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유첩(西浦遺帖) / 김이랑
다도해 사연도 많은 물길, 남해도가 어째서 신선의 섬인지 단지 풍광이 수련한 까닭만은 아니외다. 천 리 유배 길, 늙은 말발굽 터벅거리다 보면 부귀와 공명은 발병 나 돌아가고, 남루한 몸뚱이 하염없이 흔들리다 보면 미련까지 죄다 떨어집니다. 뭍에서 떨어져 섬, 섬에서 떨어져 노도 외딴 기슭에 닿으니 이탈하는 것ㅇ느 섬, 밀려난 것도 섬이더이다. 소신所信을 지키는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서 목숨조차 내 것이 아닌 섬이 되었을지라도 해, 달, 별, 비, 이슬, 하늘양식 조석으로 내려오고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이치를 꿰어놓은 정음正音이 있으니, 관직은 삭탈에 몸은 유배나 시심詩心까지 위리안치*이리까. 초옥에 홀로 앉아 멍든 가슴 고갱이를 갈면 먹물이 바다를 이루어 이를 붓으로 언제 다 말리리까만, 한 획 두 획 긋다 보면 이 몸이 섬인지 선仙인지, 얼마 남지 않은 삶, 영욕에서도 이탈해 한 점 구름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하외다.
동방에는 예도 많지만 해가 숨었다 나타나는 건 철없은 숨바꼭질은 아닐 거외다. 해 아래 빛날 게 없다고 나팔꽃 저리도 외치매, 땅 옴팡지게 움켜쥔 들꽃들 제 빛으로 반짝이는 법 잊지 말라 비켜주는 게 아닐는지요. 권력의 섭리는 저와 달라서 해는 양지의 얼굴만 기억하고 달은 음지를 비출 줄 몰라, 애옥살이 민초들 눈빛 시들어가니 권좌 밤낮으로 빛단들 어디, 천심 반나절만 하리까. 모진 삼월 매서운 칼바람에 참꽃도 제 빛을 버리고 노랗게 피어야 애먼 대롱 동강나지 않으매, 세상의 조화를 꿈꾸는 담론이 시들어버리면 시절의 주름은 언제나 펴질지 내가 초록이니 너도 초록으로 피라고 문초하지 않는 자연을 꿈꾸다 외려 내가 자연이 되었으니, 이 귀의 또한 하늘의 뜻인 게지요. 모진 비바람에도 제 영혼의 색깔을 잃지 않고 피는 생명, 그 신통한 조화를 보면 세상에 이만한 스승도 없다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초옥 길섶 동백 핏빛 망울을 보고 눈물이 먼저 터지려 하면 하늘을 보고 마는 것이지요.
하늘의 명을 타고난 임금이라 해서 천심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지만 귀를 열어도 가까운 소리만 들리고 눈을 열어도 바깥을 보지 못하는 구중궁궐이니 임금 또한 섬이 아니리까. 이 몸 또한 섬이 되다 보니 그 고독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천심이 경국지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백성의 지난한 삶은 누가 돌보며 어지러운 세상은 누가 바로잡을지, 천 리를 가다 보면 말言인들 그 뜻이 온전할 리 없어 내 다 하지 못하는 말을 이야기로 엮어 <사씨 남정기>라는 이름으로 지인에게 보냈으나 인의 장벽에 막혀 불쏘시개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지금은 암투가 궁궐 주변을 휘감고 도나 하늘과 땅의 이치가 그러하듯 세상사 또한 사필귀정, 머잖아 바른 데로 돌아갈 터이니, 이 노회한 마음은 세상을 걱정하는 붓을 놓고 이제는 이 유배의 땅을 돌아보며 나를 돌아보려 하외다.
