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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에세이향기 2024. 5. 2. 02:51

 

[서평]


수필의 체제론과 통치론의 변화
―김만년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읽고




이운경
oksan97@hanmail.net






  1. 자연에서 길어 올린 서정의 아리아
  자연은 수필에서 고갈되지 않는 지하자원이다. 자아를 자연이라는 대상에 의탁하거나 투사하는 전통적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연은 ‘나’를 투사하는 거울이면서 동시에 무수한 ‘자아’를 재발견하는 경전(經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자연은 서정의 원천(源泉)이다. 자연이 품고 있는 촉촉한 수액은 수필이라는 텃밭에 끊임없이 서정의 비를 내리게 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욕망의 필터를 거쳐 반복 인화된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숭고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발굴되기도 하고(<노을을 읽다>), 고향의 상징과 성장기 기억을 품은 공간으로 호출되기도 한다(<맛있는 술잔>). 작품의 서두에 시그널 음악처럼 자연이 등장하거나, 어떤 사건의 배경으로 자리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김만년 수필에서 자연은 소재주의의 범주를 뛰어넘은 문학적 이념으로써 독자적 위치를 점유한다.
  수필이 자연을 선호하는 이유는 자연이라는 타자에 자아를 의탁하거나 반영하는 중세적 자연관이 피를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자아의 품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자기 동일성을 보완하거나, 자연을 매트릭스(matrix)로 설정한 후 소비하기도 한다. 특히 수필에서 자연이 작품의 질료로써 소비되는 현상은 ‘기억의 재현과 해석’이라는 수필의 본질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측면으로는 자연이 수필의 서정성을 확보하는 유력한 자원인 까닭이다. 김만년의 수필에서도 자연은 다양한 색깔과 무늬로 가족사의 상흔과 세상살이의 그림자를 조명한다. 나아가 어머니의 부재와 고향 상실로 인한 ‘그리움’의 상처를 위무하고 치유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김만년의 수필에서 주목할 지점은 감각적 발화와 감응의 대상으로 자연을 호명한다는 점이다. 가령 <채마밭 소묘>는 채마밭의 사계를 시종일관 감각적 언술과 묘사로 장식한다. 화자가 정성을 들여 가꾸는 채마밭의 사계가 발라드 음악처럼 이어진다. 정교하고 치밀한 언어배열에서 파생한 은유적 표현, 화사하고 경쾌한 이미지의 나열은 ‘화조도(花鳥圖) 화첩’을 보는 듯하다. 감각적 달변이다. 이런 수필에는 철학적 진실이나 삶의 진정성에 대한 욕망이 얇다. 대신 언어와 감각이라는 다른 층위의 장으로 수필을 끌고 간다. 문장이 뿜어내는 매혹적인 향기가 가득한 이 작품은 감각적 층위로 체위를 전환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구체제를 뒤흔드는 이런 시도는 수필의 가능성을 확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 다른 작품 <민들레농장 열애기>는 수필의 문법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다. 화자가 정성들여 가꾸는 ‘민들레농장’이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호명하여 자기고백과 성찰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이 작품에서 자연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 생명을 가꾸는 여백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흙을 만지면서 절망과 상처를 극복하는 치유의 공간이다. 주목할 지점은 전작과 달리 자연을 상상이나 관념의 층위에 두고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의 고단함과 상처를 묻어두는 화사한 인공정원도 아니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숭배의 대상이거나 초월적 대상도 아니다. 일상적 자아와 가깝고 친근한 그런 공간이다. “흙에 순종하고 흙에 위로받으며 흙의 말에 귀 기울이”며 상처를 치유하고 생의 순리(順理)를 깨친다. 요컨대 흙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자아를 성숙시키는 학교이자 위안의 성소(聖所)인 셈이다.
  김만년의 수필에서 자연은 서정을 길어 올리는 ‘약샘’과도 같다. ‘그리움’으로 표상되는 김만년 문학의 발원지는 어머니와 자연이다.
