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우물 /이삼현
고향집 곳간에는 커다란 쌀독 하나가 있었지요
바가지를 든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퍼 올리던 우물이었지만 늘 말라 있었습니다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연꽃 송이처럼
발그레 동창이 물들 즈음
바닥 긁는 소리에 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빠지면 풍덩 잠길 우물 앞에서 까치발을 들고
공손히 허리 숙여 깊어진 어머니
한 톨이라도 더 식구들을 먹일까
고대하는 목마름으로 바닥을 훑곤 했습니다
한껏 퍼 담고 싶은 바가지와 맨 바닥이 만나 지르는 비명
몇 톨 남은 알곡들이 참새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짹짹거렸습니다
언제 적 끊긴 물길
더는 샘솟는 우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아홉 식구의 공복이 피가 나도록 긁고 또 긁었습니다
가을 한철, 겨우 차고 넘쳤을 항아리 우물
아무리 퍼 담아도 한 바가지 어둠
한 바가지 소란만 따라 올라올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정성껏 사철 바닥을 긁어모아
다음 한 끼를 밥그릇에 담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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