세상엔 눈도 숱하지만 달빛은 어쩌면 저리도 순순한지, 열두 가지 덕德으로 세상을 본다는 황소 눈을 닮아서만은 아닐 것이외다. 깨져 성난 돌도 부러진 가지도 앙심을 재우는 달밤, 수심 뒤척이는 그림자 재워 놓고 살그머니 밤길 나서는 내가 있습니다. 이 땅에는 달빛 이름 품지 않은 봉우리 없고 그리운 전설 흐르지 않는 나루 없으니, 절애고도라고 해서 달빛 그리움이 흐르지 않을는지요. 섬 기슭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바다에 빠지는 건 달빛인데 외려 바다가 달빛에 젖으니, 비단 글줄 만 필 짜 세상을 위무한들 어디, 달빛 한 조각만 하리까. 밤 이슥토록 마주 않아 시절을 논하던 어진 벗들은 어느 초야에 묻혔는지, 푸르라, 곧으라, 이르신 어머니는 어느 피안彼岸의 강에서 노를 저으시는지. 노 정객은 그저 달을 바라볼 뿐입니다.
해는 숨고 달이 눈을 감는 그믐, 칠성별은 어째서 저리도 초롱초롱 빛나는지 그 까닭이 있을 거외다. 제 몸을 태워 세상의 도를 밝히는 청백리도 지상의 별자리 하나 탐하여 별빛 되비쳐 별인 양 하는 탐리貪吏도 고향별을 떠나 암흑 바다를 건너 이 땅에 유배 온 영혼이 아닐는지요. 그 영혼을 품어 세상에 내보내고, 별의 자식 이 물로 죄를 씻겨 탈 없이 돌려보내겠노라 지상에서 가장 맑은 약속으로 하늘에게 상소하시던 당신, 금산 아래 만 무릎 꿇은들 어디, 모성 한 무릎만 하리까. 오늘도 어머니를 대신해 사립짝에 홍사초롱 내건 아내가 해진 마음 깁고 공그르다가 삼경을 훌쩍 넘어서야 노루잠에 들 것이니. 모성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한뎃잠 자는 나그네 눅진한 몸 뒤척이는 이 밤, 지상의 여정을 마친 영혼들 길 잃지 말고 돌아오라 칠성별은 저리도 반짝입니다.
척박한 섬에도 목마르지 말라 샘이 있지만 물 들이켜도 목이 마른 건 쪽샘이 쉬이 말라서만은 아닐 거외다. 샘물 떠 마실 때마다 표주박 안에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초상이 있습니다. 내가 저를 마시면 저도 나를 마셔 갈증이 마신 건 갈증이라. 갈라터진 다랭이논이야 하늘에 투정이라도 부린다지만, 허제비 드러누운 내면의 묵정밭은 영혼의 호미가 녹슨 탓이니, 강물 다 퍼마신들 황폐한 속이 촉촉해지리까. 바람도 목마른 돌담 귀퉁이에서 햇볕 조각에 이슬방울만 마시고도 이 땅에 별 한 송이 바쳤다고 하늘로 봉수를 올리는 민초가 있습니다. 이 몸 또한 섬 기슭에서 땅 움켜쥔 초목 한 포기와 다르지 않거늘, 그리하여 오늘은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별의 혼을 타고난다는. 저 주검조차 알뜰한 민들레 앞에서 내가 이 땅에 바친 것들을.
팔도에는 명산도 많지만 금산錦山에 만상이 모이는 건 산이 비단옷을 입었다 해서만은 아니더이다. 땅 끝에서는 말도 멈추는데, 푸른 갈기 휘날리며 대지를 내달리다 바다에 곤두박질친 저 섬들은 오늘도 깊은 참선에 빠져있습니다. 길벗도 글벗도, 지도 한 쪼가리 있는 것도 아닌, 해도 달도 없는 길, 상투 풀린 머리칼은 바람이 가르마 타고 물살이 어루만진들 어디, 망망 밤길 이르는 등불만 하리까. 세상의 지표로 우뚝 서서 절개 높은 봉우리 몇 거느리고 독경 맑은 물길 바다로 여는 꿈을 저들도 한때 꾸었을 터, 멈추어야 할 자리에 서지 못하고 유배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눈 밝고 마음 맑은 금산에게 길을 물어 부동의 중심을 찾는 이 몸도 저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마음까지 숙여 섬들에게 합장을 합니다.