  <노을을 읽다>는 감각의 집적(集積)과 언어의 마술로 작가의 문학적 이념을 감각적 현현(顯現)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짙은 서정의 향훈은 안개 자욱한 강가에 흐르는 샹송처럼 몽환적이다. 노을이 주는 다채로운 이미지와 동화적 상상을 결합하여 진공상태의 언어미학을 구현한다. 시종일관 일정한 톤의 목소리와 몽환적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역량이 돋보인다. 비유컨대 미성의 소프라노가 부르는 한 편의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은 듯하다. 문장마다 서정의 누수가 흘러넘치고, 가을날 노을처럼 여운이 짙고 길다. 상상과 환영(幻影), 기억이 뒤섞이면서 발산하는 카오스적 매력이 분출하는 작품이다.
  농경시대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인 작가의 정서는 고향의 자연에서 뛰어놀며 체화(體化)된다. 이런 농경문화에서 발원한 정서는 문학의 장에서 서정으로 형질변경을 한다. 김만년의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수필의 서정을 다른 차원으로 격상시킨 점이다. 언어를 다루고 직조하는 세련된 감각의 멋이 있다. 자연에서 서정을 포착하는 예리한 감각과 체화한 정서에서 발원하는 서정은 작가의 문학적 자산이다. 무엇보다 서정을 그리는 붓질이 탄탄하다. 그러나 자연을 서정의 순혈주의에 가두는 것도 경계해야 할 요소이다. “서정이란 어떤 근원을 되돌아보는 행위이고 존재의 ‘진정성’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노력이며 상실된 코스모스를 회복하려는 실천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70쪽). 수필문학이 지향해야 할 서정은 자아의 본향인 고향과 자연을 사유하면서, 대가족의 따뜻함과 자연에 순응하였던 공동체의 질서 회복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문제는 ‘새로운 서정과 수필의 진정성’이다. 작가가 내장한 다양한 층위의 감각과 폭넓은 음역대로 자기만의 서정을 구축하기를 바란다.


  2. 지방분권 체제가 불러온 효과들
  모든 문학은 제 나름의 통치론과 체제론을 지닌다. 수필이라는 장르는 ‘주체’라는 일인칭 체제 아래 ‘주제’라는 고지를 향해 일렬로 행진한다. 작품을 구성하는 화소들은 주체의 지휘 아래 움직인다. 말하자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이다. 질서정연한 선형적 구성은 모든 화소들이 주체의 지배 아래 복종하게 한다. 이런 체제를 기하학적으로 도식화하면 평면도이다. 맨 위에 주체가 있고, 그 아래로 화소들이 각자의 역할에 맞추어 나란히 줄을 선다.
  평면성은 수필의 한계이자 열등감이었다. 소설이 건축물의 투시도라면, 수필은 평면도이다. 주체와 체험이라는 두 지점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수필의 평면성은 계몽주의와도 연관이 깊다. 주체의 발화는 긍정적으로 본다면 지혜의 말씀이고, 부정적으로 본다면 ‘나를 따르라.’는 강요의 전언이다. 계몽적 목소리의 퇴조는 ‘주체와 권위’의 위기를 반영하는 시대의 증상이었다. 평면형의 그릇에 분출하는 인간의 영혼을 담을 수 없다는 변혁의 몸부림은 체제를 전복하기에 이른다. 주체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한 평면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이다. 주체의 권위를 양보한 자리에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대수필에서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문학도 시대와 함께 흐르고, 인간과 함께 진화하니까.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지면이 무한정 제공되었고, 계몽주의의 쇠락이라는 시대의 흐름은 수필의 진화를 촉진한 외적 요인이다. 수필을 둘러싼 이런 외적 조건의 변화와 수필 자체의 진화 욕망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지도 위에다 평면도만 그릴 수 없다는 갑갑함이 주체와 계몽주의의 퇴장을 앞당긴다. 일인 통치의 욕망과 선형적 의미 생산체제를 내려놓은 자리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화소들이 들어온다. 김만년의 수필은 이런 체제 변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실천한다.
