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왕성 유일 전파사
흑백 텔레비전에는 명왕성(冥王星)이 들어 있다
어쩌면 모든 가전(家電)에도 있는지 모른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 하는 것이 명을 다한 거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 모르는 게 없다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 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바닥에 엎드려 기술을 익히던 무릎, 생의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달달 외우던 공구들의 이름마다 알파벳이 벗겨져 반들반들하지만 마치 자기 뼈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닷새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드는 난전(亂廛), 지문이 닳도록 눌러 헐거워진 버튼, 눌러도 빠져나오지 않는 중고 카세트테이프를 어깨너머의 기술로 척척 고쳐낸다 스프링을 갈아 끼우자 사라진 가수를 불러내는 카세트 녹음기, 구성진 노래가 전파사 앞을 환하게 닦아 놓으면 골목에 아침이 밀려온다
고장 난 이웃이나 웃음이 사라진 마음을 앉혀놓고 드라이브로 막히고 끊어진 것들을 풀고 이어주면 목소리를 되찾는다녹슨 심장에 균열이 시작된 건넛마을 이웃사촌까지 다정한 눈길로 땜질하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면서 다독다독 고친다
십자와 일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만 있으면 퇴출당한 명왕성도 거뜬히 고친다는 명왕성 유일 전파사 그 사내
봄날, 고친 카세트 들고 집으로 간다
흥겨운 듯 절절한 트로트가
막 돋아난 이파리처럼 뒤를 따른다
파문을 건지다
물속으로 가라앉은 파문이 있다면
물 밖은 몇 배나 많은 수문水紋으로 분주해진다
꼬리를 감추는 무늬들은 양서류일지도 모른다
물속으로 걸어간 사람은 없는데 물속에서 걸어 나온 파문이 있다 그때 가슴속에 들어간 파동은 지울 수 없는 무늬로 새겨졌다 강가에 있는 나무들은 물그림자를 먹고 산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지른 외마디 비명, 겁에 질린 표정과 바람의 흔적까지 나무는 차곡차곡 제 몸에 둥글게 기록했다
며칠 떠돌다 나무속으로 들어찬 물안개
양파 같은 달도 맵게 여물어 간다
중심을 잃은 파랑波浪은 흐릿하게 나무의 궤도를 돈다
잠잠한 수면은 때론 난폭하다
물이 되어가는 사람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채취를 일시에 제압한다
가시처럼 박혀 있는 멍울이 물가로 번지자
강가의 나무들이 발가락으로 건져 올린다
물 밖으로 걸어 나온 늪의 시간
개구리처럼 웃음을 부풀리는 본능을 갖는다
낚싯대를 드리운 노파가 물속의 풍조風潮를 지켜보고 있다 분주한 밖이 퍼 올리는 깊은 파문, 안에서 가라앉은 무거운 소리는 메아리로 흩어졌다 수많은 물고기와 죽음이 태어나는 바다, 그 많은 허우적거림은 어디로 갔을까
나무는 물에서 빠진 것들을 모두 나이테에 기록해 두었다
봄의 비탈에 마을이 있었다
산 1번지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경사진 주소를 등에 지고 다녔다
옆집이 옆집을 붙잡고 견디는 집들
조금씩 침범한 측량선으로 묶여 있다
옆집의 질문에 그 옆집이 대답하는
얇고 낮은 말소리들
여차하면 굴러갈 주소들을
꽁꽁 묶어두거나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그런 주소를 가진 사람들은 점점 가팔라졌지만
흐린 날엔 지붕을 달리는 폐타이어들을 손보곤 했다
가끔 지인들이 양손 가득
봄 햇살이나 납작한 소식들을 들고 찾아오면
덩달아 따뜻해지곤 했다
번지수를 등에 지고 다닌
집배원들은 옆집과 옆집을 섞어 배달했지만
목련 나무나 수돗가, 허물어진 담이
서로 번지수를 대신했다
헉헉거리는 오르막을 껴입고 다닌 사람들
찢어진 까만 봉지의 난감한 속들이 흘러
저 아래로 굴러가곤 했다
제비들은 처마 밑이라는 주소가 있지만
산비탈 아래 판잣집은 문패도 없다
밤하늘의 별빛과 별빛을 이어 붙이면
꼭짓점마다 당신이 살고 그중 어딘가에
내가 살던 경사진 집이 있었다
놓친 것들은 어둠 쪽으로 기운다
큰바람이 지나는 대숲 앞섶이 열려 있다
저기에 중심이라곤 없다
