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25 6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

학동몽돌 해변에서 / 최재영​​학이 비상하는 소리였을까달빛 머금은 검은 돌들이밤새 달빛을 토해내는 소리였을까숨 넘어가도록 차오르는 파도는물거품 부글거리는 생의 내륙까지막무가내 제 속내를 들이미는 중이다달빛을 베고 날아올는 학은몽글몽글 돌 부딪는 소리를 물어나르며멀고 먼 시간 속을 항해하는 지도 모른다태초 이래 두근거리며 열고 닫힌 해안선간밤에도 젖은 눈을 감았다 치켜뜨는지무수한 물방울이 튕겨오르고밤이면 수천 개의 별들이멀리 은하까지 해안선의 표정을 타전한다흑진주 몽돌은 수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흔적이다깊어진 연륜을 다독이며젖은 날개를 터는 학 한 마리마침내 눈부신 비상을 시작한다.​​​​ 멸치들의 반가사유상 / 이서​​여기는 외포항, 작고 비린 것들이 밝고 명랑하다살아서는 줄줄이 달고, 죽어서는 외려 고..

좋은 시 2024.05.25

부표의 승천 / 문성해

부표의 승천 / 문성해  줄이 끊긴 스티로폼 부표들이 하얗게 떠밀려 왔다.아이들은 이 뒤웅박 팔자를 공처럼 발로 찼다멀리 가지도 못하고 자잘한 스티로폼 알갱이들이산란하듯 모래밭 위를 슬렸다 무리짓듯몇 개의 흰 부표들이소박맞고 돌아온 동네 누이들처럼 늘어났다. 태풍이 유난스럽던 늦여름 철이었다 배고프고심심한 아이들은 바다의 박을 타듯때 절은 부표들을 손으로 갈라냈다.박속처럼 새하얗기만 부표들, 먹을 수 없는궁기의 나날들이 철지난 바닷가에 모여졌다떠도는 환멸처럼 모지라진 뒤웅박들 모여서한때는 바다를 등질 담벼락을 쌓을 수 있을까 굴러온, 떠밀려온 바다의 수박처럼 든든했으나더없이 가벼운 몸들은 그대로 잘게 부서지는 일뿐녹지 않는 눈송이처럼 흩날리기만 할 뿐바다를 떠나자, 잘디잔 알갱으로 저질러만 졌으니가벼운 ..

좋은 시 2024.05.25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다 / 박창주  해도에도 없는 바다의 언덕들이 뜬금없이 일어서는여름에도 해 떨어지면 손 시려 조막손 되는사할린 섬 북동쪽 오호츠크 해가 북양명태의 안방이다.무식이 때로는 유식을 제압하고주먹이 법을 다스릴 때도 있어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바람이 다스리는 무법의 세상,천식 앓는 700마력 심장이 터질 듯 벌떡거린다어부의 삶이란 어차피지구의 중심에서 세상 끝을 살아가는 게 아니냐전속 항진, 월경越境의 깃발을 꽂는다만선의 바다의 정복자만이 누리는 영광이다

좋은 시 2024.05.25

나비물 / 유종인

나비물 / 유종인  박수소리를 듣는다 그 수도가 박힌 마당은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콸콸콸 물의 박수를 쳐준다꾸지람을 듣고 온 날에도 그늘이 없는 박수소리에손을 담그고 저녁별을 바라는 일은 늡늡했다그런 천연의 박수가 담긴 대얏물에 아버지가 세수를 하면살비듬이 뜬 그 물에 할머니가 발을 닦으셨다발등의 저승꽃에도 물을 줘야지그런 발 닦은 물조차 그냥 버려지지 않는다한 번 박수를 부은 물의 기운을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눈치 보는 바랭이풀 잡초까지 물너울을 씌워주고도박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쯤을 남긴세숫대야 물을 내게 들려 손님을 맞듯 대문을 여신다뿌리거라, 길이 팍팍해서야 되겠냐흙꽃*에게도 물을 줘야지최대한 물의 보자기를 펼치듯 헹가래를 치는 물마지막 박수는 이렇게 들뜬 흙먼지를 넓게 가라앉히는 일,수도꼭지가..

좋은 시 2024.05.25

물집 / 김미향

물집 / 김미향​​전못 하나 박지 않고 주먹장이음 공법으로만 지은물결과 윤슬로 빚은 물의 집,물의 골재를 채굴하려면 수심 몇 길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까​물은 목제나 철제보다 강해 녹슬거나 부러질 리가 없어집을 짓는데 긴요히 쓰이는 건축기법이다​설계도를 펼치면다양한 물의 부재들이 빼곡하게 설계되어 있다물의 집 한 채 짓기 위해물의 사유는 얼마나 깎이고 버려지고 다듬어져야 했을까​이글루 공법으로 쌓아 올린 물방울 집은 입구가 없다빛이 관통하는 모든 곳이 출구라 물의 집은 사방이 문,물집의 건축술에는 사유의 조감도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삼보일배의 고통, 장고의 시간, 노독의 궤적까지​수위가 깊은 문장은 물집의 집대성인가퉁퉁 부르튼 발은 건축의 바탕, 속여*였다가 잠길여**였다가몸의 가장 바깥 궤도를 공전하고..

좋은 시 2024.05.25

실비집 / 윤계순

실비집 / 윤계순​​어떤 말끝에실비집이라는 말이 튀어나와인터넷 검색을 하니, 그곳에 아버지가참 난처하게 앉아 내리는 실비를 바라보고 있었다.실비, 곤궁한 주머니 사정을 곤궁한값으로 쳐서 받겠다는 뜻 같은데나는 왜 실비집을 가늘게 내리는그 실비로 생각했을까실비, 노천의 막일에 이처럼 어정쩡한 판단이 또 있을까일을 하자니 자재資材들이 젖고말자니 한 겹 주머니가 젖을 터그 두 가지 사정엔 미루어지는 공기工期와공치는 일당이 있다허름한 일진日辰이 축축해져,실비 오는 듯 집을 나섰는데덕지덕지 바른 신문지 벽에 등을 기댄양철 지붕 처마 끝, 흘러내리는 빗소리에서둘러 천막 덮어놓고홑겹 사정들도 꾹꾹 덮어놓고이 핑계 저 핑계가 아니라모처럼 한 핑계로 둘러앉는 실비집,실비는 계속 내리고 노래들은 점점 삐뚤어지고찌그러진 양..

좋은 시 2024.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