  표제작 <사랑의 거리 1.435미터>를 살펴보면 작가가 추구하는 독창적 구성이 가져온 효능을 체감할 수 있다. 기관차를 몰고 다니던 철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철길의 외형으로 넘어간다. 그런 다음 굽은 길을 지향하는 철길, 철길에서 피어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여기까지는 철길의 외형과 의미, 이용객에 관한 부분이다. 다음 부분에서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옮겨간다. 말하자면 가요 편곡에서 한 음 높이는 전조(轉調)전략이다. 철길의 궤간 1.435미터를 두고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성에 대한 해석에 들어간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사람과의 거리, 부부 사이의 원심과 구심의 긴장 관계를 넘어선 존중과 배려의 거리 등이 등장한다. 전반부가 철길의 표면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면, 후반부는 철학적 주제와 심층적 의미를 펼친다. 뒤로 갈수록 주제를 향한 결집력과 호소력이 힘을 발휘한다. 치밀한 전략적 고민이 짙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작품 <감자 먹기 좋은 날>도 보면 감자라는 화소가 지닌 수많은 줄기들을 가져온다. 비 내리는 날 감자 삶는 냄새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던 농경시대의 풍경으로 이동한다. 감자의 다양한 효능과 감자에 대한 추억, 주말농장에 피는 감자꽃의 아름다움, 감자 맛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밖에도 권태응의 동요 ‘감자꽃’과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화자의 유년기 체험담 등을 양념처럼 동원한다. ‘감자’라는 작은 화소 하나를 가지고 ‘감자열전’을 펼친다. 주체는 작품의 지휘권을 내려놓고 감자를 주인공으로 앉힌다. 하늘의 새처럼 ‘감자’라는 대상을 조망하고 자리 배치를 할 뿐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체는 화자가 아니라 감자이다.
  김만년의 작품 대다수가 주제를 향해 한 우물을 파기보다 다면적 구성을 선호한다. 가축의 먹이를 찾아 몽골 초원을 이동하는 유목민 같은 태도를 취한다. 주체는 뒤로 물러나거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화소들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전략이다. 주목할 지점은 다양한 화소들을 가져오지만, ‘주제’라는 광장을 향해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화소들이 지닌 부피와 무게를 가늠하여 적절하게 배치하고, 화소들이 옆길로 새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단속하고 세심하게 살핀다.
  김만년의 수필은 중앙집권 체제를 종식하고 지방분권 체제를 도입하여 성공한다. 주체 중심의 자명한 일인칭의 세계를 뛰어넘어 유기적인 전체성을 추구한다. 주제를 구현하는 방식도 바뀐다. 주체가 직접 발화하지 않고 객체인 화소들에게 발언권을 넘긴다. 발화자의 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각각의 화소들이 자유로이 어우러지면서 주제라는 큰 바다에 다다르는 자율성이 부여된다. 이런 곳에는 미증유의 풍경과 낯선 기운이 생성된다. 다양한 화소들이 접속하고 부딪치면서 발산하는 생경한 감성과 의미는 예상치 못한 상상의 열락(悅樂)을 제공한다. 화소들의 의도적인 잡종교배는 수필의 입체성을 구현할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빛나는 문체 앞에서
  김만년은 언어를 부리고 문장을 직조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추상적 묘사와 서정적 진술로 이어지는 문장이 정교하게 계획된 배치의 기술처럼 보인다. 문장을 팽팽하게 조이다가도 놓아버리고, 느슨하게 풀어놓았다가 강렬하게 당기는 품새가 노련하다. 특정한 구절에 자주 눈길이 멈추고, 그 문장이 상징하는 장면을 응시한다. 밑줄을 긋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들이 눈부시다. 감각이 승하면 내용이 빈약하고, 내용이 무거우면 감각이 무디다. 그의 문장들은 섬세하고 유연하지만, 은근하고 진중한 맛도 있다. 무엇보다 김만년의 문체는 감각적이나 주제를 향한 맥락을 놓치지 않는다.