허물어진 빈자리뿐인 저 옷깃을 여밀 수 있을까
한겨울 열려 있는 앞섶에단추를 달고 옷깃 여며 바람을 막는다
추를 단 가슴에는 구멍 몇 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무게가 있어 틈을 메우고 똑바로 선다 단추는 중심에 모여야 산다 풀어진 구멍으로 들어오는 앞섶은 아찔해서 한쪽으로 기우뚱거렸다
걷다가 놓쳐버린 둥근 심중은 도르르 굴러 어디까지 갔을까 실밥을 끊고 사라진 기억들, 손을 놓은 추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제자리를 놓치면 추가 기울어 틈이 벌어지고 간섭이 시작된다 추를 빠뜨리고 걸어온 길을 한참 되돌아간다 질량을 잃은 저울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져 걷다가 수평을 잡아주던 눈빛들, 따뜻한 말을 가슴에 달고 한 올의 볕에 마음을 일으킨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중심으로 공손하게 움츠러든다 비좁게 파고들어 허방을 메우고 때로는 명치가 되고 때로는 배꼽이 되어 펄럭이는 시간을 붙잡고 있다
추는 단번에 중심을 잡는 법이 없다 몇 번의 왕복과 자잘한 떨림 뒤에야 어떤 무게의 중심에 머무르다 기어이 제 무게를 다시 허문다 무게의 중심을 구하는 것에 추가 머물렀던 그 잠깐을 빌리는 것이다
앞섶이란 감정을 채근받는 자리
울렁이고 흔들린다
아침과 점심 점심과 저녁 저녁과 밤 사이
단추를 가지런히 달아 놓는다
저녁은 아침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놓친 것들은어둠 쪽으로 기운다
매달린 추가 가슴을 흔들 때
명작
들판에서 산비탈까지
밭고랑에서 무논까지 이어진 기나긴 문장
가끔 쉼표 같은 헛기침이 있어
경작의 단락들이 계절의 땅에 섞이곤 했다
새벽 별빛 총총히 울면 퇴비 한 거름 지고 사립문 나서는 아버지 입이 큰 바소쿠리에 노을 진 뻐꾸기 울음을 가득 싣고 돌아왔지만, 등에 얹힌일곱 식구의 저녁은여전히 배가 고팠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가난, 퇴고할 수 없는 무릎은 각주조차 달 수 없었다
지게에 얹혀 있는 계절, 문맥을 이어준 것은 싸리로 엮은 둥글넓적한 발채였다 지겟작대기가 부지런한 동사라면 바소쿠리는 느슨한 보조사 뒷산 진달래는 칙칙한 생을 울긋불긋 색칠해준 형용사였다
첫걸음마를 뗄 때부터 아버지를 읽었으나 어떤 대목에선 난독증을 앓고 또 다른 문장에서는 한참 동안 서성이곤 했다 더듬거리며 읽어도 끝이 없는 안타까움,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책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대로 전집이었다 서슬 퍼런 서문에서체념의 후기에 이르는 서사는 검은 수염이 휜 수염에 이르는 길, 슬하에 일곱 이야기를 거느린 장문이었다
아버지의 문장을 져 나르던 나무지게 헛간 앞에서 늙어간다 삭아가는 바소쿠리는 입을다물지 못하고 주인 잃은 연장들은 녹꽃을 피우고 있다
북극곰
거대한 유빙 너머 눈 덮인 침엽수에도
검은 발톱이 있어요 공중을 할퀴는
우듬지에서 구름이 긁혀 나와요
냉장고 열면 가끔 검은 내장이 쏟아져요
몇 달이 지난 무관심이
발등을 간신히 비켜 어슬렁거려요
식욕이란 순백색의 앙상함,
빙하는 새끼 곰을 잡아먹어야 하는
분열을 겪고 있어요
오후에 펼쳐지는 먹이사슬은 엉망이에요
하늘과 맞닿은 서쪽부터
마구잡이로 피의 포획이 시작되죠
백야의 천적은 불면이에요
지구는 밤새 털을 곤두세우고 있어요
지평선이 저녁놀을 삼키고 나면
인공위성은 별들의 포식자죠
백야는 둥둥 떠다니는 고립이 아닐까요
유빙은 더 잘게 조각나고
그 틈에서 처진 내장을 내보이죠
우리도 멸종에 던져질 때가 올 거예요
야산에 버려진 냉장고처럼
그 생각을 하면 지구가 좀 더 기울어져요
동면에선 태양처럼 기도가 없어도
북극곰은 두 발을 꼭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봐요
백야를 자처하는 네온이 짧은
겨울을 사육하고 있어요
방심
어렸을 때는 좋았지
저절로 흔들려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뿌리가 얕은 이의 틈을
혀로 갖고 놀다 보면 저절로 쏙 빠지던 일
생각이 짧아야 쑥쑥
자랄 수 있었으니까
그때 나는 아주 작은 괄호 안에서도 자유로웠고
머리핀 하나로도
몇 개의 봄을 수집할 수 있었으니까
뿌리가 흔들리는 이빨
누군가 근황을 물으면 아픈 내색을 묻혀
대답해야 하는 앙다문 근황
오래 녹여 먹기에는 딱딱한 것들이 좋지
와.
