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향기

문향이 넘나드는 선방입니다

좋은 시

권상진 시

에세이향기 2024. 9. 14. 09:35
접는다는 것 권상진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변용






별의 입구 / 권상진




별을 향해 걷다 보면 걸어서는 끝내 별에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발맘발맘 걸어서 다다른 종점 근처에 아직도 저만큼 떠 있는 별


보폭이 같은 사람들과 웃고 울다가 누가 걸음을 멈추면 그이를 땅에 심게 되는데 거기가 바로 별의 입구


일생 딱 한 번 축복처럼 열리는 작은 문


함께 걷던 이들이 눈망울에 비친 기억들을 문 앞에 떨궈놓고 이내 총총 흩어진다


그런 밤은 먼 하늘에서 배를 한 척 보내와 무덤과 별들 사이에 환하게 정박해 있다가


그믐이 되면 그 달 무덤까지 내려와 멈춘 걸음들을 서쪽 하늘로 데려간다


그리운 눈을 하고 가만히 보면 은하수까지 가득 찍힌 발자국들








그녀가 피어나는 유일한 방법 / 권상진




여자는 손목으로 울고 있었다
눈물만으로는 비워낼 수 없는
삶의 물꼬를 돌려놓고 싶을 때마다
손목에 칼을 댔다
외로움은 칼끝보다 더 고통스런 통점
남겨진 한쪽이 삶에 손 내밀수 없도록
깍지 낀 손이 기도처럼 단단했다
욕조는 붉은 잉크가 풀어내는 독백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받아 적었다
선명해져 가는 문장 속에서
발갛게 피어나는 여자
어긋난 꽃차례를 따라가다 보면
어둠 속에 웅크려 있는 소녀를 만난다
골절된 날들에 부목을 대고
가만히 속내를 더듬어 가다 보면
손목엔 칼끝이 새긴 환생의 숫자들,
가만히 스캔해 보면
‘나를 잊지 말아요’






이모 / 권상진




혼밥이 지겨운 날은 식당으로
되도록이면 외진 골목 허름한 식당으로
그곳에서는 아무나 이모


이모 물, 이모 소주, 이모 김치 이모이모이모
우린 서로 타향이니까
찡그리지 않고 우린 가족이니까


엊저녁엔 고시원 준이와 실습나간 혁이가 
점심엔 기간제 숙이가 명찰에 고개를 묻으며
이모이모를 수없이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갔는데 
엄마엄마 불러보고 싶은 것을
이모이모만 수도 없이 부르다 갔는데


괜스레 빈자리 서성이다가
깍두기 콩나물만 고봉으로 밀어 놓고 가는
골목 식당에는 이모가, 엄마 같은 이모들이
웃으며 조카들을 기다리는데


혼밥에 혼술이 미치도록 서럽거든 식당으로
빈 수저 앞에 놓고 엄마엄마 부르고 싶은 날엔 
공기밥 한 그릇 꾹꾹 눌러 엄마처럼 기다리는
이모네 식당으로






막걸리와 카페모카 / 권상진
     


저녁의 한 때를 기억한다
1
막걸리 한 병이면 충분하던 아버지의 발효 시간
주둥이에 엄지손가락을 쑤셔 넣고
거꾸로 흔들어, 주발에 쏟아내던 탁한 문장들


병이 비워지면 잔이 채워지고
잔이 비워지면 이내 아버지가 꽃보다 붉게 차올랐다
아득한 아포리아를 건너 집으로 돌아온
허무의 시간들이 빈병과 빈잔을 지나
한 편으로 완성되던 하루의 서사


2
나는 하루의 문장을 그러모아 행간을 적는 사람
카페모카를 앞에 두고 첫 줄을 기다린다
내가 몰입이라 부르던 시간들은 모두 휘발성


저녁의 뒷골목에서 실패한 흥정들을 생각한다
적는 순간 온기가 사라져버리는 별먼지 같은 단어들
모카는 캄캄하게 식어가는데 
아직 읽을 수 없는 나라는 문장
오늘은 절실하지 않았거나 아직 버틸만 하거나


저녁의 한 때가 아프다




'좋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몸살/김선우  (1) 2024.09.25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시 모음  (3) 2024.09.22
거울 속으로 온 손님 / 이대흠(1967~ )  (0) 2024.09.11
비빔밥 / 이대흠  (2) 2024.09.11
꿈틀거리다 - 김승희  (3) 2024.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