 / 김 정 순​

숨결 / 김 정 순​​​개울가 너럭바위에 앉아 빨래를 한다. 첫아이를 낳았을 땐 시어머님이 도랑에 나가 손주 기저귀와 내 옷가지를 빨아 주셨는데 지금은 내가 당신 옷을 빨고 있다. 아기였던 아들이 아이 아빠가 되었다. 이십 대였던 나도 예순을 바라본다.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 것처럼 정정하던 당신이셨다. 바쁘게 내닫는 물줄기가 우리네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빨래를 넌 뒤 방에 들어가 시어머님을 깨운다.“어머니, 점심 드세요.”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곰국 한 대접을 순식간에 다 드신다."국맛 어떠세요?"“꿀맛이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냐?"묻고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눕는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던 둘째 시누이가 며칠간 집을 비워 이곳에 와 있다. 늘 멀리 떨어져 지내던 내가..

좋은 수필 2024.05.22

화전민의 한 소녀 / 김규련

화전민의 한 소녀 / 김규련주인 없는 빈집 뜰에도 봄은 와서 이름 모를 풀꽃들이 한창이다. 무너진 장독대 돌틈 사이에는 두어 송이 민들레며 채송화도 무심히 피어 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본시 어느 가난한 화전민이 살던 곳이라 울도 담도 없다. 이엉은 비바람에 삭아 내려앉고, 문이 떨어져 나간 빈방은 짐승이 살고 있는 동굴같이 그늘진 아궁이를 벌리고 있다.그 퇴락됨이 그지없는 빈집 뜰에 한 소녀가 외롭게 돌멩이를 만지며 놀고 있다. 나는 묘한 느낌이 들어 바쁜 걸음을 멈추고 그 소녀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태백산 준령이 동남으로 치닫는 산허리 깊숙한 산골 화전민 마을이다. 집들은 서로 산비탈에 흩어져 있고 인적도 드문 곳이기 때문이다.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힐끗 보고선 수줍은 듯이 손을 털며 일어서는 그 소녀..

좋은 수필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