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2024/05 44

옹기 / 최재영

옹기 / 최재영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인품 좋은 종가집 장독대에서반질반질 몇 해를 보냈는지 알 수 없어요미세하게 실금을 틔우고 아무것도 담을 수 없을 때칠흑같은 어둠과 고요만이 남게 되었죠덕분에 나는 아름다운 몇 날을 뒤척여안팎 온 몸이 간지러운 듯 새들을 불러들이곤 해요이제 봄을 기억하는 건 내가 아니라내 안에서 피고 지는, 아직도 나를 관통해가는 세월이죠이제야 알게 되었어요대를 이어가는 건 화려한 혈통만이 아니라는 것을,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달빛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고제 집처럼 드나들던 바람도 슬슬이 빠진 소리로 흥얼거리는군요나는 앞으로 몇 번의 호시절을 더 노래하게 될까요나의 달빛은 강물처럼 흘러 어디에 가 닿을까요수천의 봄날이 지난 뒤에수줍은 새색시 가슴처럼 혼미한 숨결..

좋은 시 2024.05.03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서평]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이운경oksan97@hanmail.net  1. 자연에서 길어 올린 서정의 아리아  자연은 수필에서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이다. 자아를 자연이라는 대상에 의탁하거나 투사하는 전통적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은 ‘나’를 투사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경전(經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은 서정의 원천(源泉)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촉촉한 수액은 수필이라는 텃밭에 끊임없이 서정의 비를 내리게 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욕망의 필터를 거쳐 반복 인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 고향의 상징과 성장기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호출되기도 한다()..

평론 2024.05.02

거룩한 본능 / 김규련​

거룩한 본능 / 김규련​​동해안 백암(白巖) 온천에서 눈이 쌓인 주령(珠嶺)을 넘어 내륙으로 들어서면, 산수가 빼어난 고원 지대가 펼쳐진다. 여기가 겨우내 눈이 내리는, 하늘 아래 첫 고을인 수비면(首比面)으로, 대구(大邱)에서 오자면 차편으로 근 다섯 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마을이라고 하지만, 여기저기 산비탈에 농가가 몇 채씩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자연 촌락이다. 이 근방에는 천혜(天惠)의 절경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 자신이, 그 절경을 이루는 웅장한 산이며 기암 절벽이며 눈 덮인 수림이며 산새며 바람 소리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이들의 주된 생업은 채소(菜蔬) 농사와 담배 농사지만, 철 따라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송이버섯을 따들이기도 한다. 이..

좋은 수필 2024.05.01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의 그림자 / 김규련  봄은 천지의 기를 뚫고 나오는 것일까.햇볕과 바람, 물과 땅에 온기가 돈다. 누리 가득한 초목의 새싹에서 열여섯 살 소녀의 입술 같은 봄이 얼굴을 뻘쭘히 내민다.산수유 꽃, 생강나무 꽃, 수달래… 온갖 꽃들이 향기를 흩뿌려 남아 있는 냉기를 밀어낸다. 산새며 들짐승이며 사람들, 모든 생령들이 생기를 얻어 저마다의 몸짓에 힘이 넘친다. 마침내 초록 빛깔이 밀물마냥 번져와 온 산야를 물들였다.나는 신록이 향연을 펼칠 때와 갈잎이 귀토의식을 마감할 무렵이면 광기를 참다못해 팔공산에 오른다. 산허리를 감도는 순환도를 따라 파계사 방향으로 걷고 있다.오늘은 일요일. 상춘객과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웅장한 신록의 바다와 풋풋한 내음, 뛰어난 산세의 위용과 신묘한 산정기, 사람마다..

좋은 수필 2024.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