  한 작가의 정체성은 문체로 드러난다. 문체는 한 작가가 살아온 이력과 타고난 기질, 문학의 계보 등을 총체적으로 증명하는 어떤 것이다. 김만년의 문체는 노련하고 정교한 세공사의 손길을 거친 보석처럼 반짝인다. 블루의 사파이어처럼 서늘한 빛깔을 내뿜는가 하면, 보라의 자수정처럼 깊은 음영(陰影)을 발산하기도 한다. 무형의 돌덩이를 섬세한 손길로 가공하는 중세의 장인처럼 그의 손길을 거친 문장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특히 자연의 풍경을 다루는 데 능숙하다. 은유와 상징, 비유 같은 수사학을 동원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대상의 움직임이나 빛깔, 이미지를 언어로 형상화한다. 그 솜씨가 가히 수준급이다.
  김만년의 살아온 내력을 보면 맏이와 가장의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만만치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의 문체는 음울하거나 무겁지 않다. 예민한 감각을 지녔으나 밝고 건강하다. 그렇다고 인생의 얼룩이나 가족사의 그늘을 화려한 문체로 포장하거나 감추려하지도 않는다. 비유컨대 ‘솔’음 정도의 높이와 ‘장조’의 음률이 생의 무거움을 덜어준다. 그가 애착하는 텃밭의 채소들처럼 풋풋하고 상쾌한 문체가 있는가 하면(<채마밭 소묘>), 중후하고 묵직한 문체도 볼 수 있다(<월정리역 비가>). 대상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마치 노련한 트로트 가수처럼.
  “해가 포물선으로 활강할 때 바다는 순식간에 냄비 물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노을에 덴 고기들이 허공으로 불방망이질을 친다. 마치 수평금반 위에서 은빛 무희들이 왈츠를 추는 듯 비상하는 선율이 역동적이다.”(<노을을 읽다>). 장려하게 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묘사한 이런 문장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의 문장은 매혹적인 감성을 품고 있다. 대상과 언어가 겉돌지 않고 둘이 자연스럽게 몸을 섞는다. 어떤 경우든 파열음을 내지 않는다. 마치 노을 속에서 언어가 스스로 걸어 나와 말을 하듯 원초적 상징성을 발휘한다. 풍성한 어휘력, 언어를 배치하는 솜씨, 대상의 특질을 잡아내고 언어화하는 감각 등은 독보적이다. 김만년이 조각한 빛나는 문체들은 수필의 문학성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밖에도 김만년의 수필이 가진 장점과 미덕은 많다. <철의 향기>, <지하철 타는 아이> 등에서는 건강한 노동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들에 대한 연민 등이 내장되어 있다. 현대수필의 맹점으로 지적받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함의한 작품도 있다.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어머니의 깊은 상흔을 그린 <한 장의 사진>에는 전쟁과 분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비극적 가족사를 담아낸다. <즐거운 조문>, <월정리역 비가> 같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에 상상을 도입하여 수필의 그릇을 확장한다. <개나리꽃 단상>, <오래된 집> 등에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이십 년 만에 묶은 수필집이라서 그런지 형형색색의 조각천을 이어 만든 퀼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이제 김만년의 수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첫 수필집 《사랑의 거리 1.435미터》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문체에 대한 숭고한 이념으로 가득 차 있다. 철학의 논리보다 감각의 논리가 그의 수필관을 지배한 듯싶다. 서정성 넘치는 문체는 감각의 쾌락을 선사하지만, 한 생이 품고 있는 깊이를 채굴하긴 어렵다. ‘그리움’으로 표상되는 서정적 메커니즘을 넘어서는 도전을 요청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감각적인 문체가 김만년의 유력한 자산이라면, 앞으로 그의 수필은 무한대로 진화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시점이다. 감각과 철학의 결합을 하려면 격렬한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대지적 삶의 원리를 채굴하는 철학적 깊이를 가진 작품을 기대한다. 그 모색이 힘들겠지만,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 문학을 견인하는 든든한 수레가 될 것이다. 모든 문학은 선 채로 잠을 자야 하는 운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