그.
작.
깨뜨릴 수 있고 혀를 즐겁게 하지
이가 방심하는 맛이지
그래서, 그러니까
이빨 속 벌레 한 마리가
아주 오래전 유치의 시절까지
길고 긴 구멍 하나를
실뭉치처럼 굴리며 지나가지
서펜타인 스텝
세상 대부분의 춤은
소용돌이를 입고 있다
프리스케이팅을 추는 남자, 제자리를 달리는 무용수는 춤 속에서 빙그르르, 지금은 없는 친구도 강 한복판 소용돌이를 입고 살았다 그 회오리 속에 벗어 놓은 한 벌의 춤엔 사람이 빠져나간 흔적이 없었다
적도의 어느 경계에는 물이 거꾸로 배수구를 빠져나간다
각기 다른 적도의 경계를 오른쪽으로 돌다
다시 왼쪽으로 돈다
반사작용은 어떤 춤일까 끝끝내 팽이처럼 회전을 멈춘 당신은 식물의 꿈을 갖게 됐지만, 일생을 돌고 돌아 다시 어지러운 정수리는 싹을 내지 못한다
평생 자신을 떠돌다
자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바람이나 구름
식물의 소용돌이에 빠진 어머니는 끝끝내 식물성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식물의 꿈을 꾸고 있을까 식물의 방식으로 돌고 돌아 뻗어간 줄기가 옥죄어 오는 동안 식물이 되고 말았다
소용없는 소용돌이
끊임없이 돌면서 지구는 원심력에 휘말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우리는 각자라는 도생(圖生)으로 점점 빠져든다
중환자실 창가에서 보는 밤하늘은 소용돌이가 달린 옷을 입고 있다 별들이 추는 우주의 춤을 본다 나선형 속에서 일생을 함께했던 죽음은 이제 혼자가 되어 블랙홀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자신만 아는 스텝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당신은 끝내 불춤 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떠난다 벗어 놓은 한 벌의 춤,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다
소용돌이 속의 무용수, 친구, 어머니, 아재, 영욱, 꼬마 소꿉놀이하던 철수, 명자, 순분, 순년, 복자 모두 한곳으로 모인다
이후, 라는 문장
종이를 구기면
나무들의 얇은 비명이 들려옵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에선 더더욱
북쪽을 편향하는 나무의 울음을 듣습니다
아마도 나무는 오래전
울음을 나이테에 새겼을 것입니다
여름 숲은 제지 공장의 월요일 같습니다
꽃과 나무의 기형은
비극을 저술해 놓은 문자입니다
열매가 달린 나무는
잼이나 시럽을 만드는 안내서
거기 사는 짐승들은 백과사전을 증언합니다
잎사귀가 된 울음에 밑줄을 긋고
꽃의 비명을 받아 적습니다
오늘은 종이 앞에 펜을 들고
접힌 계절을 풀어 봅니다
나무의 아우성을 소리 없이 받아씁니다
종이가 된 나무는
이후, 라는 문장을 처음부터 알고 있습니다
비명을 지르고 난 뒤
구깃구깃 주름을 얻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처음 뿌리의 언어를 가르쳐준
흙과 바람과 태양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열람용 봄
어떤 식물엔 식물들만 아는 정확한 날짜들이 있어
꽃피고 지는 일만큼 확실한 기록은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꽃들은 모월 모일 같은 날짜를 품고 있어
이파리 돋는 시간
봉우리 맺히는 시간
활짝 피는 시간을 나비와 벌들은 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어
관객으로 늘 초대받지
그래서 들녘 전시관은
제비꽃이라는 날짜, 민들레라는 날짜, 엉겅퀴라는 날짜를 즐겨 쓰지
아무도 모르게 지구가 살짝살짝 흔들리고
우주에 떠 있는 태양과 달이 돌아가면서
지구의 춥고 어두운 통점을 슬쩍 껴안으면
봄은 활짝 열리지
갸웃거리는 시차들이 섞이기도 하지만
괜찮아
봄은 봄이라서 꼭 오고야 말테니까
[출처] 김향숙 시인의 시 세계|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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