구구절절 세속을 휘돌아 온 섬진강은 바다 어귀에 닿아 속명 버리는데, 아무 작정 없는 귀의는 아닐 것이외다. 심산유곡에서 발원해 벼랑에서 뛰어내린 물은 수평에서 숨 돌리고 다시 비탈을 굴러 내려갑니다. 기울기만큼 숨 가쁜 까닭을 시내에게 묻고, 산을 돌아 들을 건넌 시내는 얕은 만큼 소란한 까닭을 강에게 묻습니다. 세 치 혀가 세상을 주무르나 바다는 한 치도 못 주무르고, 한 뼘 손이 만물을 쥐고 펴나 물은 반 줌도 잡지 못하니, 말 청산유수인들 어디, 바다로 가는 한 걸음만 하리까. 깨고 닿아야 깨달음이요. 진리의 중심에 닿아 도장을 찍으라 하시니, 오늘은 그 말씀 따라 어부의 배에 몸을 실어 바다로 나가보았습니다. 욕망의 뭍에서 멀어질수록 수평선이 나를 중심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니, 그곳이 바로 해인海印이 더이다.
남해를 굽어보는 주봉을 어째서 망운으로 이름하였는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외다. 죽음亡 달月 임금王 비雨 구름雲 그리하여 망운望雲,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복이 금산에서 노닐다 발자국 새겨놓고 서리곶에서 탐라로 갔다지요. 한라산을 유람한 서복은 서귀포에서 떠났다 하나 진시황은 불로하지 않았으니 서복은 홀연 뱃머리를 돌려 신선의 섬으로 자신을 유배 보낸 게 아닐는지요. 불火 비雨 이슬露, 성인聖人의 말 샘물 삼아 마시면 영생불사라 말씀하시니, 천하를 손에 쥔들 어디, 삼풍지곡* 한 모금만 하리까. 하늘양식 마시는 선인장仙人掌, 백년초가 사는 이 섬에서 산에 기대면 선仙이니, 망운산 기슭에 초옥 한 칸 짓고 살면 신선이 아니리까, 서복은 망운望雲을 거마車馬삼아 한려선경 유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외다.
초옥 모퉁이에 남은 땔감을 주섬주섬 긁어모아 군불을 땐 건 병든 몸에 한기가 돌아서만은 아니외다. 마른 장작은 불길이 후련하고 희나리는 미련이 어찌나 매운지 기어코 내 눈물을 보고야 맙니다. 말 못하는 생도 저러한데, 하물며 희로애락애오욕 덩어리야 말 안 한들 모르리까. 이 다비식이 끝나면 한 줌 재만 남겠지만, 그래도 삶이라고 일컫는 것들이 몸을 살라 싸늘한 구들 한 평 데우고 배좁은 정짓간이라도 밝히니, 너럭바위 천년인들 어디, 하루 이끼만 하리까. 오늘 굴뚝 높이 봉수를 올렸으니 남은 것은 명命을 기다리는 일, 지난겨울이 하도 지난해 벌나비 춤사위를 더는 못 볼 줄 알았으나 만화방창 향기로운 전별까지 누렸으니, 이런 호사도 없다 하겠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게 꿈인 듯, 바라건대 이 몸 떠나는 길 배웅하시려거든 눈물일랑 마십시오.
노도櫓島라 해서 내 공방에서 노를 하나 만들어 두었습니다. 임금의 교지를 실은 배는 아니 오고 간밤에 이승잠이 수수롭더니 하늘의 명이 먼저 내려왔거늘, 이제 낡은 조각배라도 한 척 얻거든 영욕의 몸에서 영혼도 이탈해 서포西浦 동백 노을 따라 해원解寃의 노를 저을 거외다. 누명이야 언젠가 벗겠지만 유복자로 태어나 세상에서 받은 은덕은 갚지 못했으니, 필시 가천 기슭에 닿아 축생으로 윤회하지 않으리까. 멍에를 쓰고 쟁기 끌어 발굽 닳도록 설흘산* 다랭이논 백팔법계法階 다 갈아 지상의 업장을 다 소멸하면, 내 삿갓도 마패도 없는 암행으로 이 땅의 유배기를 받아쓸 거외다. 내 시심詩心의 유해를 뿌린 신선의 섬 해맑은 언덕에 묵향 그윽한 날, 가없는 억새가 천지인의 붓을 휘저으면 그저 바람인들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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